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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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요일 4:11-12).
마땅하다’라는 단어는, ‘그렇게 하거나 되는 것이 이치로 보아 옳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은 그 마땅한 것들이 못마땅히 여겨지는 때가 많습니다. 동일한 단일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입장에서 전혀 다른 것을 마땅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마땅한 것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요즘 정치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많은 사람이 주장하는 것이 마땅한 것일까요? 아니면 힘센 사람이 말하는 것이 마땅한 것일까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신앙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성경이지요, 그렇다면 성경이 마땅하다고 말씀하는 것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마땅한 성경의 도리들이 너무나 불편하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사랑이 그렇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는데, 그 마땅한 사랑을, ‘이런 사람까지 사랑해야 하나?’하며 못 마땅히 여기거나, ‘왜 나만 계속 희생하고 사랑해야 하느냐?’며 억울해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은 안돼!’하며, 「정의」라는 포장지에 잘 싸서, 혹은 「충고」라는 명분으로 분노와 억울함을 쏟아 내고는 합니다.
어떻습니까? 동의 되지요?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고 여기면서도,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불편 하거나, 못마땅한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오늘은 그 마땅히 나눠야 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을 향하여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사랑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서로 사랑해야 마땅하다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11)입니다.
이같이”는 앞의 9, 10절의 내용입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9)
“이같이” 세상 어떤 아비가, 자신의 외아들을 죽여서, 다른 사람을 살리겠습니까?
세상 어떤 사랑이,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려서, 인간을 구원하겠습니까?
이같이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성도가, 하나님 닮은 하나님 자녀로서,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10)는 사실은, 우리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불편해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면서, 그 ‘사랑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주지시킵니다.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 모두는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향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습니다(롬 3:23).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사랑을 받을 수도 없는 무자격자였습니다.
이렇게 자격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습니다”(9)
만일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이렇게(예수를 통해), 나타내(계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도무지 소망없는 존재였습니다.
이같이하나님의 큰 사랑이, “이같이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선물로 주어졌으니, 우리도이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사랑하는 것이 못마땅하게 여겨집니까?
왜? 사랑하는 것이 손해 본다는 생각이 들까요?
그것은, 내가 사랑의 주체라고 착각해서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로 받은 선물을 내 것처럼 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한 하나님 사랑을 나누는 것이 억울하게 여길 때마다, 사랑받을 수 없는 자격 없는 나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아가페;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을 묵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이같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로,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더구나 도무지 하나님을 알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자격 없는, 죄인인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 사실, 이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일에 성공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를 “마땅하다”는 뜻의 헬라어 ‘오페일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땅하다”의 원어적 의미는 ‘빚지다’입니다.
이 ‘빚지다’라는 의미를 중심으로, 11절의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까지 엄청난 사랑의 빚을 졌다’라고 해석해 보았습니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만 마땅합니다. 빚을 갚지 않으려는 사람은 사기꾼이 되고,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은 신용불량자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지 않으려는 것은 불순종이고, 끝까지 사랑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앙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일의무적인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금전적인 채무는 지면 질수록 부담이 되고 고통이 되지만, 사랑의 빚은 은혜와 기쁨을 배가시키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빚과 관련해 흥미로운 말씀을 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우리 성도가 빚져야 하는 유일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차(서로) 사랑의 빚’을 지라는 것은, 성도 간에 무한 사랑 채무를 지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은 갚기 위해 늘 노력해야 하지만, 여전히 사랑해야 할 기회가 남아 있는, 결코 완불될 수 없는 빚이므로, 계속 갚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랑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거나,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사랑의 빚을 갚는 기회를 거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큰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일까요?
베드로가 예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마 18:21)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2)라고 답하시고,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종이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6천만명 품삯, 금시세 50조원 정도)의 빚을 졌으나, 임금은 그를 불쌍히 여겨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종은, 백 데나리온(100일 품삯, 은400g)을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에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 18:33)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는 우리는,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내 공덕이나 능력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엄청난 사랑과 용서의 빚을 졌기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행위그 사랑의 빚 일부를 돌려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주님의 말씀처럼, “마땅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빚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전적인 은혜입니다.
사랑의 빚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사랑의 빚크면 클수록 은혜가 더 풍성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누면 나눌수록 더 큰 기쁨과 감사라는 이자가 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는 사도 요한의 권면은,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진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갚아야 할 은혜의 빚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사랑의 빚’을 ‘서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또 ‘갚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로 사랑하면, 그 사랑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이제, 사도 요한은 ‘성도가 서로 사랑하면, 그 사랑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보게 한다’고 말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12)
영이신 하나님보이지 않으시며 본 사람도 없지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본문을 존 스토트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서로 사랑은 아들 안에서 당신을 계시하신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서로 사랑할 때 자기 백성 가운데서 계시 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자리입니다. 성도들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 세상 에 증거되는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온 세상에 보여주는 전시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초대 교부(교회의 아버지)였던 터툴리안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성경 공부를 통해 그리스도께 인도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고 그들을 그런 방식으로 살게 하는 그것을 나도 갖고 싶은 마음에서 그리스도께 인도함을 받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땅히 서로 사랑하면, 삐걱거리는 우리 개개인의 인생은, 하나 하나 조율되어서, 마침내 멋진 앙상블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멋진 사랑의 앙상블이 교회와 성도의 삶을 통하여, 세상을 향해 울려 퍼질 때, 세상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작은 예수가 되어, 우리 삶에서 예수를 보여줘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이 땅에 임한 작은 하나님 나라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 방법이,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님의 당부를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 고백적 삶을 살고, 서로 사랑하는 실천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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