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112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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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Transcript

모든 것을 드려야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함께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나아오신 여러분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크신 복이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지난주에는 함께 여호수아 말씀을 나누었었죠? 요단강을 건넌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일하신다는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함께 읽으셨다면, 오늘의 이야기는 지난주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이어진다는 것을 함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여호수아 체제의 이스라엘이 겪는 첫 실패의 사건을 함께 보게 될 것입니다. 요단강으로부터 시작하여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실패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은 무엇이었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구요,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그 실패의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함께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지난주에 나누었던 요단강의 사건을 지나서 가나안에서의 첫 전투인 여리고성 전투를 크게 승리한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잘 아시다시피 여리고성에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 성 주변을 칠일간 돌고, 마지막날 일곱번을 돌면서 소리친 것만으로 성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힘들이지 않고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커다란 승리 후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또다른 명령을 내리십니다.
여호수아 6:18 NKRV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바로 성 안에 남은 모든 재물 등 물건들을 손대지 말고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제사할 때를 생각하시면 편할겁니다. 제사할 때, 제물을 살아있는 대로 드리나요? 아니죠. 죽여서 바치게 됩니다.
그렇다는 것은, 무너진 여리고성에 남은 모든 것들은 결국 다 죽이고, 불태워 없애야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문용어로 헤렘이라고 합니다. 헤렘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든 것을 싸그리 죽여 없앤다는 진정한 뜻을 갖게 되었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다 불태워 없앱니다. 단지 하나만 빼고, 바로 정탐꾼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라합과 그의 가정만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불타게 됩니다.
그렇게 큰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 백성들의 다음 목표는 무엇이었느냐, 바로 아이성이라는, 여리고성보다는 규모가 작은 성읍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전에 행했던 그대로, 정탐꾼을 보내고, 그 규모를 확인한 후에 3천의 군사만을 선별하여 보내게 됩니다. 아마 모두가 무리없이 승리하고 돌아올 것이라 판단했을겁니다.
드런데 놀랍게도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이 삼천명이 아이 성의 기세에 눌려 도망하고 만 것이죠. 즉 패배를 겪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도망하는 와중에 아이성 군사들에 의해 많은 인명이 죽음을 맞게 되면서 이전까지 하늘을 찌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위기는 한순간 곤두박질치게 됩니다.
이 일은 접한 여호수아는 무조건 이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파악하고 바로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저물때까지 그대로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답을 주시죠.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나와의 언약을 어겼다. 온전히 바쳐야 하는 물건을 도둑질하여 속이고 가져갔다.
그렇기에 내가 그 전투에서 함께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물건을 없애지 않으면 나는 다시는 너희와 함께하지 않겠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명하십니다. 아침에 지파별로 제비를 뽑아 나온 자가 도둑질한 자이니 그를 불사르라.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대로 아간이 나오게 됩니다.
아간은 그전까지 모든 사실을 숨겼지만, 자신에 제비에 뽑히자 결국 모든 사실을 시인하고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과 은 이백 세겔, 금덩이 오십 세겔을 땅 속에 감추었다 밝힙니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그 모든 제물과 함께 아간의 모든 가족과 재산까지 모두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사람은 돌로 쳐 죽이고 모든 것을 불살라 그 위에 돌 무더기를 쌓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하나님은 모든 진노를 거두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곳을 아골 골짜기로 명명함으로써 모든 사건이 마무리됩니다.
이 사건은 여러분들이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아간의 범죄 사건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이 이야기를 들으실 때마다 어딘가 불편함 감정이 존재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잔인하실까.’
우리가 생각한 하나님은 마치 여느 영화에 나오는 결말처럼 모든 죄를 고백한 죄인을 용서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셔야할 것 같은데, 오늘의 말씀에서는 회복은 둘째치고 아간 뿐만이 아니라 아간의 가족과 재물까지 모두 다 없애버리시는 무서운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러다보니 이분이 내가 아는 하나님이 맞나? 라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흔히 생각하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른 분 같다는 결론으로까지 맺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구약의 하나님이 다른 분이라던가 엄청 잔인하신 분이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그 언약의 중대함을 우리가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된 ‘헤렘’ 이라는 의식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라 당시 근동지방에서 자주 행해지던 전통으로써 앞서 말했던 대로 모든 것을 다 불태우고 없애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다 불태우는 이유는 전쟁에서의 승리가 자신들의 것이 아니고, 오로지 그들을 도운 신의 것이기 때문에, 그 전리품 역시도 신께 향해야 한다는 이유였던 것이죠.
그랬기에 하나님도 그 모든 의식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전쟁의 승리를 자기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리기를 원하셨고, 그 표현으로써 모든 것을 불태우는 헤렘을 행하라 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아간이 행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그 드려져야 하는 재물에 손을 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사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아간이 잘못을 했지만, 그정도인가 싶기도 할거에요. 그가 숨긴 것이 뭐였죠? 시날 산의 외투 한벌, 은 이백 세겔, 오십세겔 금덩이었어요.
그런데 그 물건들이 어디서 나왔어요? 여리고성에서 나왔단 말이죠. 여리고성은 주변지역 중에서도 손꼽히는 강하고 큰 성이었어요. 그 큰 성이 무너졌다는 것은 엄청난 재물과 물건들이 떨어져나왔을텐데, 외투 하나랑 돈 몇푼 챙긴거면 그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이 된다는 것이죠.
우리의 시선에서는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죄 많은 우리의 시선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앞서 하나님께서 불태우라고 하신 이유가 뭐라고 했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 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조금이라고 해도 그것에 손을 대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에요? 하나님의 것에 손을 대었다는 것이고, 이는 곧 도둑질을 했다는 뜻이 될겁니다.
그렇기에 주님도 말씀에서 온전히 바친 물건을 도둑질했다고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간이 그 물건들을 챙겼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자신이 이 전투에서 이정도의 역할을 감당했다고 스스로 인정했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투의 모든 공을 하나님께 올려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에게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있어서는 안되는 교만이겠죠. 결국 이 모든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은 아이성 전투에서 그 모습을 보이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자신들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바치지 않았으니 다음의 전투에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죠.
자 그런데, 이쯤에서 또 드는 생각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 왜 아간 혼자 범죄했는데 모든 공동체에게 책임을 돌리시지?’ 그렇죠. 마치 군대 연대책임하는 것 마냥 좀 너무하시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시는 것은 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공동체 안에서 나타난 죄악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시는 주님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잠깐 제 얘기를 하자면, 연대책임이 나왔으니까. 군대에서 저도 그 연대책임이라는 것을 지어본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었냐면, 제가 복무했던 15년, 16년도에는 군대에 핸드폰이 사용금지 물품이었어요. 그런데 워낙 거기가 폐쇄되어있다보니까 다들 핸드폰을 쓰고 싶어했죠.
그런데 저희 내무반에 몰래 핸드폰을 숨겨놓고 썼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모두가 그들이 핸드폰을 숨겨서 쓰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크게 제재하지는 않았죠. 저도 다 선임이기도 하고, 그냥 그런가보다 하도 크게 생각을 안했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그게 걸린거에요. 핸드폰을 충전해놓고 나갔다가 그게 적발된 것이죠. 그리고 그날 저희 내무반 모든 인원에게 완전군장으로 연병장을 도는 징계가 내려졌죠. 사유는 방관죄와 연대책임이었습니다.
그렇죠. 사실 저는 핸드폰을 쓰지도 않았어요. 그러니 제 입장에서는 나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도 죄였던 거에요. 같은 전우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교정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던 죄.
만약 자기일 아니라고 해서 그대로 두었다가, 그 핸드폰으로 인해 부대에 말썽이 생기고 큰일들이 생기면 결국은 누가 손해를 보는거에요? 작게는 모든 부대가 손해를 보고, 더 나아가서는 국가도 손해를 볼 수가 있겠죠. 그러니 이 연대책임이라는 것, 공동체 의식이라는 것은 작게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크게는 이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리가 나서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는 거겠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함께 벌을 내리셨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아간이 몰래 와서 장막에 숨기고 땅에 감추었다고 해서 정말 아간만의 일이고 모두가 모를 수밖에 없는 일이었을까요?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가 지금 아파트처럼 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장막 펴놓고 같이 사는데, 충분히 아간이 뭔가를 가져가고, 뭔가를 숨기고 있고,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있고 하는 것을 알려면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동체가 그것을 방관했다는 것이죠. 서로에게 대해 자신의 일처럼 대하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간을 통해 스며든 죄악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전쟁에서의 패배라는 큰 아픔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공동체에 스며드는 죄의 위험성입니다. 빠르게 그것을 판단하고 빠르게 조치하지 않는다면, 그 죄는 공동체 깊이 스며들게 됩니다.
아간이 저렇게 챙긴다고? 그럼 나도 챙겨야지. 이런 생각들이 슬금슬금 퍼져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해, 그 위험성을 알리고, 공동체가 더욱 서로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모두에게 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한가지 더 의문이 생겨요. 그러면 이제 모두가 죄에 대해서 알았고, 위험성도 깨달았을텐데, 굳이 아간과 그의 가족까지 죽였어야 했냐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아마 구약의 하나님이 잔인하다고 생각을 들게 하는 가장 큰 부분일수도 있을 텐데요,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앞서 우리는 아간이 행한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교만에 빠진 죄악이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게 되었던 것도 확인했죠.
자. 아간이 지은 것은 확실한 죄입니다. 그러면, 죄에 대해서는 무엇이 있어야하죠? 분명한 처벌이 있어야 합니다. 게다가 오늘 아간이 행한 죄는 하나님의 것에 손을 댄 치명적인 죄악이었어요.
그렇다면 그 죄에 대한 공정한 판결은 사망일 수밖에 없겠죠.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공정함입니다. 공의로움이에요.
뿐만 아니라 앞서 보았던 공동체의 공동선을 위해서도 죄악이라는 것은 빠르게 조치가 되어야 합니다. 상처가 몸 전체에 번지기 전에 잘라내야 하듯이, 공동체 안에 죄가 스며들기 전에 그 죄악은 끊어내야 합니다.
결국 가장 합당한 판결은 사망이었던 것입니다. 아간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공정한 판결을 받았던 것이죠.
그러면 가족들은 왜 같이 죽어야 하느냐?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까 그랬잖아요. 이스라엘 이웃들도 숨긴거 알려면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가족들이라고 달랐을까요? 오히려 가족들이야 말로 더 잘 알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가족들은 공범이었을지도 모르죠.
가족들도 그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의로우심 앞에 죄악은 존재할 수가 없던 것이죠.
결국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판결 앞에서는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악은 분명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죠.
이러한 장면은 오늘 말씀 뿐만 아니라 정말 수없이도 등장합니다. 한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웃사의 예를 들 수 있겠죠.
웃사라는 사람은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다시 모시고 올때 그 모시는 일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언약궤를 수레에 실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죠.
그런데 그때 갑자기 수레를 끌던 소가 놀라서 크게 움직였고, 그 움직임으로 인해 수레가 흔들리고, 언약궤도 흔들리자 웃사도 놀라 언약궤를 잡게 됩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잡은 순간 웃사는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했을 때 이 사건은 너무나도 억울하게 느껴집니다. 웃사는 그냥 언약궤 떨어질까봐 잡은건데 왜 그렇게 죽게 하시냐. 하나님이 너무 고지식하신 것이 아닌가 싶기까지도 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앞뒤 내용을 잘 살펴야 합니다. 웃사가 언약궤에 손을 대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죠? 수레가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수레가 흔들렸을까요? 왜 이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일까요?
당연하죠. 그 방법 자체가 올바른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언약궤는 어떻게 옮겨야 했을까요?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던 것처럼 레위자손 제사장이 손으로 들어서 옮겨야 했어요.
그런데 제사장이 아무리 없다고 해도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상징인데, 그걸 그냥 수레로 옮긴다는 것은 전혀 하나님에 대한 존중의 의식조차 당시 백성들에게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웃사를 치시면서 백성들 안에 있는 잘못된 생각, 그 죄악들에 대해서 나타내신 것입니다.
아간의 죽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아간의 죄악에 대해서 크게 벌하시면서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큰 죄악이며, 그 죄악의 결과는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돌아와봅시다. 어쩌면 오늘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마음 속에 엄청난 두려움과 겁이 생겨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전 행했던 죄악들이 떠오르면서 이러다 나도 죽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드시겠죠.
하지만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형벌을 내리시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단언할 수 있냐구요? 바로 예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이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앞에 모든 죄악을 탕감받은 존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이미 짊어지고 다 해결하셨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우리가 어제 지은 죄? 또 내일 지을 죄? 그 죄악들로 인해 아간처럼 갑자기 죽게 되고 이럴 일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자꾸 말씀에서는 무섭게 이야기를 하느냐, 생각이 드시겠죠?
당연히 그 죄악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벌이라는 것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죄악으로 인해 벌받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요.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흔히 말하는 까방권으로서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존재들이기에 죄를 지어도 아무런 타격이 없다! 라는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에게 어떤 마음이 있어야 하느냐, 우리가 지은 그 엄청난 죄악들, 다 알잖아요? 어쩌면 저 아간보다도 더 심한 죄악일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 모든 죄악을 그리스도께서 다 짊어지셨다는 것. 우리 대신 그 고통을 다 받으셨다는 것. 그것에 감사함으로 앞으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사실 우리의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이루신 하나님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을 내 맘대로 또 죄를 짓고 살아가겠다고 하는 것? 하나님의 것을 내 맘대로 처리하겠다는 아간의 죄악과 마찬가지의 모습이겠죠.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졌다는 것은 사실 그 믿음 자체가 진실되지 않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전당포에 물건을 맡겨도 최대한 잘 보존을 해주는데, 우리 삶 전체를 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제대로 생각하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그 은혜를 누릴 자격 자체가 애초에 없었다는 말이 되겠죠.
그렇기에 소위 말하는 구원파들, 앞으로 나는 죄 지어도 된다는 자들이 사이비이고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이죠.
우리의 앞으로의 삶에서는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온전히 드리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것들, 우리가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신 것처럼 주님께서 다 행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교만함으로 내 것을 챙기려 하고, 내 맘대로 살고자 하면, 하나님은 그 자리에 함께하시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삶은 사망의 결과밖에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라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린 자들이라면,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나의 모든 삶을 헤렘. 드린다면, 주님은 그 자리에서 언제나 함께하시고 여러분들의 삶에서 승리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께 모든 것 드리고 의지함으로, 죄악에서 벗어나 주님과 함께 승리를 누리는 우리 모든 하임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 예수로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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