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생각하라 / 엡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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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생각하라 / 엡2:11-16
지난주 주일부터 계속해서 에베소서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그러므로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과거에 우리가 어떠한 생활을 하였으며 그러나 지금 우리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는가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크게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 우리의 생활은 어떠하였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이방인이요, 무할례당이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알기 전인 그때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무할례당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던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의 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택함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애굽과 싸울 때, 미디안과 블레셋과 싸울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 편이 되신 것처럼 이제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의 편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너희들은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너는 내 백성이다, 너는 내 자녀다 하시는 말씀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밖이란 하나님 밖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없이 산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며 산 것을 말합니다. 노아 시대에 죄악이 너무 깊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시며 홍수로 멸망 시키셨습니다. 어쩌다 이러한 무서운 심판을 받을 만큼 죄악이 깊어졌습니까? 하나님 밖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밖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법도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내 배나 부르고, 내 등이나 따뜻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내 만족, 내 기쁨, 내 영광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내 배를 섬기며 살았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길은 평안한 것 같고, 자유로운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은 넓고 평탄해 보입니다. 그래서 찾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인 줄 알기에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좁은 길을 걸어갑니다. 주님이 주시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려고 합니다. 이 길이 영생의 길, 구원의 길, 복된 길임을 믿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하나님 없이 살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우상 숭배하며 살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해서 결국은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참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가운데 임하였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약속도 소망도 하나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위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은 소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바라보며 환난 가운데 인내하였고, 절망 가운데서도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소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멀리 있던 우리도 그때는 하나님의 약속과 관계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원한 천국과도 관계없고, 하나님 나라의 생명수, 생명 열매, 생명의 면류관과도 관계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이 이루어지는 날 영원한 저주와 형벌의 장소에 던져질 운명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의 약속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과 함께 영광 가운데 거할 약속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며,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받은 이 은혜를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전에는 이방인이요 무할례 당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생각하십시오.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음을 생각하십시오. 전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관계없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되었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자녀 삼으시고, 약속을 주시고, 구원하여 주신 것은 선한 일을 하도록,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려는 귀한 목적이 있음을 깊이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던 자요, 죄인의 괴수인 자신을 부르신 것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복음을 증거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려는 목적이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목사로 세우셨는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왜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속장으로, 또한 교사와 찬양대원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는가를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은 신기한 것을 좋아하고 원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는 말하기를 ‘신비한 것(그리움)에 대한 동경에서 종교가 발생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사람의 존재가 신비한 만큼 사람들은 신비한 것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종교사를 살펴볼 때 신기한 사건들이 그 종교적 핵심을 이루고 있는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인간의 심리적 작용을 역이용하여 갖은 미신적 행동에 빠지도록 하는 샤머니즘 운동이 이 땅에 많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많으나 능력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능력은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의 결정체입니다. 십자가야말로 하나님 권위의 최고의 상징이며 구원의 완성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놀라운 표현이며 인간이 의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기초입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가 이방인이요 죄인들에게 어떠한 능력을 주었습니까?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에베소서 2: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천한 이방 사람이 하나님의 귀한 자녀가 되는 사실은 놀라운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11절)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무할례당이라고 수모와 천대를 하였습니다. “개들이라”고 불렀고 심지어 “지옥불의 땔감”이라고까지 저주하였으며 그들 격언에 “뱀은 박살내고 이방인은 죽여버리라”라는 말까지 할 정도로 천시했습니다. 더욱이 이방인과 결혼하면 그 집에서 장례식을 했다고 욕설을 할 정도였습니다.
이와 같이 천대받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을 받았으니 이 얼마나 귀하고 신기하고 영광스러운 축복입니까?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에베소서 2: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고,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감을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한 지위와 권세를 가지고 존귀와 영광을 얻으며 나아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제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하나님의 자녀요, 권속입니다. 이는 십자가의 신기한 능력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축복입니다.
두번째로, 가진 것이 없던 자가 가지게 되는 능력이 있습니다.
가진 것이 없는 자는 인간 중에서 소외당하고 천대를 받습니다. 권력이 없어 짓밟히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지식이 없어 무시당하고 믿음이 없어 지옥으로 가는 고통을 당해야만 합니다. 우리도 믿기 전에는 아무 것도 없던 자였습니다. 우리는 믿기 전에 무엇이 없었습니까?
1. 그리스도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없이 그리스도 밖에서 살던 이방인들은 생명의 원천에서 떠나고 축복의 근원에서 떠나 영원한 지옥의 생활을 하던 자입니다.
2. 약속도 없었습니다.
구원의 약속, 성령의 약속, 축복의 약속, 영생의 약속이 없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3. 소망이 없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자처럼 약한 자는 없습니다. 비록 물질과 권세는 없다 할지라도 소망이 있으면 인생은 아름답고 보람 있게 삶의 행복을 소유할 수 있고 만사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망은 우리 삶의 힘이요 기쁨입니다. 그러나 소망 없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우리는 소망이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절망 가운데 하루하루의 생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가슴속에 소망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참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 볼 수 있고, 참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참된 생활은 말씀의 능력만이 가능하고 영원한 건설은 십자가와 부활의 힘으로만 이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안 계셨습니다. 이렇게 귀한 것들이 전에 우리에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어주심으로 해서 우리는 구원과 성령과 축복과 영생의 약속을 받게 되었고 산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십자가의 능력입니까?
세번째로, 새롭게 창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한 가지만 더 든다면 그것은 부패한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 사역에서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을 보게됩니다. 그 창조 사역이 신기하듯이 썩은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것 또한 신기한 창조 사역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의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할지라도 썩은 인간을 개조할 수 는 없습니다. 바울은 오직 십자가의 능력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있어야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 외의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있기 전 우리의 모습은 부패하여 냄새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었습니다. 오직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 우리는 가치가 있게 되었습니다.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역사는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네번째로 통일의 능력이 있습니다.
13-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에베소서 2:13–14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 말씀은 분명히 통일의 힘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로 되게 하는 다리와 같고 줄과 같은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줄로 우리를 얽매어 천국으로 인도하시고 십자가로 다리를 놓아 세상에서 천국으로 가도록 하였습니다. 이 십자가의 다리야말로 화평의 다리요, 사랑의 다리요, 평안과 기쁨의 다리입니다.
신기한 능력은 사람의 힘도 아닙니다. 과학의 힘도 아닙니다. 정치의 힘도 아니고 오직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천한 자가 존귀하게 되었고, 없던 자들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패배하던 자들이 죄악의 원수, 사단의 원수, 무신론의 원수, 죽음의 원수를 이길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새로운 정신, 깨끗한 양심, 밝은 사상으로 하나가 될 것을 믿습니다.
인류의 원수 사탄은 계속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를 이간시키고 분리시키는 일을 합니다. 오늘도 악한 사탄의 역사는 하나를 둘로, 둘을 넷으로 분리시키는 일을 해서 좋은 사람을 나쁘게 만듭니다. 그러나 둘을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 막힌 죄의 담을 허시고, 하나님과 인류를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도 그를 닮아 이 분열과 갈등이 극에 달한 시대에서 둘로 하나를 만드는 새 역사를 창조해야 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무엇을 하나로 만드셨습니까?
먼저 그리스도는 둘로 분리된 자아를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 실존은 파스칼의 말대로 오르면 천사처럼, 내리면 짐승처럼 되는 존재입니다. 두 가지 자아가 부단히 싸우는 전투장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인간 실존에 대해서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7:22-24)라고 하며 절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끈질기게 내 안에서 상극 관계를 이루고 싸우는 내 인격을 하나로 묵을 수는 없을까요? 그것은 오직 주 예수께서 내 맘에 들어오셔서 나를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생의 주인으로 내 속에 좌정하시는 순간부터 인생관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여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통합과 일치를 이루어 변화 받는 새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하는 감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의 분열된 인격을 하나로 만드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두번째로, 그리스도는 유대와 이방 세계를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과거에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민이라 하여 종교적 특권을 가진 민족으로서 할례를 자랑하였고 이방인은 율법이 없음으로 종교가 없는 민족이라 하여 이방인을 죄인시 하며 허락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외인시했고 세상에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던 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와 이방은 문화권이 다르고 종교적 전통이 다릅니다. 두 세계는 마치 물과 기름 같이 개와 고양이처럼 도무지 공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이 두 세계를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십자가에 접하는 모든 사람들로 모든 과거의 사실을 장사지내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새 사람이 되게 합니다(고후5:17).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종적 문화적 차별이 철폐되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는 유대인이 그토록 자랑하는 할례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행하는 할례만이 참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3:28절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합친 연합체입니다.
세번째로, 이 땅위에는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가 된 다는 것은 우리 일상 생활가운데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먼저 마음이 하나로 합쳐졌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교회적으로 가정적으로 개인적으로 먼저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불가능합니다. 오직 십자가 안에서 가능합니다. 그러면 심리적 거리를 어떻게 단축시킬 수 있을까요?
1. 자기 자신의 회개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흠을 볼 수 있지만 자신의 흠은 보지 못합니다. 참회의 마음 없이 심적 거리의 단축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보고 회개함으로부터 심적 거리를 단축할 수 있습니다.
2. 친절과 사랑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으로서 서로의 이해가 깊어집니다. 사랑은 모두가 원하는 바이나 모두가 상실하고 있습니다. 사랑만이 둘 사이를 힘있게 연결시키고 헤어지지 않게 굳게 결속시킵니다. 세상이 이렇게 차갑고 어두운 것은 사랑의 결핍에서 생긴 것입니다.
3. 서로가 믿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함께 사는 사회입니다. 함께 사는 사회가 밝아지려면 서로가 믿음이 회복될 때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서로 믿지 못해서 마음의 간격이 생깁니다. 서로 의지하면 가난해도 화목하나 믿지 못할 때는 의심도 생기고 미움도 일어납니다. 서로 믿을 때만 사랑의 빛이 밝아지고 그 열이 연속됩니다. 믿음이 회복되면 두려움이 없고 싸움도 없어집니다.
4. 공동의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공동 목적이 있을 때 사랑과 신뢰로서 결속된 정신적 동기가 됩니다. 서로 존중히 여기며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합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가기 위해 서로 뭉치고 정신적 결합을 창조합니다. 위대한 목적의 달성을 위한 모험으로 엮어진 우정은 지리적 거리와는 관계 없이 서로 뭉칩니다. 이러한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과 화목으로 가능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류를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인류에게 가장 큰 비극은 하나님과의 원수 됨이었습니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범죄 한 후로 인류는 하나님과 멀어졌고 가까워질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모든 인류의 불행과 비극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분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러한 하나님과 인류의 분리는 새로운 전환점을 이루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드리심으로써 하나님과 인류 사이를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서 하나님과 인류의 원수 관계는 완전히 청산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는 친자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인류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가족으로 묘사한 것은 완전하게 하나가 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족만큼 결속력이 강한 단체는 없습니다. 가족 안에서는 특히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이기심이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희생적인 보호와 즐거운 복종만이 존재합니다. 바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된 성도의 관계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를 조건 없이 축복하시고 보호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고 구속주가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즐겁게 충성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에릭 프롬은 말하기를 '인간 심리와 행동의 모든 의식적 ․무의식적 원천에는 분리를 극복하려는, 합일(合一)에 이르려고 하는 동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갈라진 둘이서 하나가 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시인 김 소월은 (초혼)에서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이 말 속에는 한 손으로는 내 손을 붙잡고, 또 한 손으로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내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심장이 터지도록 외치는 절규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어두웠던 지난날 그 절망스러웠던 과거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가 우리 역사에 어떻게 개입하셔서 우리를 우리 되게 하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냈던 편지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사랑의 주님!
언제나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때로는 받은 이 은혜를 잊고 살았던 지난날의 모습들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간절히 간구하옵기는,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십자가의 능력으로 날마다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구원받은 백성으로 증인된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 이루어 주실 것을 믿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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