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사람답게 세월을 아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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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에도 시간이 없는데, 그 아까운 시간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나 유익하지 않은 일이나 악한 일에 낭비한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알려줍니다.
1. 세월을 아끼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5절)
먼저 어떻게 행할지 자세히 주의하여 살피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관하여 ‘자세히 주의하라’고 합니다. 대충대충 하거나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되고, 자세히 살피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했습니다. 감옥에 갇혔을 때 기록했다고 해서 ‘옥중서신’이라고 불립니다. 바울이 여기서 이 단어를 사용할 때는, 바리새인들의 치밀함과 철저함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것입니다.
바울은 원래 유대인의 종파 중 바리새파에 속했습니다. 그중에도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바리새파 석학의 문하에 있던 제자였습니다.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바울은 자기를 소개할 때 ‘조상의 율법의 엄격한 방식을 따라 교육을 받았다’(행 22:3)라고 합니다. 원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이 ‘자세히’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철저히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애쓰는 바로 그 치밀함과 정확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지적하셨지, 그들의 치밀함과 철저함을 지적하신 게 아닙니다. 심지어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은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는 교훈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가르치는 대로 살지 않는 그것은 본받지 않아야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그 자체는 굉장히 옳은 말을 많이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는 데에 그런 치밀함과 정확함과 철저함을 가지고 하라는 말입니까? 지혜롭게 행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라’라고 하면서,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그 철저함과 정밀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주 자세하게 또 아주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열두 제자들을 전도하도록 파송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 10:16)
세상은 이리와도 같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양처럼 연약합니다. 그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합리적인 것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만족을 주고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그것이 불의한 것이라도 그것을 선택하며 살아 갑니다. 알면서도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주님의 제자로 살겠다는 결단하며 나아가려면 특별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열심과 정성만 가지고는 이 시대를 이겨 나가기 힘들다는 것을 예수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부정적인 이미지로 나오는 뱀이라는 단어를 들어서까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먼저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깨끗한 삶, 정결한 삶,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비둘기의 순결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겁니다. 뱀과 같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영성이 있어야 하는 동시에 지성이 필수적이며, 이 세상의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참된 그리스도인답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가려는 사람에게는 지혜로운 순결 또는 순결한 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2. 시간을 구원하라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6절)
15~16절을 헬라어 원문에서 직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시간을 사면서, 지혜롭지 못한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자 같이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살피십시오. 왜냐하면 날들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할 때 ‘아끼다’라는 동사는 ‘사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속량’ 또는 ‘구속’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속해 있는 노예를 사면서 돈을 지불하는 것이 속량인데, 그런 것처럼 ‘시간을 사서 속량하라, 구속하라, 구원하라’는 명령입니다. 시간을 구속하라, 시간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때가 악하니라”고 했는데, 직역하면 ‘날들이 악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는 악한 세력에 의해 점령당하여 악해져 있습니다. ‘시간을 구속(구원)하라’는 것은 이 악한 날들을 다시 사서 주님의 것을 만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월을 아낀다는 말은, 시간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데 사용하라는 것을 말합니다. ‘시간을 사라’는 것은 가만히 시간을 흘려보내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을 하면서 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악한 시대 가운데 악해진 시간을 다시 사들여 주님의 것으로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의미 있는 시간을 말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삶이라는 시간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 하루 24시간이며 누구에게나 똑같습니다. 천재적인 사람, 엄청난 재벌이나 부자, 또 대통령 같은 사람들에게도 하루는 24시간이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나 인생의 패배자라고 할 만한 사람에게도 하루 24시간은 똑같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내게 주어진 시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의미 있는 시간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것입니다. 시간이 우리의 인생인데, 그러니까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인생을 제대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제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붙들어 구원하고 바꿔서 의미 있는 시간으로 활용하라는 겁니다. 그 시간을 산 제사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제대로 사는 인생입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인생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인생은 혹시 성공하고 엄청나게 돈을 벌고 엄청나게 높이 올라가더라도 결코 제대로 산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보실 때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야, 너 참 성공했구나. 잘했다.’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네가 성공한 건 좋은데 내가 살라고 한 대로는 안 살았네.’라고 하실 겁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인생이 제대로 산 인생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7절)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무엇이 어리석은 것입니까?
그런데 무엇이 정말로 어리석은 것입니까? 인간적으로 약삭빠르지 못한 것입니까? 줄을 잘 서지 못하면 그게 어리석은 것입니까? 인간적으로 약삭빠른 것은 잠시는 이익을 볼지 모르지만 결국은 망하는 길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시각, 영원의 차원으로 보면 그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리석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 나와 있습니다.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17).
그러니까 주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가 된다는 겁니다. 어리석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며 이끄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일부러 악을 일으키시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악함도 선함으로 바꿔주십니다. 바로 그런 뜻을 찾아야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아도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감정에 따라서 결정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다 알면서도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 이건 하면 안 돼.’라고 하는데, 자꾸 마음이 끌려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경우. 사실 어쩔 수 없이 한 게 아니라 자기가 원해서 한 겁니다. 그런데 말로는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했다.’라고 합니다.
가만히 보면 이런 것들이 다 논리에 따라 결정하는 게 아니라 감정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겁니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철저히 나 자신의 뜻, 내가 원하는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분별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똑똑한 것처럼 보이지만 지극히 어리석은 결정들을 내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인간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죽 기록해 놓았습니다.
사실 사람은 똑똑합니다. 짐승에 비해서 얼마나 똑똑합니까? 인간의 지성으로 이루어낸 학문의 업적을 보면 그 깊이가 정말 대단합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지 정말 놀랍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이 아무리 탁월해도 하나님의 일은 머리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차원과 하나님의 차원이 너무 다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영적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기를 천재라고 또는 수재라고 치켜올려 주면 우쭐해서 자기가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그런다면, 그것은 교만이며 동시에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계를 지닌 인간이 자기 분야도 다 모르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크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머리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주셔서 그것을 우리가 볼 때 알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을 신학 용어로 ‘계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를 통해 알려주시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계시해 주신 말씀을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이 성경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보여주시며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구속하고 짧은 인생을 보람차고 가치 있게 살려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이 유명한 말씀을 합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1-2)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자신의 얄팍한 지식과 경험과 지혜를 일단 접고 하나님께 겸손히 복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기도이고 말씀 묵상이고 예배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영적 분별력이 없는데도 자기주장만 내세우게 되면 잘못된 길로 빠집니다. 자신의 것을 버릴 때 하나님의 뜻이 이해되고, 자기 뜻을 접을 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몸을 드리라!” 바로 이것입니다.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몸을 드리는(바치는) 것, 바로 이것이 ‘헌신’입니다.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헌신한다는 것은 곧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이며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헌신의 삶을 산다는 것은 지금 내가 있는 이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계속 찾으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헌신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뭔가를 열심히 하겠다고 하면 그것도 물론 헌신이지만,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는데 내가 열심히 하겠다고 그러면 안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실까를 끊임없이 찾고 그것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헌신입니다.
3. 성령 충만을 받으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8절)
하나님의 뜻을 말하다가 왜 갑자기 여기서 술 이야기를 합니까? 성령에 취한 것, 즉 성령 충만한 것과 술에 취한 것이 현상적으로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고 얼마 후 오순절이 되었을 때 120명이 모여서 기도하다가 성령님이 내려오셨는데, 그때 사람들이 보고서 낮술에 취했다고 조롱했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았는데 술에 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고 베드로가 일어나 잘 설명을 한 것이 사도행전 2장에 나와 있습니다.
실제로 고대 종교들은 환각 상태를 유도하기 위해 술이나 마약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박카스’가 있는데 원래 로마 신화에서 박카스가 술의 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술 같은 물질의 주입이 없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 성령님을 부어주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갖도록 해주십니다. 이 에베소서에서는 특별히 성령 충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실천한다고 강조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해되고 그 뜻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도 받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알려주고자 하시는 일을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지혜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한계를 극복하고 영적으로 깨닫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님을 선물로 주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심령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가르침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 고린도전서 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여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그런 체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성령님이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성령님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님이 그 안에 계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혼자 공부한다고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 성령님을 통해 계시해 주실 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바로 성령의 충만함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직접적으로 술에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지만, 술 외에도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우리가 너무 많은 것들에 신경 쓰다가 정작 성령 충만을 얻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니까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뜻을 모르니까 어리석은 자가 되고, 어리석은 자가 되니까 때가 악한 데도 세월을 아끼지 못하게 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성령의 충만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사건은 딱 한 번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믿었을 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렇지만 그 후에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단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계속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기서 ‘충만을 받으라’는 계속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성령 충만을 계속해서 받으라는 것이며, 그런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명령입니다. 성령 충만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상태, 즉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성령 충만을 계속하여 받으면서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다섯 개의 분사형으로 여기 나와 있습니다.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19~21절)
이 다섯 가지 중에 ‘노래하며 찬송하며’(19)를 하나로 묶어서 보면,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 성령 충만을 계속 받으며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9).
성도의 교제와 사귐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 세워주는 일들을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화답’하라는 것입니다. 혼자 찬송을 부르고 혼자 잘 믿고 혼자 기도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화답하며 찬송해야 합니다.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필요한 이유 아니겠습니까? 혼자서도 예배할 수 있지만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이 모여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둘째, 성령 충만을 계속 받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해야 합니다(19).
찬양이 곧 노래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노래로 하는 찬양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렇더라도 노래를 못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라는 말 자체가 찬양이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찬양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 드리는 것이 찬양입니다. 나는 없고 하나님만 높이는 것입니다.
셋째로, 성령 충만을 계속해서 받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20).
감사가 곧 믿음이며 예배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불평 불만만 있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그게 믿음이 좋은 거겠습니까? 감사하는 사람이 곧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감사가 없으면 영혼이 죽기 시작합니다.
물론 믿지는 않으면서 감사만 한다면 안 되겠지만, 정말 믿은 사람이라면 감사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불평이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믿음이 떠납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마음이 어두워지고 또 미련해집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상실한 대로 내버려두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믿음을 잃어버리고 양심도 잃어버리고 윤리도 잃어버리고, 버림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성령 충만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아주 좋은 비결은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너무나 중요합니다.
넷째로, 성령의 충만을 받고 지속하려면 서로 복종해야 합니다(21).
곧 서로 사랑하며 섬기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 ‘복종’이라는 말은 어쩔 수 없어서 말을 듣고 따르는 맹종이나 굴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종은 동등한 입장이지만 상대방의 밑으로 자원해서 들어가 섬겨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서로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복종은 원래 그 당시 고대사회에서 노예에게 해당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서로에게 노예처럼 되어 서로 섬겨주라는 말씀입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듯, 그렇게 서로를 섬겨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바로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종이 발을 씻어주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음으로써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그렇게 될 때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가 되어 세월을 아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언젠가 우리는 이 세상을 다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도착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때를 앞둔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한가하고 나태하게 사는 것일 수가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내가 원하는 아무 방식으로나 살 수 없습니다. 시간을 아껴야 합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다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갈 준비를 하고 있는가?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준비는 하지 않고 전부 이 세상이 마지막인 것처럼 여기에 정말 모든 힘을 쏟고 있다면 그것이 정상일 수가 없습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 원하는 일만 하며 지낼 시간이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치가 있는 일을 지금 하면서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지금 다 관두고 그것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 주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면서 열심히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혜와 믿음으로 마지막을 준비하는 인생, 주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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