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강해설교 작성
갈라디아서 강해설교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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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1.
설교제목: 바울이 선포할 복음의 ‘집약체’(기초)
설교본문: 갈라디아서 1장 1-5절
<서 론> - 배경설명 (롱네커 바울, 마이클 버드 신약성경과 그 세계, 무 갈라디아서,스키너 갈라디아서, 티모시 조시 갈라디아서, 이한수 복음의 정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추천서 참조할 것)
-연대, 발신자 및 수신자(수진자 특징: 대다수 할례X, 이방신을 섬김-갈5:2; 6:12; 4:8)
-유대 그리스도인(다른복음, 가만히 들어온 자, 다른 형제들)의 입장 Vs 바울 사도의 주장
-편지의 양식 차이
-갈라디아 교회가 가진 문제들(할례, 윤리적인 면)
-수신자 문제, 연대 문제, 율법 문제
<본 론>
1.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정당성(1-2절).
<본문 해석>
1세기 당시에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편지를 쓸 때 거의 모든 서신이 발신자와 수진자의 이름, 그리고 “은혜와 평강”의 의미를 담은 인사말로 편지의 서두를 썼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그의 서신 대부분을 이와 같은 편지 형식으로 썼습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신은 그가 썼던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형식에 따른 감사의 인사말을 생략한 채 그의 사도적 권위를 입증하는 내용으로 바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편지를 쓴 이유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떠난 뒤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어떤 사람들”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거짓형제들”이라 불리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전하는 다른 복음을 따라 속히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속히 다른 복음을 따르게 된 이유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신뢰를 흠집 내고 깎아내려, 바울이 전한 복음 보다 그들이 전한 복음이 더 우선되고 신뢰할 만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서 복음을 받은 지 얼마 안 되었던 갈라디아 교인들은 “거짓 형제들”에 미혹되어 빠르게 “다른 복음”을 따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이 긴박한 위기 상황에 놓인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인사말도 제쳐두고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사도의 정당성을 시작으로 하여 편지의 서두 부분을 (갈라디아 교인 and 다른 사람들 포함?) 딱! 읽었을 때, “아~ 바울이 이 편지를 왜 썼는지, 그리고 어떤 내용을 썼을지 직감” 할 수 있도록 편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선,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1절)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가 사도가 된 것이 사람에 의해서 뽑힌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의해 사도가 되었기에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에 대해 먼저 언급한 이유는 만일 사도성에 대한 신뢰가 깨어지면, 그가 전한 복음도 무의미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도직에 대한 근원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예, 말의 진실성에 대한 짧은 비유를 들 것).
그리고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의심은 사도행전 1장 21-22절에서 초대교회가 예수님의 제자 중 유다를 대신할 사람을 선택하기 위해 모였을 때, 사도로서의 자격을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참여하고 그분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행1:21-22).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도 아니요,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과 함께 지상 사역에도 함께 참여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도성에 대한 의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사도직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함으로서 사도직에 대한 정당성을 더욱 견고히 주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라는 진술을 통해 사도행전 9장 3절에서부터 6절에 기록된 말씀대로,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며”(행9:3),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9:4)라고 자신을 부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가 예수님과 대화하였던 그 순간이 곧, 곧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로서의 자격을 논할 때에도 전혀 문제가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대면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방의 사도로 부르셨다는 확신도 얻게 되었습니다.
(본문적용1.)
바울은 사도로서 소명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이었기 때문에 의혹을 제기하는 방해에도 흔들리지 않은 이유는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소명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받은 소명에 대한 나의 자세는 어떻해야 하는가? 그리고 바울의 사도적 소명이 복음증거를 위한 사명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가 각자 받은 소명이 복음증거와 무관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어떻게 ‘하나 된 형제들’로 살아갈 수 있는가?(부제:지속적인 ‘은혜와 평강’)(2-3절)
<본문 해석>
사도바울은 이방의 사도로서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복음」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이 복음을 전하고 떠난 뒤, 그들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전하는 다른 복음을 따라 ‘할례’와 ‘모세의 율법’에 순종하는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갈4:13-20절에서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의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에 대한 내용을 적을 것, 그랬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의 이방인들을 향해 “어떻게 그럴 수 가 있지?”라는 안타까움과 또 한편으로는 화가 불같이 타올랐지만, 바울은 다시 아주 절제된 감정으로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라고 쓰며, ‘할례와 율법’을 따라 종의 신분(갈5:1)으로 달려가는 그들을 향해,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형제들”은 남자 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호칭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가족으로 성별에 관계없이 형제∙자매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이라 부르는 것은, 모두가 구분 없이 완전한 교제 즉, 율법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함과 자유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형제들”이라고 부른 것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된 것을 의미하고, 유대그리스도인들이 ‘할례와 율법’준수로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을 유대인화 하면서, 유대인과 헬라인을 구분하는 벽을 허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할례와 율법”을 지키면 “유대인화”되어 가는, 겉으로는 하나 되어 가는 듯하지만, 따를수록 서로를 구분 짓는 “다른 복음”을 따르지 말고, 은혜로 하나 되게 하는 복음의 진리를 버리지 말 것을 갈라디아 교회의 사람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적용1.-> “형제들(교회 안에서 하나되는)”의 삶)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즉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구원의 은혜로 하나가 된 “형제들”이 그가 전했던 ‘복음의 진리’에 신실하게 남아 ‘믿음으로 행하는 삶’을 ‘평강’(εἰρήνη, שָׁלוֹ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평강’은 “건강하고, 가족 안에 문제가 없고, 재정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불안, 염려, 슬픔, 어려움 같은 심리적으로 스트레스가 없는,” 걱정거리가 없고 마음이 편안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이 부분에 대한 성경적 해석이 더 필요할 것 같다)
(본문적용2.-> 믿음으로 행하는 평강의 삶의 예시는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우리가 항상 깨어 있어야 할 것은 우리는 갈라디아 교회의 사람들이 “구원의 은혜”에서 속히 다른 복음을 따르는 모습을 통해서 언제든지 우리도 믿음의 유혹 앞에서 흔들릴 수 있는 위기에 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볼 때, 우리도 동일하게 믿음이 흔들리고 약해지고, 믿음을 잃을 수 있는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본문적용3.->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가 언제일까? 믿음이 위기에 처할 때를 생각해보자. 예: 구원의 상실과도 연결되는 것인가?). 그럴 때 우리에게 바울은 3절에서 아주 간결하게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결국, 사도 바울은 1장 3절과 6장 16절을 처음과 끝 인사로 두면서, 갈라디아 서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어떻게 ‘하나님의 이스라엘’ or 구원의 은혜로 하나 된 ”형제들“로 계속 해서 남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명료하게 답할 수 있습니다.
1장 3절을 다시한번 읽겠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구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앞서 사도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의심할 때, 사도성에 대한 근거와 권위에 대해서 “...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1절)이라고 말하면서 어떤 방해에도 그의 사도성이 흔들림이 없었던 것처럼, “은혜와 평강”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환경 때문에 사라지지 않습니다(or 사라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위기가 닥쳤을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와 평강”이 “형제들”이라 불리는 우리 모두를 복음의 진리 안에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본문적용4.-> 복음의 진리에 신실하게 남아 믿음을 지키며 하나 된 공동체(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 때문이다. 예화를 들어볼 것.)
3. “평강”의 완성을 위해(부제1: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 (부제2: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악한 세상에서의 구원)(4-5절).
바울은 지금까지 인사말을 통해 자신의 사도성과 복음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형제들이 믿음의 위기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으로 복음의 진리에 신실하게 남아야 할 것을 갈라디아 교회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4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악한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다고 말하며, 이 서신의 핵심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이 내용은 히브리서 10장 10절 말씀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리고 요한일서 4:10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심이 죄인인 우리를 향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설명합니다.
요한일서 4:10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 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기 까지 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은혜’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은혜’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즉,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4절 말씀을 다시한번 자세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의 은혜를 이루셨습니다. 이는 당시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나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여기서 4절의 “이 악한세대”는 6장 14절의 “세상”과 연결됩니다. 이 두 개념은 6장 15절에서 언급된 “새로운 피조물” 또는 “새로운 창조”와 완전히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이 악한 세대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도 “세상” 밖이 아니라 여전히 “지금의 악한 세대” 속에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과 “악한 세대”가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해서 딱 구분될 수만은 없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도 당시의 “할례와 율법”이라는 전통과 규범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갔습니다. (이 할례와 율법을 따라갈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자(할례와 율법은 그 시대의 문화와 종교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였기에, 성도들은 이를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선택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포커스는 할례와 율법이 타당성이 있듯이 믿음에 영향을 끼치는 세상의 타당한 이유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다양한 가치관과 문화적 요구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본문적용1.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지 한번 적용해볼 것. 그리스도인의 삶에 영향을 주는 세상은 무엇이 있는가? 이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타당한 이유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이를 돌아보며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자.)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종의 멍에’에서 건져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조건 없는 희생적 사랑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우리가 복음의 진리에 신실하게 남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는 연습이 필요합니다.(본문적용2->.복음의 진리에 신실하게 남는 것이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예를 들어 조금 더 설명.) 이는 단순히 이론적인 믿음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 속에서 십자가를 의지하고, 세상이 주는 영향을 이기며, 믿음으로 평강의 삶을 살아가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결단에 대한 응답과 헌신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마지막 5절의 송영입니다.
사도 바울은 5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송영으로 인사말을 마무리합니다. 이 송영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복음이 왜곡되고, 갈라디아 교회의 신앙이 흔들렸던 상황에 대한 바울의 깊은 근심과 염려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사도성에 근거한 복음의 정당성과 하나님의 뜻에 의한 구속사역을 확신하며, 성도들이 다시 믿음 안에서 바로 서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특히, 갈라디아서가 예배 때 읽혀지도록 쓰인 회람 서신이라는 점에서, 5절의 송영으로 인사말을 마무리 할 때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아멘’으로 화답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단순한 응답을 넘어, 은혜의 복음으로 돌아와 평강의 삶을 살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으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바울의 간절한 마음을 반영합니다.
(본문적용1. 송영 -> 하나님께 영광, 바울의 마음은 곧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일치 하지 않을까?: 해당되는 성경구절이 없을까?
1. 흔들리는 믿음 속에서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요16:33; 롬8:38-39; 시94:18-19)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구원을 붙들고 계심을 깨닫게 합니다.
2. 송영이 예배 때 불려진 것이므로, 우리의 예배가 믿음이 회복되는 영혼들의 찬양이 올려지는 자리(히브리서 13:1)
예배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회복과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자리.
3 일상의 삶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으로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삶으로 영광올려드리는 송영(마5:16)
우리의 삶이 송영의 연장이며, 일상에서 복음을 드러내는 태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임을 강조.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라디아서 1:1-5절 말씀을 통해 우리가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은 바울의 사도적 소명과 그가 전한 복음의 정당성,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삶에 주는 놀라운 의미입니다.
바울은 흔들리는 갈라디아 교회의 믿음을 회복시키기 위해 자신의 사도직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뜻에 근거해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이는 단지 그의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가 그들의 삶 속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단순히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복음 안에서 하나 되는 삶,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갈라디아 교회에 촉구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세상의 가치관과 유혹 속에서 흔들릴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시 붙들어야 합니다. 바울이 강조했던 것처럼,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기에, 환경이나 방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찬양은 단순한 형식적 행위가 아니라, 은혜를 체험하고 평강 가운데 회복되는 자리입니다. 또한, 예배를 넘어 일상 속에서도 우리의 삶이 송영의 연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마음은 곧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고, 이 악한 세대 속에서 구원의 은혜를 이루신 이유는 우리가 그 은혜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삶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와 평강이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이 은혜와 평강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에 신실하게 남아 믿음을 지키고, 하나 된 공동체로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찬양이, 그리고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송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 모두가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은혜와 평강 안에서 흔들림 없는 믿음과 복음의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