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갈 길을 마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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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달려갈 길을 마칠 때
본문: 사도행전 13:24-25
찬송: 459장
제목: 달려갈 길을 마칠 때
본문: 사도행전 13:24-25
찬송: 459장
<말씀의 문을 열며>
<말씀의 문을 열며>
오늘도 우리는 인생이라는 광야를 지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 광야가 너무 길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또 누군가는 이 메마른 광야에서 목마름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걷는 이 길이 광야처럼 느껴지더라도 실망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당신의 사람을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례 요한 역시 광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메마른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전했습니다. 그의 옷은 낙타 털이었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둘렀으며,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운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 앞에 선 사람>
<예수님의 얼굴 앞에 선 사람>
먼저 오늘 본문 24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본문에서 ‘그가 오시기에 앞서’에서 ‘앞서’라는 표현은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프로소폰’(πρόσωπον)이란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얼굴’ 또는 ‘면전’을 뜻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앞에 ‘오시기에’라는 표현에는 ‘에이소도스’(εἴσοδος), 곧 ‘들어오심’이란 단어가 함께 쓰였습니다. 그래서 이 표현의 정확한 의미는 “그분이 들어오시는 얼굴 앞에서”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얼굴 앞에 서 있었다는 것은 시간적 순서와 공간적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삶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마치 중요한 부분이 들어오기시 전에 그분의 길을 예비하신 것처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얼굴 앞에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표정과 눈빛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활 점이 있습니다. 백성들에게는 예수님의 얼굴이 아닌 요한의 얼굴이 먼저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전할 때, 사람들은 우리의 얼굴을 먼저 보게 됩니다. 우리의 표정을,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얼굴이 예수님의 얼굴을 가리지 않도록 늘 조심했습니다. 광야에서의 단순한 삶을 선택한 것도, 겸손한 모습으로 일관한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통해 예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우리도 예수님의 얼굴 앞에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얼굴을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됩니다. 혹시 우리의 걱정과 불안이 예수님의 평안을 가리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의 자랑과 교만이 예수님의 겸손을 가리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전하는 거울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논과 밭에서 일할 때에도, 우리가 일하는 사업장 안에서도, 우리의 가정과 마을에서도 항상 우리의 얼굴을 통해 예수님의 얼굴이 전해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날마다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주님, 제 얼굴이 주님의 얼굴을 가리지 않게 하옵소서. 제 모습을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소서.”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의 얼굴 앞에서 살아갈 때, 우리의 일상은 거룩한 예배가 되고, 우리의 삶은 복음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달려갈 길>
<인생이라는 달려갈 길>
본문 25절을 보면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달려갈 길’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드로모스’(δρόμος)는 단순한 길이 아니라 ‘인생의 여정’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경주를 달리는 동안 어떤 모습으로 달려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드로모스’가 끝나갈 때, 곧 자신의 인생이 마무리되어 갈 때 그는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나 예수님을 드러내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요한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리스도를 증겅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생이란 자기 여정을 하나님이 주신 자기 삶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대신 채워줄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으로 채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철저하게 자기 책임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이 여정을 달리면서 두 가지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하나는 남의 길을 자꾸 돌아보는 것입니다. 마치 달리기 선수가 옆 사람을 계속 의식하다가 페이스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길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그리스도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길을 달리되 그 길에서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이것이 그의 고백이었습니다. 자신의 길을 달리면서도 끝까지 겸손하게 그리스도를 높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드로모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달려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길을 어떻게 다려가면 좋을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처럼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달려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나의 연약함을 바라보지 말고, 나의 부족함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달려가는 것, 성령의 능력으로 그 길을 뛰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거룩한 초대입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속도로,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라는 부르심입니다. 그 목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교회는 올해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 믿음 충만, 말씀 충만을 이루어 부흥을 경험하는 교회가 되고자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달려갈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교회에 성령의 능력이 임하고, 믿음이 자라나며, 말씀이 살아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끝까지 채워간 겸손>
<끝까지 채워간 겸손>
다시 본문 25절을 보겠습니다.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여기서 ‘마치다’로 번역된 헬러아 ‘플레로오’(πληρόω)는 ‘가득 채우다’라는 뜻입니다. 마치 빈 그릇에 물을 가득 채우는 것처럼, 세례 요한은 자신의 인생이라는 그릇을 무엇인가로 가득 채웠다는 의미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인생을 무엇으로 채웠는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는 자신의 인생을 자기 자랑이나 세상적 성공으로 채우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로 채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의 이같은 고백은 단순히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사실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나는 아니다”라고 말할 때, 헬라어로는 굳이 ‘나는’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되는데, 일부러 ‘나는’이라는 말을 넣어 강조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평소에 “못합니다”라고 하다가, 정말 강조하고 싶을 때 “저는 정말 못합니다”라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렇게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겸손하게, 그러나 아주 분명하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 번 했다 말아버린 고백이 아니라 그의 평생에 걸쳐 이렇게 고백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요한의 이런 태도는 당시 사람들의 기대와는 정반대였습니다. 누가복음 3:15 을 보면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충분히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자신을 전혀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것으로 우리의 인생을 채우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걱정으로, 욕심으로, 불안으로 인생을 채우며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채워진 인생은 결국 공허함으로 끝나고 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인생은 무언가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처럼 그리스도로 채워진 인생만이 영원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오늘까지도 ‘복음의 첫 증인’로 기억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인생을 그리스도로 채웠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영적 부흥을 사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이, 우리 공동체가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질 때 진정한 부흥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그리스도로 채워진 그릇에 부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부흥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말씀의 문을 닫으며>
<말씀의 문을 닫으며>
오늘 우리는 세례 요한의 삶을 통해 세 가지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얼굴 앞에서 살아간 사람, 자신의 달려갈 길을 그리스도로 채워간 사람, 그리고 끝까지 겸손으로 일관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얼굴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가리지 않게 하며,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가는 삶을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 이것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의 얼굴을 드러내며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진 인생을 사는 우리 중앙교회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저희에게 귀한 말씀을 통해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저희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때로는 저희의 얼굴이 주님의 얼굴을 가리고, 저희의 생각이 주님의 뜻을 가리며, 저희의 욕심이 주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이제는 저희의 얼굴을 통해 주님의 얼굴이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주님의 향기를 전하는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례 요한처럼 저희도 주님의 얼굴 앞에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남은 인생이 주님으로 가득 채워지게 하시고, 저희의 생각과 마음이 주님의 마음으로 채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오직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우리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게 하실 때, 그 부흥이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에서 시작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교회가 되게 하시고, 예수님의 얼굴을 전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