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색 옷을 입은 자
Notes
Transcript
요셉이 청소년 시절에 이삭은 살고 있었다. 요셉이 17세에 애굽으로 팔려갈 때 이삭은 12년이나 더 살았다.
야곱도 14년 종살이 했고, 요셉도 14년 종살이 했다.
그리고 성경에 대칭되는 구조가 많다. 왜 이렇게 숫자를 일치시키고 대칭시키냐면,
1) 기억하기 좋으니까
2) 하나의 주제로 연결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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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1-16세까지 시절도 묵상해볼 필요가 있다. 외할아버지로부터 도망쳐 벧엘에 도착했을 때가 13살이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2절.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톨레 도트… 이것이 앞 단락과 뒷 단락을 비교하며 읽게 만드는 것이다.
형들은 요셉을 원래 싫어했는데, 그가 말한 꿈 때문에 더 싫어했다. 그 꿈이 요셉에겐 괴로움으로 적용됐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는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꿈이었다.
그리고 야곱의 잘못된 자녀 교육이 있었다. 마틴 루터도 그렇게 말한다. 지나치게 편애했다.
야곱의 장남 르우벤이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와 동참을 하고, 야곱이 알게 되었다.
채색옷은 번역이 잘못 되었다. 캐태노토파심인데, 캐태노트는 웃옷, 파심은 손목이나 발목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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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는 꿈이 참 자주 나온다.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중요한 통로였다.
그런데 요셉의 꿈은 직접 말씀하지 않는 꿈은 요셉의 꿈이 최초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꿈과 환상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요셉에겐 상황을 보여주고 계신다. 이것을 섭리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에겐 묵상이 필요하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가 말씀을 붙들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다.
다시 꿈으로 돌아와서,
고대 시대에선 꿈이 신의 계시라고 믿었다. 매우 중요했다.
그런데 요셉의 꿈은 다르다.
2개의 꿈을 보여주셨다.
꿈이 서론에 나오는 것은, 요셉의 인생에 닥쳐오는 모든 고난이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지배하고 계시고 모든 상황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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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명의 형들이 한명의 동생을 죽이려고 공모했다. 너무 잔인하다.
가인은 혼자 생각하고 혼자 행동으로 옮겨 죽였는데, 요셉의 형들은 함께 공모했다.
이들은 왜 이렇게 된 걸까?
쓴 뿌리 때문이다.
처음부터 죽이자는 생각을 한 건 아니다. 시기심으로부터 시작했고 미움으로 넘어가고, 살해 음모로 넘어간 것이다.
11절에서 그의 형들은 시기했다고 하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했다 한다.
시기 받는 대상의 우월성, 시기하는 대상의 분노가 있다.
평등해지면 튀려고 한다.
그리고 평등은 아래계층 사람들이 외친다. 동일선상이 되면 만족한다고 착각하지만 그 때 자신이 튀어보이고 싶어한다. 인간 본성이 그렇다. 남들보다 우월해지려고 한다.
동물농장에서 돼지(나폴레옹)가 이렇게 말한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평등 가운데서도 자신이 더 특별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조지 오웰은 이기심이 인간 본성의 지향점이라고 한다.
성경(야고보서)에선 시기가 뼈를 썩게 한다고 기록됐다.
요셉의 형들도 할 말이 있다고 주장한다. 늘 차별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 레아가 차별 받았으니까, 자기들도 차별 받았다고 한다. 정말 불쌍하긴 하다.
이 사건의 배후에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들이 요셉을 향해 분노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상황을 만드신 것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다.
형들이 묶은 단이 요셉이 묶은 단을 둘러싸고 절을 한다. 해석이 필요한가? 해석 필요 없다. 딱 봐도 안다.
두번째 꿈도 마찬가지다.
해와 달,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한다고 말한다. 이것도 딱 봐도 해석이 가능하다.
야곱도 야단친다.
나와 어머니와 형들이 너에게 절한다는 거 아니냐 한다.
요셉이 철딱서니가 없는 것일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어리든지, 철이 없든지,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는 것보다 더 미워하는 게 생겼다는 것이다.
8절 보면,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미워한다는 히브리어는 부정사다.
주어가 정해져있지 않았다. 그런데 꿈이라는 단어 앞에 목적어를 나타내는 기호가 있다.
히브리어는 동사의 주어와 목적어를 분명히 알기 어렵다 원래.
번역을 하는 가운데, 이 동사의 주어가 뭔지, 목적어가 뭔지 고민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 본문은 특별히 부정사가 나왔다.
부정사가 나왔는데, 무엇을 미워하느냐?
이 무엇을 을 알려주기 위해 앞에 기호를 붙인다.
목적어를 분명히 알려주려고 기호를 갖다붙였다. 히브리어의 문법이다. 그 단어가 뭐냐? 꿈이다.
꿈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걸 안다. 이 꿈을 섭리로 주신 하나님이 미운 것이다. 안그래도 비참한데, 쐐기를 박으니까 너무 미운거다. 하나님의 뜻이 미운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경우가 없는가? 내가 신학 배운다고 들인 돈이 얼만가? 투자한 시간이 얼만가? 이걸 돈 버는데에 쏟았다면, 훨씬 편안하게 살고 있을텐데… 날 이끄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미울 때가 많다. 그리고 날 정금같이 만드시려고 고난을 주시는 거 보면, 하나님이 미울 때가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