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11: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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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성찬을 따라 기념하라
바른 성찬을 따라 기념하라
성찬하면 떠 오르는 것이 포도주를 마신다 그것도 교회에서! 이런 사고는 금주를 했던 교회가 공식적으로 술을 마시는 행위를 떠 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성찬은 주님께서 직접 정하시고 기념하라고 하셨다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의 기억을 다시 소환해 보겠습니다. 12장에 유월전 엿새 전에 베다니라는 곳에 이르렀고 이어 마리아가 비싼 향유 나드 한근을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은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사람들은 예수를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며 맞이 하게 됩니다. 그렇게 입성하신 예수님은 13장에서 제자들과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본을 보이신 것이죠.
그리고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는 예수를 배반할 가룟 유다도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이런 사실에 매우 괴로워 하셨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 뿐만 아니라 배신 고지를 받은 베드로도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본문에는 성찬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가 드러나지 않는데 왜 요한복음을 말씀드리는가? 먼저 다른 복음서를 살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6:25–30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그리고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하는 순으로 기록했습니다.
마가도 가룟 유다의 배신 사건에 이어서 마가복음 14:22 “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라고 시작을 하고 이어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겠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도 가룟 유다의 이야기를 먼저 한 후에 유월절 준비를 다루면서 마지막 만찬을 이야기 합니다. 그때 누가복음 22:17 “17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고 하신 다음에 누가복음 22:19 “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에서 누가는 ‘너희끼리 나누라’ 그리고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먼저, ‘기념’하라는 의미는 매우 중요한데 성경은 ‘기념하라’는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구원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을 한 백성에게 ‘이 날을 기념하여’라고 한 것이 ‘유월절’의 기원입니다. 또한 여호수아에서 등장하는 요단강을 건널 때 돌을 취하여 강바닥에 쌓아 둔 것도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반대로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을 위해 기념비를 세웁니다. 예를 들어 비석을 세운다든지 동상을 세우는 경우입니다. 기념해야할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기념하는 것이 우상 숭배입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48:1 “1 야곱의 집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허리에서 나왔으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념하면서도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도다” 이 경고의 말씀은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25년에 살펴보는 선지자들이 활동했던 시기인데요.
이런 경고는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변 대형 교회와 많은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장면은 기독교의 부흥을 드러내는 지표처럼 사용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 건축물의 화려함으로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이나 그곳에 드나드는 수많은 차량들은 우리 시대가 소위 ‘성공’처럼 보였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부흥’과 ‘성공’이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내용이 성찬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요 본래의 의도가 사라지면 남는 것은 형식이고 형식이 중요해지면 첫 번째 ‘진실이 없’는 형식이 됩니다. 그리고 진실하다는 의미는 ‘공의’와 직접적인 연결을 갖는데 진실한 것은 늘 거짓을 고발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공의가 없는’ 즉 올바름이 없는 형식으로 대체되는 것입니다. 이 둘은 한 그릇에 담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공의는 거짓을 버려야 하며, 말씀으로 판결을 받아 좇아 내는 탄핵되어야 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본문에서 마리아가 쏟은 향유는 거짓된 가룟 유다의 마음에 불을 질럿습니다. 일어난 불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반드시 무엇인가를 다 태우고 나서야 끝을 보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왜 내 마음에 이런 생각을 했지’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은 ‘그는 도둑이라’ 즉 진실을 향하려는 간절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의 자리는 그에게 ‘배신을 확정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절에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는 고린도 교회에 잘못된 성찬을 꾸짖는 편지를 보낸 바울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앞서 기념에 대한 용례를 구약에서 살폈다면 오늘 본문이 신약에서 성찬에 대한 잘못된 태도가 등장하는 고린도 교회입니다. 이런 잘못된 성찬은 오히려 17절에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롭다’는 바울의 말은 이사야의 경고에 대한 현대적 표현인 것이죠. 이런 일로 18절에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분쟁은 이어서 파당을 만들고 20절에 ‘그런 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라고 단언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찬의 변질은 예수께서 행하시고 말씀하셨던 떼어 주시는 것, 함께 마시는 것 말씀에 담긴 진실/진리은 사라졌고 그저 먹는 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렇게 변질되자 하나님의 옳으심인 공의,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메시아이심에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의 임금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먹을 것으로 변질된 것은 21절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었다’ 왜냐하면 ‘배고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일상에서 ‘먹는 습관’이 성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마치 서두에 말씀드린 ‘교회에서 술을 먹는 것’이라는 일상의 표현을 그대로 쓰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태도는 결국 준비하고 참여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구별되지 않는 행동은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긴 결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에 ‘나를 업신 여겼다’, ‘우습게 여긴다’는 표현을 언제 합니까?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는 말과 행동을 할 때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은 편하게 대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죠. 특히 부모가 자녀를 대할 때 자신의 소유물처럼 대하는 것이나 자녀가 부모를 대할 때도 예의없는 무례함이 좋은 예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우리가 올바른 성찬을 하려면 먼저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떠나실 것을 앞두고 제자들을 ‘사랑했다. 끝까지 사랑했다’는 사랑의 애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모인 식사의 자리는 가룟 유다의 배신을 확증하는 자리, 베드로의 배신을 경고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떡을 떼어’ 주시는 먹음으로 유지되는 생명의 연장처럼 예수를 먹음으로 받게 되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생명만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먹는 식구가 되는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자녀 삼음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영적으로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그래서 아버지와 우리가 하나로 연결되는 놀라운 영적인 하나됨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4 출/에는 이런 과정을 아주 정밀하게 묘사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계약으로 맺는 장면입니다. 먼저 제사를 드린 후 이어 출애굽기 24:7 “7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라고 서로가 내용을 확인하고 맹세합니다. 이런 낭독에 앞서하는 의식이 있는데 출애굽기 24:6 “6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그리고 7절 후에 8절에도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요? 예수께서도 다시 잔을 향하여 ‘내 피다’ 왜 인지 아시겠죠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한 모금의 포도주이든 포도즙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우리와 새롭게 언약을 맺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념하는 것은 다시 언약을 들춰보며 재차 확인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계약은 서로 확인하고 도장을 찍고 줄건 주고 받을 건 받으면 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십니다. 출애굽기 24:11 “11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예수님께서는 배반의 결정을 하고 떠난 가룟 유다가 없는 자리에서 요한복음 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바울은 알았습니다. 시내산의 경계를 넘어서면 죽음 밖에 없습니다. 출애굽기 19:21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24:11절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본문에 27절에 ‘합당하지 않게 먹고’ 다시 말해서 이사야의 경고처럼 성찬에는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공의가 드러나야하기 때문에 이것을 모르고 먹는 것으로 변질 시킨 자들이 참석하는 것은 그러하신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공의에 도전하는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29절에 ‘죄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찬의 먹는 행위를 ‘먹는 것’이라는 매우 평범한 일상적인 행동으로 변질 시켰습니다. 요즘 말로 뭐 그것 때문에 이렇게까지 될 일이냐 할지도 모릅니다. 배고프면 먼저 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과 행동 그리고 늦게 온 자들은 남은 것을 먹을 수밖에 없는 일상의 구조적인 문제가 결국은 교회가 올바르게 지켜야 할 ‘기념’되어야 할 의식과 그 안에 담겨 있어야 하는 ‘새 언약’을 기억하지 못하는 주객이 전도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은 성찬에 대한 ‘기념’의 의미를 고린도 교회가 성찬에 대한 잘못된 이해과정에서 살피며 예수께서 시행하셨던 복음서의 기록을 잠시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 성찬을 시행하기에 앞서 단순히 먹고 마시는 행위가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의 예배 역시 하나님의 진실하심은 사라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성찬이 종교적인 의식 하나를 추가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소요리문답 97문에 주의 성찬에 합당하게 참예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주의 성찬에 합당하게 참여하려면 반드시 주님의 몸을 분별할 줄 아는 것과 주님으로써 양식을 삼는 믿음과 회개와 사랑과 복종할 새로운 각오에 대하여 스스로 살필 것이니 합당하지 않게 참예하면 두렵건대 먹고 마시는 것이 정죄함을 자청함이 될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우리가 따라는 칼빈은 성찬을 상징으로써 보면서 함께 영적으로 임재하는 실제 효과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자에게 성령으로 주어지며 그리스도의 몸은 이 효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마시는 것은 신앙에 의한 영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세례를 받지 못한 자가 참여할 수 없는 것이며 비그리스도인이 참여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참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교회가 ‘바르게 성찬을 시행’하기 위해 가장 먼저 제정하신 예수님의 복음서를 따라 변질된 고린도 교회의 모습을 반추해보면서 참여하는 우리도 ‘바로 알고’ 참여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