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혜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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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혜미야

느헤미야 2장 1-20절
사람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큰일을 계획하기도 하고 또 계획 없이 큰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느헤미야는 큰일을 시도합니다.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큰일을 시도합니다. 그는 지금, 포로의 몸으로 멀리 메데 바사에 끌려왔으나 다행스럽게도 출세를 하여 높은 지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향에 돌아가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한다는 것은 아직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큰일을 시도하기로 결정합니다.
느헤미야는 이 큰일을 시도하기에 앞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성벽 재건의 대역사는 느헤미야 한 사람의 기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약한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큰일은 기도로부터 출발합니다.
느헤미야는 기도를 드리고 난 다음에 무슨 일을 했습니까? 준비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은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을 위해 어떻게 준비하는 인생을 살았는가 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가 헌신하자마다 그를 쓰신 것이 아니라 먼저 그를 준비시키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만큼만 그분의 자녀들을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하나님께 쓰임받기 전에 광야에서 40년 동안의 준비 기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다윗도 왕이 되기 전에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 광야에서 왕이 될 때를 준비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곧장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 동안의 준비 기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준비되기 이전에 쓰임 받는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저 자리에 있기에는 좀 모자란 사람이야. 저 자리는 저 사람에게는 분에 넘쳐” 하는 소리를 듣기보다는, “저 사람은 저 자리에 앉아 있기에는 진짜 아까운 사람이야” 하는 소리를 듣는 게 훨씬 더 좋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환경 탓하지 않고, 주변 상황 탓하지 아니하고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준비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쓰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준비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느 2:1).
느헤미야가 행동을 시작한 때는 아닥사스다 왕 이십 년 니산월이었습니다. 니산월은 우리 나라로 치면 3, 4월에 해당하는데 이스라엘력으로는 정월입니다. 그러면 느헤미야가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 성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언제입니까? 1장 1절에 보면 기슬르월이라고 했습니다. 즉 9월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비보를 들은 지 4개월이 지났을 때 느헤미야가 행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4개월 동안 무엇을 했을까요? 그저 앉아 있기만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용의주도하게 여러 가지를 준비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기도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왕에게 예루살렘에 가겠다는 허락을 받을 수 있을까, 왕이 만약 허락한다면 내가 왕에게 더 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성벽 재건에 필요한 물품들과 자재들은 무엇인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려고 하면 주변에 방해 세력들이 많을 텐데 그 세력들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느헤미야는 이 모든 문제에 대해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때가 이르자 왕의 앞에 나아가 일을 시도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느헤미야가 준비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기도로서 왕의 마음을 움직이기를 원했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1장 11절을 보면 느헤미야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느 1:11)
느헤미야는 그의 신분으로 보아 얼마든지 그냥 왕에게 나아가 이야기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왕을 움직여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모든 인간사는 사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 성공의 여부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심리학이나 경영학 같은 것으로 인간 관리의 지혜와 기술을 터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모든 세상적인 방법보다 훨씬 탁월한 인간경영의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방법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로써 내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왕 앞에 섰을 때 수색을 띠었다고 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왕 앞에서 수색을 띠는 것은 죽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고대 왕실에서는 왕 앞에서 슬픈 기색을 보이는 것은 절대로 금기시되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를 보면 시종이 왕에 대하여 굳은 표정을 지었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절대 군주 아닥사스다 왕 앞에서 느헤미야가 슬픈 표정을 지은 것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중죄에 해당했습니다.
또한 느헤미야는 왕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자이므로 이러한 규례를 매우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1절 끝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라는 이 말은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왕 앞에서 절대로 슬픈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느 2:2).
느헤미야는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두려워한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페르시아의 왕국 법도에 의하면 왕의 최측근에서 수종드는 사람은 왕의 심기를 살피며 왕을 즐겁게 해야 할 책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가 얼굴에 수심을 보여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으니 중벌에 처해진다 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는 왕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파리 목숨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왕비가 왕 앞에 나아갈 경우, 그 왕비는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왕비도 쉽게 폐위시키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나라에서 비천한 신하 하나 죽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나라에서 신하가 감히 왕 앞에서 수심을 띠었으니 어찌 느헤미야가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4절을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느 2:4).
너무도 쉽게 왕이 느헤미야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은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준비한 결과 길이 열린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이 이렇게 큽니다. 4개월 전만 해도 도저히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던 일이 눈앞에서 이뤄졌습니다. 더욱이 느헤미야의 마음에 성벽 재건이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과거 2차 귀한 때,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재건하려는 일을 중단시킨 장본인이 바로 이 아닥사스다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고국의 현실 앞에서 슬퍼하는 느헤미야에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호의적으로 묻고 있습니다. 이렇게 왕의 마음이 변화될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느헤미야의 기도에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는 대단히 큰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도로써 전혀 불가능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예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남자가 아닌 가냘픈 여자입니다. 곧 에스더입니다. 하만의 간계로 유대인이 전부 멸절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에스더는 왕비로서 왕에게 나아갑니다. 당시 문화로는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왕에게 나아가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그것은 왕비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도 에스더는 왕이 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나아갑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왕이 오히려 에스더에게 홀을 내밀며 그를 가까이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스 5:3).
그리고 왕은 에스더의 이야기를 듣고 하만을 처형하고 유다 백성을 살렸으며 모르드개를 하만의 자리에 앉힌 놀라운 사건이 에스더서에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역시 기도입니다. 에스더가 삼일 간 금식기도하고 왕에게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잠언 21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저수지의 수문을 열면 물이 나가고 수문을 닫으면 나가던 물이 멈추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일수록, 사람들을 다스리는 사람일수록, 기도로 사람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리더는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기도이므로 결국은 기도가 세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하자 느헤미야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촐랑대면서 요구 사항들을 이것저것 정신없이 나열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대답하기에 앞서 먼저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했습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더라도 기도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기도가 응답되었다 해서 “야호, 신난다” 할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묵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이렇게 기도의 응답을 주셨군요”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느헤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느 2:5).
느헤미야가 이렇게 소원을 말하자 그 말에 왕이 또 묻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왕후도 왕 곁에 앉아 있었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좋게 여기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느 2:6).
왕이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하고 물을 때 느헤미야는 묻는 말에 그 기한을 즉각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느헤미야가 4개월 동안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용의주도하게 모든 일을 준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대답만 한 것이 아니라 왕에게 요청까지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거든 강 서쪽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이 나를 용납하여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게 하시고”(느 2:7).
아무도 자신의 출입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도와달라는 말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느 2:8).
필요한 모든 물품을 대달라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머리를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부흥되기를 원하고 많은 영혼을 살리고 싶다면, 기도와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부분들에 대해서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드디어 왕의 허락을 받은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그곳에 머문 지 삼일 만에 현장 답사를 합니다. 현장 답사를 통해 예루살렘 성이 어느 정도나 훼파되었는지를 살피고 성 주변의 중요한 지점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일을 밀고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해야 할 일을 용의주도하게 계획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답사하고 돌아온 뒤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느 2:17).
느헤미야는 독불장군이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저변을 확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성전재건의 정신을 모든 사람들에게 확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 재건에 동참할 것을 권하면서 그간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도우셨는지를 고백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느 2:18).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의 역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으며 그러한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백성들에게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인지시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시작하려고 하는 성벽 재건의 역사가 단순히 인간적인 계획이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도우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사역임을 그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손’이라는 생생한 표현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이 이 일에 함께하심을 백성들로 확신케 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소망의 말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신 일과 왕이 어떻게 도와주었는가 하는 일들을 소망 적으로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백성들이 모두 힘을 내어 일어섰습니다. 느헤미야의 가슴 속에 있던 작은 소망이 이제는 모든 이들의 소망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이것이 지도자가 가져야할 자세입니다. 지도자가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될 가장 중요한 자질은 믿음이요 소망입니다. 지도자는 모름지기 꿈이 있어야 합니다.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지도자는 무너진 성벽들을 바라보면서 “가망이 없군” 이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지도자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외칠 때 일은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부흥이나 교회의 부흥이나 가정의 부흥이 모두 가능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담대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은혜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느 2:10).
이번에는 19절을 보십시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느 2:19).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기도하고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해도 좋다고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순탄하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어려움이 닥칩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성도들이 헌신할 때 악한세력은 근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를 저지하고자 성도들을 대적하게 마련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두려워한 사탄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방해하였던 것과 같습니다(헤롯왕 두 살 이하 아이 살해).
오늘날 우리 역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산시키는 사명을 감당하려고 할 때 악한 사탄의 세력이 심히 근심하며 우리를 핍박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받게 될지라도 결코 의아하게 여기지 말고 말씀 위에 서서 주의 일에 더욱 충성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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