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믿음을 고백해요!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54 views
Notes
Transcript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예수님이 나의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된 자는 복이 있다.
예수가 나의 구주이심을 아는 자는 복이있다.
심령이 가난해지고 주리고 울어서 나는 예수가 나의 구주이심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복이 있는자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를 반석이라고 불러주신다.
나를 반석이되라고 꿈을 품으시고 나를 만들어가신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반석같은 자가 아니였다.
그것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두신 꿈이다. 예수님은 그꿈대로 베드로를 반석되게 하신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뿌리를 내렸을때에 베드로는 반석이 되었다.
나를 포기치않고 반석으로 만드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나를 반석이 되게 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걸어가는 가는자가 반석이 되게 하신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순종의 걸음을 오늘도 내일도 걸어가는 자가 반석이 되게 하신다.
나의 반석위에 예수님의 교회를 세워시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내가 교회를 이루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교회를 세우라고 하신다.
나는 비록 부족하지만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계시니
어둠의 권세가 물러간다.
나는 교회이다.
내가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신다.
내가 기도하는 자를 치료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 교회를 세우겠다.
16:6 “너희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누룩을 주의하고 경계하여라.”
이 말의 뜻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가르침을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이미 하신 표적들은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 나름대로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들을 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표적들을 보고 예수님을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자기 나름대로 표적을 구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았습니까? "세례자 요한이라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6:14)
그러나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본 베드로는 말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는 바르게 대답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종류의 구원에 있어서 구원자이십니다. 병, 죄, 모든 얽매임, 속박, 슬픔, 절망, 두려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자이십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모든 일에서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놀라운 카운슬러이십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말씀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장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 하나님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있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당신의 뜻, 의도, 생각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첫째 계명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말씀이 무엇을 말합니까? 네 일상생활 속에서 만나는 모든 일들, 혹 모든 사람들,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모든 일에 계신 하나님을 존중하라는 말이요, 이는 곧 그 모든 곳에 하나님의 선한 의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각 사람의 삶 속에 계십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하나님,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아들이십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게 되었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축복 받았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
살아계신 하나님,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베드로로 하여금 이를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한 사람 베드로 안에서 일하심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받고,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일을 이루고자 하실 때, 제자들에게 강요하거나 압력을 넣거나 하지 않으셨습니다. 조급하거나 초조해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일을 하시고, 가르칠 말씀을 가르치다 보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고 알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또 말씀하십니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 내 교회를 세우겠다. 하데스(죽음의 문)가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 반석“은 베드로가 말한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는 그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위에 예수님 자신의 교회를 세우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란 예수님을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런 모임, 곧 “내 교회”를 세우고자 하십니까? “내 교회”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들이요,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이 말대로 온유하게 살고자 하고, 온유한 사람이 얻는 복을 얻는 사람들입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따라 자신이 화평하고 다른 사람을 화평케 하려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고,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웃과 싸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고 알려진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런 교회를 세우고자 하십니까?
그런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 세상을 살립니다. 또 밝힙니다.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빛을 비춥니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의논하여 세운 사람의 모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것이니, 그 세워지고 무너짐이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데스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
하데스의 권세는 어두운 지하세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이 죽은 후에 가는 곳이라고 말해집니다. 하데스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데스는 하나님을 부정한, 하나님을 부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사람을 주인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의 선악을 인정하지 않고, 사람의 선악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하데스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을 주인으로 하는 세력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아는 것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요, 사람의 선악이 하나님의 선악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하데스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러면 사람을 주인으로 하는 것이 왜 하나님을 주인으로 하는 것을 이기지 못합니까? 사람의 선악이 왜 하나님의 선악을 이기지 못합니까? 왜 사람의 판단, 결정이 하나님의 판단, 결정을 이기지 못합니까?
겉으로 보면, 사람의 선악이 이기는 것 같습니다. 사람을 주인으로 하는 것이 이기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면, 교회도 사람, 사람의 생각이 교회를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선악이 하나님의 선악을 이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람의 생각, 판단이 하나님의 생각, 판단을 이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주인이 될 때 악을 행하게 됩니다. 다윗이 자기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주인이 되었을 때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다가 동침했습니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투 일선에 보내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랬을 때 칼이 다윗 집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주인이 될 때 자칫 폭력을 쓰기 쉽습니다. 폭력을 쓰는 것은 곧 악이 지배하는 것이요, 악이 지배하면 스스로 무너집니다.
사람이 얼마나 잘못 판단할 수 있는지요?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은 북쪽 사람들이 남쪽 예루살렘 성전으로 예배하러 가는 것을 보고서는 말했습니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려고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공포했습니다.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이 금송아지가 너희의 신들이다.” (왕하 12:27-28)
이 판단으로 이스라엘은 대대로 우상 숭배의 나라가 되었고, 결국 나라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이런 잘못된 판단 중에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의 주인으로써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인 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자기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을 정말 다윗이게 하셨습니다.
야곱의 집은 아내들의 사랑싸움, 시기, 질투, 라반의 욕심과 거짓말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모든 일을 통해서 야곱에게 열두 아들을 주셨고, 그 열두 아들은 후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잠시 사람이 이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이 이기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이기지 못합니다. 악이 하나님을 이기지 못합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하데스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우리는 우리 교회의 현재와 앞날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합니다. 사람 때문에 교회가 무너지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그러나 “이 반석”위에 세워져 있다면, 무너지지 않습니다. 무너지지 않는 반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하면, 큰 모임, 건물이 있는 눈에 보이는 교회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예수님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 두세 사람이 모인 곳도 교회입니다. 한 가정이 한 교회입니다. 심지어 내 한 사람이 작은 교회일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각자의 현재와 앞날에 대해서 염려합니다. 가정의 현재와 앞날을 염려합니다. 혹시라도 하데스가 지배하지 않을까, 악, 곧 인간의 폭력성이, 반발과 다툼, 그로 인한 무너짐이 지배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내 삶이 ‘이 반석“ 위에 세워져 있다면 하데스의 권세가 나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내 가정이 ”이 반석“위에 세워져 있다면, 하데스의 권세가 내 가정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반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하데스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21 절입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유대 사회에서 그리스도가 되시려면 장로들, 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의 지지를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사람들에게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사회에서 그리스도가 되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대들며 말했습니다.
“주님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다니요.”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면 그 사람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지지가 없이는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전에 우리도 우리 모임이 일을 잘하려면 교계, 혹은 정계의 높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구나.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베드로는 예수님이 사람에 의해 그리스도가 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되심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되시려면 사람들로부터는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 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그래야 온 세상의 그리스도가 되시고 영원한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니, 곧 사람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되신다고 하니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의 대적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람에게 요구하고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람과 다투고 싸우고, 헤어지고, (가룟 유다도 그래서 예수님을 배반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 뒤, 곧 하나님의 일 뒤로 물러가야 합니다. 2020 년 한 해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많이 생각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일을 많이 생각했습니까? 사람의 일을 많이 생각했다면, 그 생각들이 뒤로 물러가도록 해야 하겠지요? 2021 년 한 해는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려고 하는 자기를 부인합니다. 좋은 목자가 되려면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을 부인합니다. 사람의 지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지를 받아서 목자가 되고자 합니다.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고자 할 때 내 힘으로 좋은 되고자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되고자 합니다.
그러면 내 목숨, 내 삶이 살아납니다. 솔로몬 왕은 백성들의 좋은 왕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여, 제게 듣는 마음을 주십시오. 제게 주의 지혜를 주셔서 주의 선, 악을 분별하게 해 주십시오. 나의 선, 악을 따라 판단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솔로몬은 지혜와 생명이 풍성한 왕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도 이런 대통령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목숨을 바꾸겠습니까? 그렇게 소중한 목숨을 얻는 길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자기 선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악을 따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생명을 얻습니다. 죽음을 맛보지 않고 인자가 자기 왕권을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16:28)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고자 하십니다. 이런 교회를 통해서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일이 사람을 살린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선악이 드러납니다. 이런 교회는 하데스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출처] 2020 마태복음 23 강(16장) 내 교회를 세우겠다. |작성자 이바울
예수님은 그리스도
첫째, 천국 열쇠를 네게 준다(16:13-20).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자이십니다.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한 모든 곳, 모든 일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 곧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 1:18)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모든 것, 사람의 모든 것,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런 말씀을 전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누가 14:17) 각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하는 것도 예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삶의 모든 지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생명도 있고 힘도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외적, 내적 생명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과거도 있고 현재도 있으며 미래도 있습니다. 과거가 어떠했으며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미래에 무슨 일이 있을지 하는 것도 예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시몬 베드로의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알게 됨으로써 그의 마음과 삶에 빛이 비쳤습니다. 그가 보기에 자기 민족, 더 나아가 세상 모든 사람에게도 빛이 비쳤습니다. 만일 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지 못했다면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서 먹고 살기 위해서 물고기나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사회의 율법주의적 생각과 생활 방식을 싫어하면서도 그 자신 그 안에서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을 두려워하거나 사람들과 싸우면서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게 됨으로써 그에게 빛이 비쳤습니다. 그의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게 된 것이 그에게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로 그리스도를 알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시몬 베드로에게만 특별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게 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는 다른 사람에게는 나타내지 않으신 것을 베드로에게는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네기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반석’위에 예수님의 자신의 교회를 세우고, 베드로가 그 교회를 이끌어 가고자 할 때 앞으로 많은 것을 새롭게 매어야 하고 또 많은 것을 풀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새롭게 매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제사, 율법의 관계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가려면 제사법에 정한 대로 예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또 여러 정해진 율법들을 지켜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 법을 지켜서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율법대로 하지 않으면 사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이 예수님,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 사함을 받게 되고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게 됩니다. 새롭게 매는 이 일이 땅에서 이루어지면 하늘에서도 이루어집니다.
또 앞으로는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도 새롭게 매어집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하나님은 유대인 베드로를 로마 백부장 고넬료에게 보내셨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으로 가서 말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행 10:28)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는 끊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베드로로부터 시작하여 두 사이가 매어집니다. 심지어 원수 사이도 매어집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미움과 저주가 지배하는 원수 사이가 이제 사랑과 축복으로 매어집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베드로가 원수 사이를 사랑과 축복으로 매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에서도 매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교회를 이끌어가면서 그 외에도 매어야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니 필요한 법도 만들어야 합니다. 법은 사람을 맵니다. 예수님을 믿는 베드로가 그렇게 매면 하늘에서도 매입니다.
그러나 한편 땅에서 풀어야 할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율법에 매인 것을 풀어야 합니다. 특히 율법에 근거한 사람들의 전통에 매인 것을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많은 전통들이 사람을 매고 있었습니다.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전통, 고르반 전통, 금식의 전통, 이방인을 멀리하는 유대인의 전통 등이 사람을 매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매임을 풀어야 합니다. 사람을 매고 있는 전통을 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베드로가 그런 매인 것을 풀면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곧 하늘에서 그 풀림을 인정하십니다.
그런 것뿐만 아닙니다. 시몬 베드로가 새롭게 맨 것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전통이 됩니다. 전통이 되면 굳어져서 처음의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 자신이 새롭게 매시고 또 푸십니다. 예수님은 한 번 매인 것에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또 새롭게 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매고 푸는 일을 자유롭게 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매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도 앞으로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베드로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준다.” 열쇠는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는 힘입니다.
매고 풀고자 할 때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자기 마음대로 매고 풀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 자기에게 좋은 것은 매고, 자기에게 안 좋은 것은 푼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 사람 모두를 괴롭게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매고 풀고자 할 때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잘 믿도록, 또한 잘 알도록 하는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와 좋은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이 기준을 따라 매기도 하고 풀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준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둘째,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리라(16: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은 당시 유대사회를 떠받치고 있던 세 기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로들의 전통, 대제사장들의 성전 제사, 서기관들의 율법이 세 기둥이었습니다. 율법과 전통은 유대인들의 구체적 삶을 지배하고 이끌던 것이요, 성전 제사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또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이 장로들의 전통, 대제사장들의 성전 제사, 서기관들의 율법에 도전적이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전통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구나.” 그들은 전통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잘 경배한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헛되이 경배하는구나.”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으려면 성전에 가서 정해진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너희로 알게 하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셨다면 이제 성전 제사가 필요 없게 됩니다. 대제사장들이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서기관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구나.” (마태 23:25) 이런 말을 들은 서기관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새로운 가르침으로 도전하시니 그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죽임 당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들로부터 죽임 당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은 자신의 삶과 가르침이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고난당하는 것을 피하고자 하시고 또 죽임 당하는 것이 두려우셨다면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서 타협하거나 아니면 포기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가르침을 타협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으신다면 결국 죽임 당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죽임 당하신다는 것은 자신의 삶, 가르침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그만큼 자신의 삶, 가르침이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고난 받고 죽임 당하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일어나리라).” 예수님의 죽으심이 오래 가지 않습니다. 삼 일 갑니다. 예수님을 죽인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이겼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의 나라가 예수님의 나라를 이겼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맙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 도적질, 거짓 증거,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 자기는 깨끗하다 생각한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은 이 말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이긴 줄 알았고, 계속해서 손을 씻어야 한다고 주장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삼일 만에 끝났습니다. 제 삼 일에 예수님께서 살아나셨기(일어나셨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이 지배했습니다. 예수님의 살아나심(일어나심)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셋째,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면(16:22-28).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야단을 치며 말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않습니다.” ‘그리 마옵소서.’라는 말은 ‘하나님이 막으시기를’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 당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이 막으셔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막으시기를.” 선지자 예레미야 시대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공격으로 망할 수 있는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본문의 베드로도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 당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에게 지는 것이요,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 생각에는 하나님이 그런 일을 막으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공격을 받는 그런 일은 결코 없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이 일이 결코 주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일어납니다. 후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넘겨지셨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 요셉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에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사단’은 대적자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대적자를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 당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막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막으셔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런 생각이 대적자의 생각이었습니다. 대적자는 무엇을 생각합니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며 사람의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 당하는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일입니까? 그런데 그 일은 분명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이 자기들 나름대로의 의론을 가지고 아주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죽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일을 말합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이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형들은 내게 악을 행하였으나 하나님은 이것을 선으로 바꾸셔서 이와 같이 많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이처럼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셔서 많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죽임 당하신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지우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예수님 안에서 어떤 죄인이든 죄 사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대하여 살게 됩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안에 생명이 있게 하셨습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고 죽임 당하신다는 것만 생각했지, 그 일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들고 야단을 쳤습니다. “하나님이 막으시기를. 이 일이 예수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사람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 당한다면, 누구라도 그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일은 막아 주시길 바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미워하게 될 것이요, 그런 사람을 제거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막으시기를.”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고’는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 사람들의 높임을 받고자 하는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면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 당하십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못 받아들였습니다. “이 일이 결코 주께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면 도리어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려면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타협하거나 심하면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을 부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면서 그런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타협하거나 심하면 포기해야 합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향해 죽이겠다고 하면 믿음을 버리기도 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사람 앞에서 살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 시대에 십자가는 어떤 죄수가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는 그 사람의 죄목이 적혔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자기 십자가’는 자신의 죽음, 혹은 자기의 죄목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사람들에 의해서 지워진 그 죄목을 따라 죽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그것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았고 또 죽임 당했습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는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믿고서 로마 황제가 신임을 부정했고, 그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임 당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할 때 예수님의 모든 점을 다 따를 수는 없습니다. 어떤 특정한 면을 배우고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목자 예수님을 따릅니다. 어떤 이는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말씀 안에 생명이 있어” 라는 그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다는 것은 각 사람에게 주어진 그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잃으면 구원할 것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에서의 목숨과 ‘잃을 것이요’ 할 때의 제 목숨은 같은 목숨입니까? 다른 목숨입니까? 본문의 ‘목숨’은 프쉬케로 프쉬케는 삶 자체, 인생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에서의 목숨(프쉬케)는 사람들 사이에서 얻을 수 있는 자기 삶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삶 전체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얻고자 하면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합니다. 혹은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얻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돈이나 권력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얻고자 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게 되면 예수님 안에서 얻는 자기 삶 전체를 잃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만일 사람이 돈을 얻고자 한다면 하나님을 잃게 됩니다. 돈을 얻고 하나님을 잃으면 어떻게 됩니까? 돈을 얻기 위해서 사나워질 수 있습니다. 이기적이 될 수 있습니다. 돈은 얻었는데 마음은 사나워질 수 있습니다. 마음이 사나워지면 결국 사람도 떠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도 떠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삶을 잃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아름다운 성품을 잃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얻었는데 가족을 잃었습니다. 그러면 그가 무엇을 얻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람 앞에서 살고, 사람의 요구대로 살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사는 것이 자기 인생을 얻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 그렇게 살면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삶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주시는 삶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무엇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프쉬케)을 잃으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프쉬케)을 바꾸겠느냐?”
베드로가 따르고자 하는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구원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따르면 그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구원이 있고 빛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내 삶이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따르면 이 모든 것을 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자기 인생을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출처] [2014 마태복음 21강] 16:13-28 "예수님은 그리스도" |작성자 이바울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말씀: 마태복음 16:13-28
요절: 마태복음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오늘말씀은 교회의 기초가 무엇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기초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저희가 지난주에 방문한 일본은 특히 지진이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건물을 짓는데 있어서 기초가 매우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는 미국처럼 고층건물이 별로 없습니다. 70층 건물이 최고로 높은 건물입니다. 장바울 선교사님은 대학원에서 지진에 대비한 건출술, 즉 지반 지지력에 대해서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장바울 선교사님의 말에 의하면 일본은 연약한 퇴적층 지반이 지표를 뒤덥고 있기 때문에 높은 건물을 지으려고 하면 연약지반을 통과해서 암반 위에 기초를 놓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건축술이 발달하여서 초강성 콘크리트를 이용한 인공지반을 만들어서 그 위에 건물을 짓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건축에 있어서 튼튼한 기초를 놓는 것이 중요하듯이 우리의 신앙의 기초, 교회의 기초를 견고히 놓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희들이 오늘말씀을 통해서 나의 신앙의 기초, 교회의 기초를 점검하고 새롭게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Ⅰ. 신앙고백의 중요성(13-20)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여러 가지 사역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그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예수님을 사람들이 어떤 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물어보신 것입니다. 이에 제자들이 어떻게 대답하였습니까?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례미야나 선지자중에 하나라 하나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이나 엘리야, 예례미야처럼 훌륭한 선지자, 당 시대에 백성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중에 한 사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일부분만 보고 지적한 것이지 예수님의 전체를 보고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가장 먼저 손을 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의 대답은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야, 즉 구원자란 뜻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았습니다. 선지자와 구원자! 이 둘 사이는 언뜻 보면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 둘 사이에는 도저히 비교될 수 없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선지자는 백성들의 죄를 깨우치고 회개하도록 돕는 자입니다. 그러나 구원자는 백성들을 죄에서 근본적으로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아서 전달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구원자는 그 입에서 바로 구원의 진리,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입니다. 선지자는 구원자를 소개하고 그를 위해서 길을 예비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구원자는 그 자신이 구원의 핵심으로서 구원을 완성하는 자입니다. 선지자는 시대시대마다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나 구원자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본체가 하나님이십니다. 선지자는 역사상 여러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자는 오직 한 분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와 구원자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존경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동경하고 본받고자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고, 외우고, 연설할 때 인용을 하고, 족자에 써서 벽에 걸어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스승이요, 선각자요, 성인으로까지는 보지만, 구원자로까지 바라보지는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발전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겨우 그 정도의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본래 죄가 없으시지만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육신의 죄를 정하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롬8:3). 이로써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의 근본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유일한 구원자요,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행4:10). 우리는 오직 한 분 이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가 있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있고, 영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주는 나의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신앙고백은 구원과 멸망을 좌우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님을 이처럼 잘 알고 확실하게 알아 맞추었까요? 베드로가 어젯밤에 이 시험문제가 나올지 알고 미리 컨닝을 한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수제자이니까 몰래 불러서 귓띰을 해 주었을까요? 아니면 봉사 문고리 잡듯이 어쩌다 한마디했는데 정답이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같이 17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렇게 베드로가 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지식이나 능력이나 통찰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께서 그로 하여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영적인 눈을 뜨게 하셔서 깨닫게 해 주시지 않으면 결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난 번 여름수양회 때에 오셨던 주명수 변호사님도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기 전까지는 자신이 왜 죄인인지, 예수님이 왜 그리스도가 되시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법과 죄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어려운 사법고시를 패스했어도, 죄가 무엇인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 나아가서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그의 영적인 눈을 띄게 해 주셔서 예수님이 자신의 그리스도요, 구원자가 되심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그는 비로소 구원받은 자로서의 감격과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부모님께 버림받고,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자가 독학으로 사법고시까지 합격한 그 감격과 기쁨보다 더한 감격이고 기쁨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도와 주실 때에만이 우리는 내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이요,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구원자요, 메시야이시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무슨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까? 다같이 18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시겠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을 너무나 귀하게 여기시고 이 반석 위에 내 교회, 즉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얼마 후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 승천하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엡1:23)는 계속해서 이 땅 가운데 남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확장하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나가야만 합니다. 주님은 가시지만 주님의 교회는 계속해서 남아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는 얼마나 영광스럽고, 소중하고도, 존귀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교회를 자신의 몸이요, 신부로까지 표현하셨습니다(엡5:25).
그런데 그 교회를 어디에다가 세우신다는 것입니까? 로마의 황궁에? 알프스 언덕 푸른 동산 위에? 아니면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뉴욕의 월 스트리트 한 가운데 세우시겠다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신앙 고백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나는 죄인이요, 주님만이 나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라고 고백할 때에 그 신앙고백을 기초로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는 이 부분을 잘못 해석해서 베드로라는 사람을 기초로 교회가 세워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교황의 절대권위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라는 사람이 결코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금방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해서 점수를 따지만, 뒤에 보면 금방 인간적인 소리를 해서 사단이라고 책망을 듣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신 후에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연약하고 쉽게 넘어지는 베드로라는 사람 위에 어떻게 주님의 교회를 세우겠습니까? 사람은 믿을 수도 없고, 신뢰할 수도 없습니다. 나도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이 신앙고백만큼은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답고도 가장 고결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신앙고백을 반석(rock)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우리가 단지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마음으로부터 “주는 나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이렇게 고백한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보실 때에 교회의 반석이 될 만큼 너무나 소중하고 견고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사회적으로 볼 때에 별로 알아주는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사람숫자가 별로 많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비록 한 사람 뿐일지라도 그 사람이 진실로 예수님을 자신의 그리스도로 고백했다면 거기서부터 영광스러운 주님의 교회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일본수양회에 가서 이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본에는 현재 15개 지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10개 센타가 한 가정이서 개척하는 센타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양들이 한 두 명 자라고 있는 센타도 있지만, 어떤 센타는 한 가정이 동역자 한 사람과 아이들을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면 그곳은 교회가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작고, 보잘 것 없고, 초라해도, 그들이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하고, 고백하며 살아간다면 그곳이 바로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경대를 나오고 와세다대학을 나온 일본의 엘리트 지성인들이 그곳에 와서 말씀을 공부하고 변화가 되고 목자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주로 장소가 지하 동굴, 카타콤의 지하 무덤이었습니다. 교인들은 대부분 밑바닥 천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오늘날 수 천 수 만 명이 모이는 웅장한 현대교회에 비하면 얼마나 초라합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보실 때는 그들의 교회가 훨씬 더 귀하고 영광스러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자신들의 메시야요, 구원자요, 그리스도로 고백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 건물은 불 탈 수도 있고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낡고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 우리 마음속에 세워진 주님의 교회는 결코 무너뜨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의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지켜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8절 후반 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음부의 권세는 사단의 권세, 사망 권세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사단이 방해를 하고 훼방을 놓고 핍박을 해도 주님의 교회를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정윤지목자님은 수양회 때마다 부모님이 불같은 핍박으로 욕설을 퍼붓고 때리고 협박을 해도 끄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이미 예수님을 자신의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서 그 마음속에 견고한 주님의 교회가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많은 가정들이 위기라고 합니다. 올 봄에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840쌍이 결혼을 하고, 398쌍이 이혼을 한다는 수치가 발표되었습니다. 한 상담소의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 인구의 10%, 기혼자 인구의 20%인 400만명정도가 불륜이나 외도를 한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빛과 소금 8. 15일자). 왜 이처럼 자꾸 가정이 무너지는 것입니까? 이는 진실된 신앙과 사랑에 기초해서 가정이 세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나의 유일한 아내입니다” “당신은 나의 유일한 남편입니다.” “나는 당신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best의 동역자로 영접하고 일생동안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이런 믿음의 결혼관을 반석으로 삼아서 가정을 세우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에 기초해서 가정을 이루기 때문에 자꾸만 음부의 권세, 사단의 유혹을 받아서 외도를 하고 이혼을 하고 가정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사이에도 자꾸만 사랑고백을 해야만 합니다. “당신은 내 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로다(창2:23). 당신은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최고의 동역자입니다.” 이처럼 영적이고도 진실된 사랑고백을 할 때에 그 가정은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어떤 어려움이 오고, 위기가 와도,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좀 어려워도, 남편이 사업에 실패를 해도, 가족 중에 누가 좀 사고를 당해서 몸이 아파도 이를 이기고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하고 자꾸만 신앙고백, 사랑고백을 할 때에 우리의 신앙도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유혹이나 핍박이나 시련이 와도 음부의 권세가 이를 이길 수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8:35-39)).” 세상에 그 무엇도 그리스도 되신 주님과 나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춘향이가 한 번 이도령을 서방으로 영접하고 사랑을 고백했기 때문에 아무리 변사또가 유혹을 하고 협박을 해도 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었듯이 우리도 한 번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고백했으면 이제 어떤 사단의 세력도 주님과 우리 사이를 침범할 수가 없습니다. 골로새서 2:6,7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요, 그리스도로 받았으면 이제 이 예수님 안에 뿌리를 박은 것입니다. 딴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 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주님과의 관계성이 느슨해지고, 감격이 사라지고, 사랑이 식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정에 위기가 오듯이 이는 주님과의 관계성에 위기가 온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초심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고백해야만 하겠습니다. “주는 나의 그리스도시니이다(You are my christ). 내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이었는데 나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시고 나를 구원해 주셨는가? 주님만이 나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이때에 주님과의 관계성이 깊어지고 내 안에 있는 주님의 교회는 더욱더 견고하게 서 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 어떤 가정은 부부사이가 힘들 때마다 결혼식때 찍은 비디오를 함께 보며, 결혼 서약했던 것을 다시 꺼내어 읽으며, 그때의 감격을 되살리고, 가정의 위기를 극복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내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의 그 감격과 기쁨과 감사와 은혜를 항상 되새기고 주님을 내 일생의 영원한 주요,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의 마음에 어떤 사단의 세력도 틈타지 못하고, 견고한 교회의 기초가 놓일 것을 믿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열쇠는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습니다. 가장 신뢰하고 믿을만한 사람에게 열쇠를 맡깁니다. 하물며 천국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아무에게나 맡기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에게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를 맡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님을 전파하여 그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할 때에 천국의 문을 열어서 그 사람을 영생으로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힘과 권세가 있어서 취직문을 열어 회사에 취직만 시켜 주어도 얼마나 고맙게 생각합니까? 그런데 하물며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의 문을 열어주는 권세는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희들이 이 귀한 직분을 감사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이 특권을 감당해야만 하겠습니다.
Ⅱ. 신앙고백한 자의 삶(21-28)
그러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은 이제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만 하겠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해서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직 영적인 메시야관이 없었기 때문에 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간하며 말렸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 이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책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기는 했지만 그리스도가 가셔야만 하는 메시야의 길을 영접하고 동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인류의 구원자, 메시야라면 대적들을 다 물리치고, 굴복시키고, 승리자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셔야지, 어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만 한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고난받는 메시야, 죽임 당하는 그리스도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값을 치루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고생하지 않고, 헌신하지 않고, 죽지 않고, 영광만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고난을 통해서 영광에 이르고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사단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사람의 일을 생각하도록 우리를 부추깁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선악과만 따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고 아담을 유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려고 할 때도 자신에게 절만 한번 하면 세상 영광을 다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이처럼 사단은 항상 쉬운 길, 편한 길, 고난 없는 영광의 길을 가도록 우리를 부추깁니다. 그러나 이런 사단의 음성을 듣게 되면 넘어지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단호하게 외쳐야만 하겠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인생을 사는 사람을 말합니까? 다같이 24, 25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시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께서 먼저 고난을 받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자도 당연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만 합니다. 우리의 자기는 아직 성화되지 못한 자기로서 끊임없이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자기 영광을 구하고, 자기 유익과 세상쾌락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중심적인 자기, 육신적인 자기, 이기적인 자기, 안일과 정욕을 사모하는 자기를 부인해야만 합니다. 에베소서 4:22-24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자기 부인이란 한마디로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 한번의 결심이나 투쟁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 순간 순간 자기와의 내적인 싸움을 싸워야만 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으라고 하였습니다(눅9:23).
이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단이라는 책망을 듣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직 생각과 욕심이 땅에 붙은 사람인데 어찌 사람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그런 높은 수준으로 올라갈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저절로는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도해야만 합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셔서 자기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가치관을 주시도록 기도해야만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목숨을 잃고자 하면 오히려 얻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고자 발버둥을 치게 되면 이상하게 다 잃어 버리게 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이 세상에서 볼 때는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지막날 당신의 왕권을 가지고 오실 때에 그런 사람에게는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진다고 약속하셨습니다(28).
춘향이가 만약에 이도령이 죽은 줄 알고 변사또와 놀아났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나중에 이도령이 왔을 때에 “아니 서방님이 어떻게---”하다가 땅을 치고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춘향이가 자기를 부인하고, 목에 칼을 차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중심을 지켰을 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지막 순간에 이도령이 과거급제하고 금의환향하였을 때에 얼마나 영광스럽게 되었습니까? 우리도 이 땅에서 좀 고생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하며 십자가를 질지라도 예수님을 배우는 제자의 삶을 살 때에 마지막날에 큰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을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 각자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저희들이 날마다 이 신앙고백을 마음으로부터 점검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서 장차 주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