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장의 축복 선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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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씀카드

다들 올 해의 말씀 카드를 뽑으셨나요? 저도 하나 뽑았는데요. 해를 거듭할수록 뽑는 말씀카드의 갯수가 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부흥을 했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제 더이상 늘어나지 않겠죠?
제가 뽑은 말씀은 민수기 6:24-26
민수기 6:24–26 NKRV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사실 2023년도에도 이 말씀을 뽑았습니다. 이 말씀을 뽑으면서 제가 느끼는 것은 여호와께서는 제게 축복하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2023년에도 축복해야 한다는 말씀을 나눴는데요. 오늘도 축복하자는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제게 주시는 이유는 저를 축복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축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제 자리는 여러분을 축복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22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면서 23절에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고, 아론과 제사장들에게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아론과 아들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하라고 시키는 장면입니다.
그러니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제게 하시는 이유는 ‘축복하라’는 명령이신거죠. 그리고 이 말씀을 읽는 여러분도 다른 이에게 축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호와는 우리에게 축복하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을 빌어주라고 하십니다. 축복을 선언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가장 오래된 기도문 중에 하나인데요. 이 축복은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사용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장들을 ‘코하님’이라고 하는데요. 매일 예배의 ‘중심기도’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축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요일 밤마다 자녀들을 축복할 때 사용합니다. 축복의 꽃이자 축복하기에 가장 멋진 성경 말씀입니다.
또한 1979년에 고고학자 가브리엘 바케이가 예루살렘 성벽 바깥에서 고대 무덤 동굴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 학자를 도와주던 열 세살짜리 소년이 동굴 바닥 밑에 숨겨진 방을 발견합니다. 그 바닥에 있던 방을 열어보니 두 개의 은 두루마리와 천여 개의 고대 유물을 발견했습니다. 이 은 두루마리는 펼쳐지지도 않아서 펼치는데만 3년이 걸렸습니다.
그 내용은 이스라엘 박물관에 있는데요. 그 내용은 다른 내용들도 있었지만 이 제사장의 축복이 담겨 있었습니다. 기원전 6세기 유물입니다. 성경의 다른 사본들보다도 400년이나 더 오래된 예레미야 시대의 물건이었습니다. 이 축복선언문은 아주 단순하고 아름답고 강한 리듬으로 구조가 되어 있습니다. 마치 시처럼 특별하게 기록되어 있는 유물이었습니다.
우리 언어로는 그 운율을 잘 볼 수 없지만 히브리어로는 글자수도 의도적으로 맞춰서 만들었습니다.
24절은 세 단어로, 25절은 다섯 단어, 26절은 일곱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은총이 물결처럼 퍼져가는 모습을 언어적으로 구현한 것입니다.
‘복을 주시고’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얼굴을 돌리시어’
그렇다면 어떤 축복인지 보겠습니다.
24절에서는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고 합니다.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물질적 축복을 가리킵니다. 생계와 육체적 건강 등을 뜻합니다.
25절은 “주께서 너를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너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이것은 도덕적 축복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실 것을 빌고, 우리가 다같이 잘 지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축복입니다. 갈등과 시샘 없이 함께 살 수 있는 복입니다.
26절은 내면적인 복입니다. 샬롬과 안녕을 의미합니다. 바닷가에 군중들이 모여 있습니다. 커다란 배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인사하기 위해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어린 아이가 열심히 손을 흔들었습니다.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그 아이에게 왜 그랬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아이가 말합니다. “제가 열심히 손을 흔드는 것은 배의 선장이 저를 보고 손을 흔들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배가 저렇게 멀리 떨어져 있고, 여기 우리들은 많은 군중이잖아! 도대체 선장이 너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도록 만든 게 뭐냐?’
그러자 소년이 말합니다. “저 배의 선장은 저의 아버지이걸랑요. 아버지는 군중 속에서 저를 찾고 계시니까요!” 하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께서 너를 향해 얼굴을 돌리시어, 너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라고 하는 것의 의미입니다.
어린 아이가 유치원 발표회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엄마 아빠가 자신을 보고 있는지입니다. 무대에 서서 엄마 아빠에게 인사를 하기도 하고요. 공연이 끝나고 관중들이 박수를 칠 때 엄마 아빠를 찾고, 바라보며 손을 흔듭니다. 그리고 엄마 아빠도 손을 흔들며 아이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때 아이와 아빠가 서로 눈을 마주치면 내면적 평화가 찾아옵니다. ‘아빠가 얼굴을 나에게 향했구나, 아빠가 보고 있구나, 여기 계시는구나’하는 내면의 충만한 기쁨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손을 흔들면 하나님도 손을 흔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도 얼굴을 나에게로 향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 영적 복입니다. 그 얼굴이 우리를 향할 때 우리는 그 복이 더 깊어집니다. 물질적인 축복을 거쳐, 인간관계의 은혜를 거쳐, 가장 내면적인 축복,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시며, 우리를 듣고 계시며, 그분의 영원하신 팔로 우리를 안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때 오는 마음의 평화로 깊어집니다.
우리가 받고 싶은 복은 물질적인 축복도 있고, 인간관계의 축복도 있지만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복은 우리 존재 자체의 평화이자 안녕입니다. 우리의 내면과 영이 안녕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요. 내면과 영이 안녕하면 사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언제나 내면이 평화롭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서로에게 물질적인 축복과 사람의 복과 내면의 평화를 빌어줄 때 사랑으로 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사실 그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저 축복하라는 분부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면 27절 맨 끝에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임무는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있어서 내가 축복하면 복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미우나 고우나 축복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나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됐고, 사람의 잘잘못을 따지기 시작합니다.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기 시작한 것이죠.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권한을 차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이 생겼지만 인간은 악의 간사함에 잘 넘어가서 선을 분별하기보다 악을 구별하는 일을 더 잘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이 생긴 것이죠.
악한 일을 도모하기를 잘하고 선을 도모하는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극적이고 악한 것을 따라가기 쉬워서 사람을 향해 정죄하고 잘못을 말하는 것을 잘합니다. 잔소리도 잘하고요. 남을 고치려고 하는 말은 참 잘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렇다면 잘못된 것을 어떻게 고치나요? 악을 그대로 두나요? 라고 묻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말했습니다. ‘진리보다 중요한 것은 방법이다.’라고 했습니다. 잘못된 것을 고치는 일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기보다 악을 도모하기보다 악에는 미련해야 하고 선한 일을 도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격려하고, 다른 사람을 고치려고 하는 언어보다는 긍정의 말로 변화시키는 방법을 써야 합니다. 부정을 부정으로 반응하기보다 어둠이 찾아왔을 때 빛으로 반응하고 사랑으로 녹여내는 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권한을 주셨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권한, 축복하는 권한을 주셨지 정죄하라는 권한과 심판하라는 권한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20:23 에서도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사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권한입니다.
육아에 대한 프로그램을 많이 보면요. 아이들이 말썽을 일으키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정말 말도 안 되게 엄청난 아이들이 많은데요. 그런데 항상 오은영 박사님과 같은 상담가들이 나오면 늘 아이들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 부모에게 잘못이 있다고 하죠. 부모가 아이를 대하는 방식이 사랑으로 대하기보다 자신의 욕심이나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가 튀어나와서 훈육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해서는 안 되는고요. 축복의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축복을 받기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 어린 세대들이 축복을 많이 받으면 좋겠습니다. 잔소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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