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낮아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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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보좌 앞에 모였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에베소서 6:1–9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바울은 교회는 질서를 꼭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질서를 보면, 그 질서는 사회에 적용은 되지 않는 질서입니다. 그 질서는 5:21을 보면 서로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질서를 여러분의 일터에 바로 적용해본다고 한번 가정해보십시오. 서로 복종하는 질서를 따르면 일의 효율성을 높이고, 이익을 증진하는데 과연 도움을 주는 것일까요? 만약 둘 중 어느 한쪽이 이 질서를 따른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이 질서를 따르는 쪽이 여러분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다른 누군가에게 복종하더라도 상대가 과연 여러분에게 복종을 할까요? 한명이라도 지키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사용화 될 수 없는 질서입니다. 왜냐하면 복종하는 것 자체가 손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 질서를 세상에 적용하면 손해라는 결과를 얻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고요, 이렇게 했다간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기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너희는 서로 복종하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교회입니다.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받아들인 자들의 무리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21절은 앞의 절들과 이어지는 상황인데 21절 앞의 절들을 보면 복종을 해야하는 대상이 ‘너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모여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서로 복종해야 하는 대상과 그 영역이 성도들간을 말하고 있고, 교회라는 공동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며 살 수 있을까? 혈연관계가 아닌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때 그 공동체에서 서로에게 적용할 수 있는 질서는 무엇인가? 이에 에 대해 바울은 서로 복종하는 것이라고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복종해야 하는 근거가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21절 다시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예수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주인이신 예수님이 당연히 모든 질서의 기준이 되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3년 동안 가르치셨는데, 모든 가르침들에 중심이 되는 사상이 있습니다. 이 중심이 되는 사상을 모른다면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만큼 중요한 것이 중심되는 사상입니다. 이 모든 가르침들의 중심사상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모든 질서의 근원이 되시는 나라이지요.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생명이 아닌 다른 생명과,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는 다른 질서를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피조세계가 참된 생명을 누리며, 하나님이 만드신 법과 질서로 피조세계가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행복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거부하고, 참된 생명이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거부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버린채 가짜 생명으로 살고 있고, 하나님의 법과 질서가 아닌 인간이 만든 법과 질서로 살고 싶어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성경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인 성경의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하나님이 다스리고자 하는 나라, 곧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하나님을 거부한 인간이 만든 세상의 질서가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는 세상에서 필요한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필요한 질서를 말한 것이죠. 하나님을 온 세상의 주인으로 받아들인 사람들, 그의 하나뿐인 아들을 아버지 왕의 모든 권위와 능력을 위임받아 피조세계의 왕과 주인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따라야 하는 질서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라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이 교회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교회는 인간이 만든 세상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라라고 한 것이죠. 21절에서 바울은 교회가 따라야 할 질서를 현재명령형으로 말했습니다. 현재 명령형은 한 번만 하라는 뜻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그렇게 지속적으로 하라는 의도를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복종하다라는 말은 아래에 두다라는 어원적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자발적으로 상대방보다 아래로 내려가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내가 남보다 유리한 입장에 서기 위해서, 남보다 나은 나의 안정적인 삶과 나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는 어느 정도 힘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은 하나님 중심을 말하지 않고, 온통 인간중심을 말하고 있고, 거기에서도 나의 행복과 안정이 가장 우선시 되고 최우선 가치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행복한 삶을 가져 올 힘이 필요한데, 그런 힘을 얻기 위해서는 능력을 갖추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능력을 갖춘 있는 인재를 필요로 합니다. 학업성적, 학업외 과외 활동, 사회활동, 사회성, 리더십 활동 같은 능력을 갖춘 사람을 선호하지 상대방보다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필수조건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는, 곧 그리스도를 피조세계의 주인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세상에서는 가르치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제시하면서, 교회는 지금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서 지금부터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라, 지금부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라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21절에서 교회라는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근거로, 복종해야하는 질서를 따라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22절 이하에서 3가지 관계에 있어서 서로 낮아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부부관계에 있어서 서로 낮아지는 것이고, 오늘 본문에는 나머지 두가지 관계인 부모와 자식관계에 있어서 서로 낮아짐과 주인과 종과의 관계에서 서로 낮아짐을 말하면서 서로 낮아져야 하는 대상과 관계, 그리고 낮아지는 방법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부모와 자식간에 관계와 주인의 종과의 관계에 대해서 서로 낮아짐을 말할 때는 고대사회였기 때문에 고대사회의 모습을 간략하게 이해부터 해야 합니다.
바울이 살았던 곳의 1세기는 로마시대라 부릅니다. 당시 고대 사회는 산모사망률이 높았고, 유아 사망률도 높았습니다. 아기가 태어난다고 해도 유아의 35%는 생후 수년 안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유아 살해와 영아를 유기하는 관행들이 받아들여지는 때였습니다. 태어난 어린아이들 중에 절반 정도만이 열 살을 넘겨 생존했고, 약 7살 정도가 되면 들이나 가게에서 일을 했습니다. 또한 아이들이 열살쯤 되면 25% 정도의 아버지가 사망을 했고, 성인기에 이르면 많은 사람들이 양친을 잃었습니다.
이 때의 집이라는 개념은 직계존속만 존재하는 현대의 집의 개념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로마시대에는 계급과 지위가 있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집에는노예도 있었고, 노예였다가 신분 상승으로 인해 자유인이 된 사람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에는 주인의 자녀들과 노예의 자녀들과 자유인의 자녀들이 함께 자랐습니다.
또한 이 시기의 사회는 아이들에 대한 존중의 인식이 매우 낮았습니다. 당시에는 아이를 어른의 축소판으로 봤기 때문에, 어린이를 똑바로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아주 엄격한 훈육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고대의 플라톤이라는 유명한 철학자는 목동이 자기 짐승을 치듯이 가정 교사가 어린이를 훈련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고대에 아이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일면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 시대에서 아버지의 권한은 거의 절대적이었습니다. 이것을 가부장권이라고 하는데 집안의 아이를 죽여도 될 정도의 권한과 힘이 아버지에게 주어졌었습니다. 보통 7살 이상되는 남녀의 어린아이 종은 남성 주인의 성적 착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상이 고대의 모습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봤을 때는 고대이지만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현재의 이런 상황에서 어린 자녀들이든 성인인 된 자녀들이든 주인의 자녀들이든, 자유민의 자녀들이든 노예의 자녀들이든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엡6:1에서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근거를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에베소서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세상이 따르고 있는 이 질서는 인간이 만들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이 세우신 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근거가 하나님께 있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둘째로, 부모에 대한 순종의 이유를 그리스도 안에서도 찾았습니다. 1절에서 ‘주 안에서’라고 할 때 바울은 앞서 5장에서 아내와 남편의 관계 속에서 ‘주 안에서’의 개념이 무엇인지 잘 설명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는 그리스도가 자기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존경을 가지고 남편에게 복종할 때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따르는 것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5장에서 보여주는 주안에서의 개념입니다.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면서까지 사랑하고, 머리로 생각하고 존경함으로 복종하는 것은 서로에게 진정성있게 요구되는 상호관계적인 것입니다. 목숨을 줄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을 받으니 머리를 삼을 정도의 존경과 복종을 할 수 있는 것이죠.
1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것은 이렇게 진정한 사랑위에 둔 질서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상대를 위해 줄 수 있는 희생하는 사랑과 머리로 삼을 수 있는 존경함으로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해야하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그러나 자녀를 죽일 수도 있는 막대한 권한이 아버지에게 있고, 종의 남녀아이를 성적착취의 대상으로 여겼던 로마 문화 속에서 그런 부모에게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면 그것이 바른 질서를 말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바울은 4절에서 아버지에게도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가부장권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자기 기준에 입각한 막대한 힘을 자녀들에게 잘못 사용하고 있었고, 성적으로 종의 자녀들을 착취했던 아버지들에게 자녀들을 노엽게 했던 것들을 중지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당시 집에는 직계존속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노예와 노예였다가 신분상승으로 자유인이 된 사람들도 같이 있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녀들은 직계존속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노예의 자녀들, 자유인의 자녀들이 한 집에 함께 생활했었습니다. 바울은 직계존속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노예의 자녀들, 자유인의 자녀들 모두를 지칭하며 자녀들은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분노하게 만들지 말라고 했던 것이죠.
자녀를 죽여도, 노예의 자녀들을 성적인 착취를 해도 그것이 사회에서는 통용된다 하더라도 주 안에서는 옳은가, 세상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도, 교회는 세상의 질서를 그리스도를 경외함이라는 여과없이 세상에서 하던대로 그대로 해도, 세상의 질서를 따라도 괜찮은가 생각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자녀들의 부모에 대한 순종과 자녀들을 노엽게 했던 아버지들의 잘못을 고치는 것은 1절의 ‘주 안에서’ 반드시 유지되고 수정되어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기준을 세상에 아니라 주께 둔다는 것이죠. 자기 목숨을 주면서까지 희생하는 사랑을 하셨던 그리스도를 경외하기 때문에, 이제 내가 그런 놀라운 희생하는 사랑을 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주 안에 있기 때문에, 자녀들의 생명을 쥐락펴락했던 가장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서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낮은 자리로 내려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창조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가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부모와 자식간에 관계에서 서로 복종해야 함을 그리스도께 그 근거를 두라는 것이죠. 가장 높은 자리를 마다하지 않고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셔서, 자기 목숨까지도 사랑하는 자를 위해 버리신 그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자녀는 부모보다 더 낮은 자리로 내려함이, 그리고 자녀들의 생명도, 성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자녀들의 생명과 성을 존중해주는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 맞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교회가 된 성도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사람들은, 성도들은 세상에서 따르던 질서를 버리고, 따라야 할 근거를 그리스도께 두는 출발점을 달리해서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서 서로에게 낮아지라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종과 상전의 관계에서도 세상의 질서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배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당시 종과 상전이 어떤 관계안에 있었는지를 대략적으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당시 주인은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종은 주인에게 굴종할 수밖에 없었던 관계에 있었습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주인이 노예에 대해 폭력적인 지배를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인의 종의 관계가 이러했을 때, 바울은 종에게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5절입니다. 에베소서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을 그리스도께 하듯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종에게 상당히 폭력적으로 들리는 말입니다. 주인이 어떤 짓을 해도 무조건 순종해야 하고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서라도 주인을 받들어라라는 식으로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아버지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아야 했던 것처럼 9절에서는 주인이 버려야 할 것을 말합니다. 종에게만 요구하는 사항은 아니기는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피조세계를 잘 경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들이 이 피조세계를 잘 다스려나갈 수 있도록 힘과 능력과 지혜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만큼이나 주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힘과 능력과 지혜를 부여받았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 없죠. 그러나 인간은 그 힘과 능력을 피조세계를 잘 다스리는 일에 사용한게 아니라 사람에게 행사했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인간에게 부여하신 힘으로 인간을 지배했던 사건입니다. 이집트에서 왕의 무덤인 피라미드를 건축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노동력 착취가 일어났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크고 튼튼한 높은 탑을 쌓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노동자들의 생업의 시간을 빼앗아 가며, 노동의 임금을 주지 않아가며 일을 시켜야 빠른 시간안에 크고 튼튼한 건축물이 완성이 될 것입니다. 피라미드는 인간이 힘으로 인간을 지배했던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입니다.
고대의 피라미드도 그런데 하물며 바벨탑처럼 하늘에 닿을 만큼의 건축물을 만들고 있었다면 피라미드때의 상황보다 더 악한 상황이 있었을거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능력과 힘으로 피조세계를 잘 다스리는 대신, 인간에게 힘을 행사하며 인간을 지배했던 사건이 있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인과 종이라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낸 인간은 죄인인 인간이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려는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된 생명의 근원을 버린 인간이 만들어낸 세상에서 악한 것들과 악한 질서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종들에게 주인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의 근거를 사회법이 그러니까로 따라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하듯, 다시 말해서 주인에게 복종해야 하는 근거를 그리스도께 두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인간이 만든 법과 질서를 따라 살아도 삶의 목적과 근거를 그리스도께 두어 변화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어쩔 수없이 따르던 것에서 그리스도께 하듯이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었고,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층이었던 종의 권위와 위치를 자유인들과 주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입니다. 바울은 종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로 높입니다. 6절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당시 비천하기 그지없고, 주인의 종속물에 불과했던 종들을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일을 할 수 있는 자들로 그 위치를 격상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자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종들은 자유인들이 하기 힘들어하는 일들, 천한 일들을 하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명예스러운 일을 할 수 있는 자들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종들또한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고 그들을 권위와 위치를 격상시켜주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8절에서 종도 보상을 받을 수 존재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종에게는 어떤 보상도 어떤 유업도 주지를 않습니다. 종은 주인의 재산에 불과했고, 종에게는 보상을 주지도 않을 뿐더러 종이 받는 유산 자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종들도 그리스도께는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존재라고 한 것입니다.
5-8절에서 바울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낮은 사람들이었던 종들에게 세상의 질서를 따라 살아도, 막대한 힘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주인들에게 여전히 복종해야 하는 그 근거를 그리스도께 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주안에 있는 종들은 다른 자유인들과 마찬가지로 창조세계의 왕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고, 주님께 상을 받을 수 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낮은 신분을 해결할 수 없어도, 주님안에서는 더이상 낮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사회를 바꿀 수는 없어도 삶의 목적을 주께 두고 주안에서는 자유와 해방이 있음을 믿으라는 것이죠.
그리고 나서 바울은 주인에게도 말했습니다. 9절”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종들이 그리스도께 근거를 두어 주인 자신들에게 순종하는 것처럼 주인들도 종들에게 동일하게 그리스도께 근거를 두어, 그리스도께 하듯이 종들에게 순종하고 위협을 그치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주인들이 아예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한 것입니다. 사회계급이 있는 사회에서 주인들이 종들에게 순종하고 섬기는 것이 과연 가능한 현실적인 일일까요? 바울은 이어서 더 심한 말을 합니다. ‘위협을 그치라’ 주인의 모든 권력은 힘에서 출발합니다. 주인에게는 노예를 죽일 수 있는 권한까지 있었고, 노예의 재산을 점유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노예 자체가 주인의 재산에 속했습니다. 주인의 막강한 힘은 노예에게 모든게 폭력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주인에게 위협을 그치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행사하던 힘의 권력을 멈추라는 강력한 의미입니다. 이 말이 그 당시에는 어떻게 들리는 말이었을까요? 굉장히 충격적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을 것입니다. 노예제가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회에서 주인에게 권력을 내려놓으라는 말은 노예제도를 거부하라는 반사회적 언동이었고, 로마가 만들어온 사회의 질서를 부정하는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5:21절에서 교회는 세상의 질서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야 할 것을 말하면서 서로 복종하는 것, 서로 낮아지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힘의 논리대로 살아가는 곳이지만, 교회는 그리스도께 근거를 두고 새로운 질서를 따라 살아가는 곳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인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주인과 종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변화가 있는 집들이 늘어나다가, 이들이 한 집에서, 두 집으로, 두 집에서 세 집으로 이렇게 더 큰 단위로 모이기 시작했다면, 더많은 주인들과 더 많은 종들이 모여 주께 하듯 서로 낮아지며 모이기를 힘썼다면, 그런 교회는 주변 사람들에게, 지역사회에 어떻게 비쳐졌을까요? 자유와 해방, 사랑과 섬김이 주인 종 할 것 없이, 계급과 지위에 상관없이, 사람 상호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나타나고 있는 공동체가 생겨났다고 한다면, 당시 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과 흠모할 만한 영향을 끼쳤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용서해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시고, 그들 각각 혼자 살아가라고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에 속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되게 하셨고, 하나님의 자녀를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에 속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한 가족이 되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함께 새로운 질서대로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세상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고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는 세상의 풍습은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릅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고 있는 교회는 세상에 전혀 다른 맛과 전혀 빛을 보여줄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을 따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흠모할 만한 삶이 그들 안에 있음을 보고 궁금해 할 것입니다. ‘당신들은 왜 그렇게 삽니까?’ 사람들이 우리가 살아내고 가지고 소망에 대해 궁금해서 물어올 때 우리는 답변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에 속했고, 교회의 공동체의 일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주께 하듯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섬기고 서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위선과 낮은 도덕성으로 인해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내지 못하고, 세상과 다른 아무맛도 내지 못한다는 인식을 바꿔나가는 교회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하나님이라는 빛을 비추고, 하나님이라는 맛을 세상에 낼 수 있는 교회되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 있는 형제 자매에게 서로 사랑하며 낮아지기를 행복해하는 우리들의 삶을 보며, 누군가 당신들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흠모할 만한 멋진 삶을 살아가는가 물어올 때, 그들에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당신도 우리와 함께 이런 멋진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교회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오기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정의와 평화가 세상 모든 나라에 임해서 모든 사람들이 바름과 평화 속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이 세상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 나라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또한 대한민국을 위해서도 기도해주십시오. 정치, 경제, 사회에 큰 어려움들에 직면해 있습니다. 행정부, 입법부간의 균형이 잘 이뤄지고, 사법부의 정치화, 정치의 사법부화가 되지 않도록, 대한민국에 정의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큰 문제들이 잘 해결되고 국민들이 이 어려움을 잘 이길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특별히 미국 la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전례없는 산불로 la와 la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하루빨리 산불이 진압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교회와 남편과 아내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 땅에 세우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다시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하시는데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성도들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우리 교회와 이땅에 세우신 교회들이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먼저 회복되어가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세상의 방식에서 벗어서나 부부로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부부가 되고, 하나님의 회복사역에 아름답게 동참해가는 나의 남편과 나의 아내가 되게 해달라고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성도들과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여러가지 문제로 힘들어 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의 실존의 문제들을 해결해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개인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사랑하고 낮아지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아가는 것을 보여주셨고, 그래서 하나님은 힘과 능력이 아닌, 사랑과 섬김으로 피조세계를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가셨던 그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그 그리스도를 따라, 그런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기준이 되게 하셨사오니, 교회는 부모 자식간에 맺는 관계에서도, 사회속에서 맺어지는대인 관계에서도 먼저 따르던 세상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따라 관계 맺으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서로 사랑함과 존경함과 낮아짐으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평화를 맛보고 누리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피조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맛과 빛으로 나타내는 교회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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