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장

새벽기도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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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화법

저는 충북 제천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 고향이 제천은 아니고,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저희 아버지가 17년전에 제천으로 내려가셔서 목회를 시작하시고 지금까지 계속 하고 계시기 때문에 저는 초등학생 때부터 제천에 있었으니 나름 제천사람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오래 지내기도 했는데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충청도 사람들은 그 특유의 화법이 있습니다. 돌려돌려 말하는 화법이 있는데요, 예를 들면 여러분이 택시를 타고 가고 있는데 비가 너무 많이 내리고 있는 상황이면, 택시 기사 아저씨가 “아유~ 오늘은 내가 기사가 아니라 선장이여~” 하시거나, 배달음식을 주문했는데 너무 안오면 가게에 전화를 걸어서 “아유 사장님 안오셔도 돼유~ 내 제사상에 올려두셔유~”하기도 하고, 카페에 가서 커피를 주문했는데 커피가 너무 연하면 “아이고~ 이 집이 커피 원두 애껴갖고 이 건물 올린거 아녀~”하기도 합니다.
저는 어느정도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적응이 안되는 건 이겁니다. 어떤 일을 충청도 사람들에게 부탁했을때 “알겄슈”했는데, 나중에 와서 보니 하나도 안되어있는 겁니다. “이기 어찌 된거유?” 하고 물으면 “거 알겄다켔지 하겄다고는 안했슈~”하는 상황입니다. 충청도 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 들으면 가장 답답한 말이 바로 “알겄다 그랬지 하겄다고는 안 했슈~”하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직접 들어보시면 “어휴~ 답답해”하실 수도 있는데요.
그런데 사실 여러분, 충청도 사람 뿐만 아니라, 저희 모두가 “알겠다고 했지 하겠다고는 안한다”는 태도를 취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믿음에 대해서 잘못 이해했을 때, 발생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믿음은 알고 행하는 것

오늘 함께 읽은 본문말씀은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히브리서의 11장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에녹은 하면서 쭉 믿음의 선조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로 믿음의 계보를 쭉 이어가면서 오늘 본문 말씀은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먼저 1-2절을 보시면,
Hebrews 11:1–2 NKRV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라는 말씀을 얼핏 들어보면, 믿음이라는 것이 일종의 증명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지금 저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살아계신다, 라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저희의 믿음이다, 라고 말씀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사실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계신다라고 생각하고 인지 하면 그것이 믿음일까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셨다, 라는 것을 머리로 알고 있는 것이 과연 믿음일까요?
3절을 보시면,
Hebrews 11:3 NKRV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저희는 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을 지으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3절 후반부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은 다른 번역본을 보면, 우리가 지금 눈에 보인는 이 세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즉 하나님의 말씀처럼 눈에 안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부터 나와서, 결론적으로 “지금은 눈에 보이는 것”이 되었다는 게 중요합니다.
바꿔서 말하면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하여금 “보이게끔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지금은 눈에 안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통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보게끔 만드는 것이 믿음입니다.
저희가 보통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행위를 구분할 때가 많이 있는데요, 사도 바울이 주로 이야기했죠? 행위로 구원받는게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다, 율법의 외식하는 것을 조심해라 등등 행위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에 저희가 많이 익숙한데, 하지만 여러분 진짜 믿음은 “믿는 대로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거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은 “아이고, 예수님~ 지는 알겄다고 그랬지 하겄다고는 안했슈~”하는 상황과 똑같다는 이야기입니다.
4절부터 쭉 볼까요?
히브리서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벨은 믿음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겁니다. 믿는대로 행했더니 그가 죽은 이후에도 지금까지도 아벨이 성경에 기록되어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5-6절에서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하시는 증거를 받았다 라고 이야기하구요.
7절에 노아는 어떻습니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홍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령에 믿음으로 “방주를 준비”했기 때문에 그 집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8절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9절에도 나온 것처럼 약속의 땅에 거류하게 되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나온 모세는 어땠습니까? 27절부터 29절까지 보시면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고, 유월절을 지켰고, 홍해를 건넜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 “알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떠나고 지키고 건넌다는 행동의 동사로 표현이 됩니다.
30절에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도니까 성이 무너지고, 기생 라합은 믿음으로 영접했기 때문에 멸망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이 모든 말씀들이 증언하는 것은 먼저 믿었던 사람들은 믿는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믿는대로 말씀에 순종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믿음이 곧 믿는 대로 행하는 것이면, 결국엔 행함으로 구원받는 거 아닌가요?”하고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다. 보통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할 때는 “율법주의”를 경계해서 나온 말입니다. 율법주의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외식한다는 것은 겉으로만 꾸미는 행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믿음은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행동의 일치”가 믿음입니다.
11절에도 보시면 사라는 나이가 많지만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있어서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알고 행하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알고 행하고 소망하는 것

그리고 믿음은 “알고 행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Hebrews 11:6 NKRV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한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먼저는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 이것은 “앎”의 영역이죠?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알아야하구요,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찾는” 이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한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다음에 하나님을 “찾는” 행동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믿음은 하나님께서 상 주심을 믿는 것, 즉 “미래에 대한 소망”의 영역을 포함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이렇게 알고 행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주실거야”하고 확신하는 것까지가 믿음입니다.
노아를 다시 보실까요? 7절을 보시면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를 받아서, 방주를 준비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경고를 받아서 알게 되었고, 방주를 준비하면서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방주를 만들고 있는 동안에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니까 방주를 만들면 구원을 받을 것이란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노아의 믿음은 알고 행하고 소망하는 것이구요.
아브라함도 보시면 8절에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는 것을 알았다는 뜻이죠? 그리고 순종했다, 심지어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순종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죠? 10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 하나님의 계획에 소망을 두고서 행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26절에 보시면 히브리서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하나님께서 지금의 고난을 이기고 행하면, 약속의 땅에 들여보내주실 줄을 바라보고, 소망하고, 확신하고 나아갔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먼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알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행동과, 그리고 저희에게 상 주시는 이라는 것을 소망하고 확신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소망하는 부활

그럼 저희는 무엇을 소망해야할까요? 하나님께서 대체 어떤 상을 주시길래 상 주시는 이심을 바라고 소망해야하는 걸까요? 돈을 잘버는 것인지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인지 그러한 것들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가운데서는 실패한 사람, 혹은 벌 받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33절부터 38절까지는 믿음의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고 의를 행하고, 약속을 받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고 하지만 36절부터는 조롱과 채찍질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 그리고 입에 담기도 무서운 끔찍한 형벌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어떻게 쓰시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아브라함도 가나안 땅에서 살기는 했지만 직접적으로 소유한 땅은 아내인 사라의 무덤을 위해서 구매한 막벨라 굴과 그 주변땅이 끝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리라 하신 땅을 소유하지는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나그네이자 외국인으로 살았어요. 13절에 보시면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 즉 외국인과 나그네이지만 하나님께서 장차 자기 자손들에게 주실 땅이라는 것을 소망하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소망이 없고, 그냥 자기가 잘 먹고 잘 살 셈이었으면 자기 고향땅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15절에도 보시면 고향을 생각했으면 갈대아 우르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아브라함이 소망했던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6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함께 읽겠습니다.
Hebrews 11:16 NKRV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소망했던 것은 즉각적으로 자기가 가나안 땅을 다 소유해버리는 사람의 성공과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게서도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들이 노예가 되었다가 400년 후에나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아브라함은 사람의 시간과 계획을 소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과 계획을 소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향땅으로 돌아갈 수 있음에도 마지막까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남기로 결정합니다. 왜냐하면 진짜 자신이 돌아갈 곳은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에 있는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했다는 것입니다.
저희또한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35절에 나오는 말씀에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아했던” 사람들처럼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지성소의 휘장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소망하기 때문에, 저희의 영혼이 영원불멸하여 하나님과 영원히 함게할 것을 알고 소망하기 때문에, 저희는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믿음을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 말씀처럼 모든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 같이,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서 나타난 것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저희들은 알고, 행하고, 소망하는, 즉 눈에 보이는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결론

오늘 함께 기도하실 때에는 바로 알고 행하고 소망하는 믿음을 위해서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하나님 앞에서 “알겠다고 했지 하겠다고는 안했어요”하는 태도로 있었지는 않았나 한번 돌아보시면서, 저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구원해주셨음을 믿는 다고 고백하고, 성령님께서 이끌어주심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순종하는 알고 행하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기도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삶 가운데서 여러가지 어려운 일들로 인해서 믿음이 흔들릴 만큼의 역경을 겪고 계시거나 혹은 주변에 겪는 이들이 있으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주시는 상주시는 이심을 소망하는 믿음을 굳건히 해달라고 함게 기도했으면 좋겠구요, 특히 질병으로 인해서 고통받는 이들이 소망하는 믿음을 잃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어제 서울지방법원 앞에서 큰 소동이 있었는데요, 나라가 혼란스럽다 못해 국민들마저도 분열하고 난폭해지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러한 과격한 사태에 휘말리지 않고 저희는 저희의 믿음, 즉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행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믿음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또한 이 나라와 이 민족이 바로 그러한 믿음을 가지게 되서, 서로 다투는 것이 아니라 화해하고 사랑하여 하나님보시기에 좋은 나라로 바뀌어갈 수 있도록 기도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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