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금요성령집회 설교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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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마리의 번제를 드렸던 솔로몬이 천명의 이방여인을 품는 사람으로 변질된다.그의 말미는 왜 이렇게 되었 1 으며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Notes
Transcript
열왕기상 11:1-13
암송구절 :
레위기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 한강변 양화진에는 외국인 묘지가 있다. 선교사로 헌신하다 돌아가신 이들의 묘지이다. 그곳에 윌리엄 홀 박사 일가의 무덤이 있다. 그 무덤 앞에 세워진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쓰여 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8절의 말씀이다. 윌리엄 홀 박사는 한국에 파송된 의료 선교사들 가운데 최초의 순교자이다. 청일 전쟁의 화를 입고 난 뒤 평양 일대에는 무서운 전염병이 퍼지고 있었다. 이 나라를 삼키려는 중국과 일본의 야욕이 빚은 비극이었다. 홀 박사는 죽어가는 환자들과 부상병 치료에 열중하다가 그만 쓰러진 것이다. 또한 그의 아내 로제타 홀은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인 박 에스더 박사를 길러냈고, 한국 최초의 여자의학 교육 기관인 고려대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 여자의학 전문학교를 설립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점자 교육을 보급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들의 아들 셔우드 홀도 부모님의 뒤를 이어 의학을 공부하고 한국에 와서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치유하는 일에 헌신했다. 결핵 요양소를 운영하였고, 크리스마스 씰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 윌리엄 홀 박사 일가의 삶을 볼 때 묘비에 기록된 비문처럼 주님을 위한 헌신된 삶을 살았던 아름다운 인생인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이처럼 한 인생의 묘비에는 그가 어떠한 인생을 살아왔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인생은 시작과 과정도 중요하지만 그 마지막 또한 중요하다. 우리는 흔히 솔로몬을 지혜의 왕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다윗은 닮고 싶어하는 반면 솔로몬을 닮고 싶어하는 사람은 접하지 못한 것 같다. 왜냐? 솔로몬왕의 인생의 말미는 그렇게 닮거나 좋아할 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의 말미에는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물론 솔로몬이 노년에 기록한 전도서의 말씀을 보면 그가 회개하였을 것으로 유추할 수는 있지만 솔로몬의 인생의 말미는 하나님을 떠난 왕이라는 인식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중심된 이야기가 바로 오늘 본문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올바른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돌아보아야 할 것인가? 두 가지를 살펴보기를 원한다.

1. 하나님의 뜻 (말씀) 보다 나의 생각이 앞서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1-4절)

열왕기상 11:1–4 NKRV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본문의 말씀을 준비할 때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설교의 제목을 1,000 대 1,000으로 하려고도 했다. 무슨말? 일천마리의 번제를 드린 솔로몬이 일천명의 후궁과 첩을 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냥 지나갈 수 도 있지만 말씀을 준비할 때 이것이 주는 메시지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도대체 무엇으로 하여금 일천마리의 번제를 드릴 만큼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마음이 충만했던 솔로몬이, 어찌하다가 일천 명의 후궁과 첩을 두게 되었을까? 그냥 여자를 좋아해서일까? 아니면 왕으로서의 권력을 자랑하기 위해서 많은 여인들을 후궁과 첩으로 두게 되었을까? 그 시작을 보면 알 수 있다.
열왕기상 3:1 NKRV
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어 그의 딸을 맞이하고 다윗 성에 데려다가 두고 자기의 왕궁과 여호와의 성전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의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니라
애굽의 왕 바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 이는 그 여인을 사랑해서가 아닌 다른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정치적 결혼’이었다.정치적으로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염두해 둘 때 정치적 목적을 둔 ‘정략 결혼’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실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이러한 선택 자체는 비판받지 않아도 되는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은 달랐다.
신명기 7:2–4 NKRV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출애굽기 34:15–16 NKRV
너는 삼가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하게 섬기며 그들의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제물을 먹을까 함이며 또 네가 그들의 딸들을 네 아들들의 아내로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네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을 하나님께서는 금지하셨다. 그런데 사실 이 이방여인들의 범주에 애굽여인은 해당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방 여인의 범주는 후에 차지하게 될 땅인 가나안 땅에서의 ‘가나안 여인’과의 결혼을 금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왜 성경은 솔로몬의 신앙의 쇠퇴를 이야기할 때 그 시작을 ‘바로의 딸 외에’라는 표현을 쓰면서 많은 이방여인들과의 결혼을 한 솔로몬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그것은 그것이 시작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신앙이 가장 뜨거웠던 때라면 언제일까? 열왕기상 3장의 그 때이지 않을까? 기브온에서의 밤에 꿈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다. 그리고 지혜를 구한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는 덤이요 전에도 후에도 없는 엄청난 부귀와 영화를 약속하신다. 그런데 이 때 이미 솔로몬은 ‘애굽왕 바로의 딸과 혼인 관계를 맺은 상태’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를 책망하지 않으신다. 왜? 애굽을 의지함보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더 컸기에 애굽을 의지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솔로몬이 애굽을 의지하기 위해 정략결혼을 함에도 불구하고 애굽을 의지할 필요가 없는,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크신 지혜였기 때문이다. 즉 애굽보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더욱 컸기 때문이다.
열왕기상 4:30 NKRV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그리고 실제로 젊은 솔로몬은 많은 이방인들과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 섬기는게 가능했었다. 그런데 본문 4절 말씀 보면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게 불가능해지는 사리 분별이 되지 않은 상태가 됨을 보게 된다. 솔로몬이 젊고 힘이 있을 때는 상관없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여인들이 입김이 영향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남자들이 나이 들어감에 따라 여성분들 목소리가 커지지 않는가? 왜 아무말 없으신가? 우리집 이야기 아닌 것 처럼.. 우리 부모님 보니 그렇더라. 어린시절 기억에는 어머니는 매우 조용하시고 묵묵히 아내로서의 내조에 열심이셨던 분 같았다. 주로 아버지가 진두지휘하시고 결정하시고 그랬다. 그런데 어느날 보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집에서 아버지의 소리보다 영향력이 있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말에 아무 소리도 못하시더라.. 어머니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 시작한다. 남자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런 것 같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정략결혼을 해서 많은 부를 얻고 국가적 이익을 얻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여겼다. 그리고 나아가 우상을 섬기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솔로몬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많을 때에’ 그 때가 왔다. 그리고 유혹에 넘어가버렸다. 이방여인들에게 마음이 빼았기는 때가 오고야 말았다. 이것을 알기에 본문은 1절의 시작을 일부러 ‘바로의 딸 외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의미는 바로의 딸과 결혼을 했어도 하나님을 잘 섬겼던 솔로몬이 이후에 이방여인들과의 결혼을 서슴지 않고 천명까지의 후궁과 첩을 얻게 이었으며 그 결과 정략결혼이라는 명목으로 시작했지만, 이후 그것이 오히려 솔로몬의 마음을 빼앗아 솔로몬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죄와 유혹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는 것이다. 솔로몬이 이러한 많은 여인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결혼이라는 중요한 지점에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했던 이유는 솔로몬 자신의 뜻과 필요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을 압도해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는 길을 선택한 후 당시에는 문제가 없는 듯 하지만 그 불순종이 솔로몬의 목을 죄는 유혹으로 돌아온 것이다.
솔직히 이스라엘이 세상 나라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 다들 그렇게 하고 그러한 세계관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고, 하나님주시는 평안함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처음에는 필요에 의해 정치적 결혼을 하였을 지언정, 결국 그 시작은 솔로몬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하였다. 시작이 무엇인가? ‘정략결혼’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보다, 하나님의 뜻보다 솔로몬 스스로의 필요에 따른 뜻과 판단이 더 앞섰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앞 세웠던 솔로몬은 결국 하나님께 책망을 듣고 타락한 지도자의 길로 걷게 된다. 그 결과 솔로몬 다음대인 르호보암에 와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되는 원인을 제공하는 왕이 되는 것이다.
[적용] 우리들에게 적용해보자! 아마 그 여인들이 솔로몬과 결혼한 처음부터 우상들을 들여오지 않았을 것이다. 빌드업이라고 하지 않는가? 조금씩 조금씩…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 솔로몬의 마음을 돌아서게 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힘을, 우리의 지혜를, 우리의 의지를 맹신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우리가 붙잡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이 과거에는 당연함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특별함이 되어 버렸다. 어떠한 결정을 내리게 될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택이 아니라 내 뜻과 생각을 앞 세우고 마치 그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라고 합리화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예배드리는 것’ ‘헌금생활’ ‘봉사생활’ ‘전도생활’ 안한다고 해서 구원을 못받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동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대부분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생각한다. ‘지금은 바쁘니까, 지금은 힘드니까, 지금은 어려우니까 나중에..’ 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작은 시작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보다 나의 생각과 뜻, 현실이 앞장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 당장에 티는 나지 않는다. 그러나 물코가 트이면 솔로몬 옆에서 솔로몬을 유혹했던 이방여인들의 속삭임이 솔로몬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였듯, 사단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부터 멀어지게 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0:12 NKRV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전서 1:25 NKRV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무너짐은 단번에 찾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거대하고 튼튼한 댐이라도 동전만한 구멍이 생기게 되면 그 댐이 무너짐은 시간문제인 것이다. 우리의 셈, 우리의 계산보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이 더 지혜롭고 강하다. 솔로몬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주변국의 여성들과 결혼하며 자신과 백성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멀어지게 했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깨닫게 한다. 신앙의 원칙에 충실하지 않을 경우, 바른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매일의 결정이 신앙을 지키는 데 중요함을 기억하며, 언제나 하나님께로 시선을 고정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2.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감각을 주의 해야 한다(9-10절)

하나님께서 일찍이 기브온에서 솔로몬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 복과 함께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셨다. 한 번은 지혜를 구할 때(왕상 3:5-14)였으며 또 한번은 성전의 건축이 마쳤을 때쯤(왕상 9:2-9)이었다. 둘 모두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만큼 강렬하게 솔로몬을 향하여 경고의 메시지를 주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솔로몬의 배교의 길을 걷고 있다. 엄청나게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하나님께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유혹의 늪에 빠져 그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솔로몬의 인생의 방향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7절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 8절 ‘이방 여인들을 위하여’
우상숭배를 위하여 솔로몬의 방향성이 맞춰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특별히 11절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라고 하시는 말씀은 단순히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의 차원을 지적하심이 아닌 솔로몬의 태도, 삶의 자세, 마음가짐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저 버림으로 우상에게 향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는가? 이러한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옴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회개하지 않는다. 아니, 반응이 없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각이 ‘무감각’해져 버린 것이다. 전에는 하나님께 엎드리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을 섬김에 온 마음과 생각, 중심이 다 드려졌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무감각의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솔로몬이 우상만 숭배함이 아닌 하나님도 같이 섬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우상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은 행위, 생명력이 없는 습관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솔로몬을 다스림이 아닌 우상숭배가 솔로몬을 지배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통해 많은 주변국가에서 솔로몬을 부러워하고 전에도 후에도 없는 막대한 부귀 영화를 누린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자리’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그 빛을 받던 감각이 무뎌지게 되었고, 우상의 길로 갔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와도 반응이 없는 ‘무감각’의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생명력으로 반응하고 있는가? 말씀의 폭포같은 풍요속에 살아가고 있다. TV에서는 기독교 방송, 유튜부에서의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 새벽, 수요, 금요, 주일 등 설교가 풍성하다. 그러다 보니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감흥이 없다. 지루하다. 들리지 않는다. 물론 설교자도 말씀을 기도하면서 말씀을 붙잡고 씨름하며 잘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아 언제 끝나나. 저렇게 하는거 아닌데. 어느 순간 말씀을 제단하고 판단한다. 그러다보니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이 분명 있으신데, 그것을 놓치게 되어 버린다.
그런데 이것이 단번에 오는가? 점진적으로 온다. 이게 사단의 방법이다. 처음과 달리 마음이 굳어버리고 무감각이 찾아온다. 솔로몬이 처음에 애굽왕 바로의 딸과 정략결혼을 맺은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강도가 커졌다. 결국 천명에 이르기까지 되지 않는가?
가랑비에 옷이 젖어본적 있는가? 처음엔 가랑비의 존재가 느껴진다. 그런데 계속 맞고 있다보면 어느 순간 옷이 젖어있다. 처음에는 옷이 젖어 불편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온 몸이 다 젖어버리게 되는 경우 비가 소나기로 쏟아져도 비를 맞음으로 인한 불편한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비올 때 축구를 해보니 그것을 느끼게 되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무뎌지게 한다.
우상숭배는 우리의 삶에 어떻게 다가오는가? 오래 간절히 바랄수록 우상이 되기 쉽다. - 팀 켈러 -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대량생산하는 공장이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우상숭배의 후보들이 된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이 채우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그 것이 우상이 되기 쉽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있을 때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들려와도 우리의 감각이 우상으로 인해 무뎌짐으로 반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음을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만약 정말 솔로몬이 참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다면, 돌이켜야 했다. 이 지경까지 가도록 두지 않았어야 한다. 그러나,, 패망의 길로 걷게 되고 그 결과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나누어지게 되는 원인을 솔로몬이 제공하게 된다. 이것의 시작은? ‘여인을 곁에 둔 작은 허용’이다. 그렇게 크지 않다. 남들 다 하는 것이다. 다른 국가들 다 하는 것이다. 심지어 주변에서도 괜찮다고 할 정도의 작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우상숭배의 시작이었다.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왕을 향하여 나라의 분열을 이야기하실 때에도 한 가지를 분명히 말씀하신다. 그것은 바로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왕과의 ‘언약’이다. 그 언약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솔로몬 세대에서는 분열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일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다윗과의 언약이 있었기에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완전한 언약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과 회복의 길을 약속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연약함과 죄됨을 우리는 벗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이 먼저 손을 뻗어서 부서진 관계를 고치기를 원하신다 - 팀 켈러 -
솔로몬이란 이름은 아버지 다윗이 지어준 이름이다. 솔로몬이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 따로 있다. ‘여디디야(여호와의 가장 사랑하는)’ 여호와께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인 솔로몬을 내치셨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한다. 패망의 길을 걸었던 솔로몬이 노년에 쓴 성경인 전도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계명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솔로몬이 말하지 않는가? 왜? 자신의 인생은 말미에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회개의 마음이 그 안에 담겨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가서도 그렇고 잠언도 그렇고 성경을 솔로몬은 기록한다. 패망의 길을 걸었던 솔로몬이지만 하나님은 그의 고백인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성경으로 삼으신다. 그리고 그 전도사를 통해 지혜자를 알 수 있게 하는 길을 내신다. 우리의 연약함, 부족함, 잘못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실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은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매일의 작은 선택이 우리 삶의 방향을 좌우한다.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을 향한 바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떠한 선택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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