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 달라고 하였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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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죽여 달라고 하였더니
제목: 죽여 달라고 하였더니
본문: 사도행전 13:26-30
본문: 사도행전 13:26-30
찬송: 35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찬송: 35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여는 기도>
<여는 기도>
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아가게 하시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의 문을 열며>
<말씀의 문을 열며>
지난 시간 우리는 세례 요한의 모습을 통해 참된 믿음은 무엇인지 함께 살펴 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삶 속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가림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드러나게 했던 참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새벽하늘의 별은 해가 떠오르기 직전 가장 밝게 빛나다가, 태양이 떠오르면 스스로 자신의 빛을 거둡니다.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예수님이 드러나실 때 겸손히 물러났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는 고백이 그의 삶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제 그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증언합닏. 특별히 26절을 보면 예수님을 “구원의 말씀”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수식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십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으며, 마침내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14 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는 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가장 귀한 구원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어떻게 증언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증언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알지 못하는 자들의 비극>
<알지 못하는 자들의 비극>
지난 주일 오후 찬양예배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요 5:38a)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본문과 깊이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27절을 보며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라고 말씀합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매주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말씀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도 그 광채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 놀라움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그들은 말씀을 읽으면서도 그 말씀 속에 담긴 생명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을 쌓는 것에 목적이 있었고, 자기 의를 드러내는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특별히 더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읽던 그 성경이 바로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모습입니다. 우리도 때론 이런 모습에 빠지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고,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는 일이 단순히 습관이 되어버릴 때, 우리 역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채 종교적 의무만 수행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주십니다. 본문 26절에서 바울은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더 이상 두루마리에 기록된 글자로만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걷고, 우리의 아픔을 나누시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분이십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고 계십니다. 때로는 이웃의 따뜻한 마음을 통해, 때로는 고된 일상 속 작은 위로를 통해, 때로는 말씀 묵상의 깨달음을 통해 우리와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단순한 종교적 형식에 머무르지 않고, 살아계신 예수님을 날마다 새롭게 만나며 동행하는 은혜의 여정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고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고난>
말씀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될 때에는 은혜가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그 결과는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본문 28절은 그 비극의 순간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행 13:28).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셨습니다. 빌라도도 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9a절은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이미 오래 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 53:5).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특별한 방식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어 가시되, 인간을 통해 그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앞서 행 13:22b-23 에서 나눈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면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다윗으로부터 시작되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셉도 이 일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잡히시는 과정에서도, 자기 욕심에 눈이 멀었던 가룟 유다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졌습니다.
참으로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들의 순종을 통해서도, 때로는 악한 사람들의 불순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마치 시골 길을 걸을 때 보는 것처럼, 한 밭에는 우리에게 양식이 되는 벼가 자라고, 그 옆에는 쓸모없는 잡초가 자랍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보시면서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벼는 우리의 양식이 되어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되고, 잡초는 뽑혀 하나님의 바른 심판을 보여주는 도구가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어떤 도구가 되기를 원하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유대 지도자들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악한 도구가 되기보다 마리아와 요셉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이루는 선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결국은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지식과 의로움을 자랑하던 그들은,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죽이는 데 앞장섰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교만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나는 괜찮다는 교만, 나는 다르다는 교만,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교만... 이런 교만이 우리 마음에 자리 잡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소망도 함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과 실수까지도 당신의 선한 뜻 가운데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멈추지 않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향한 겸손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이 시대에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살아있는 말씀의 증인>
<살아있는 말씀의 증인>
본문의 또 하나의 교훈은, 고난은 참된 생명에 이르는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30절은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 고난을 받고 거부당할 수 있지만,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역사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의 삶은 이 진리를 잘 보여줍니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했을 때, 많은 교회들이 히틀러의 압박에 굴복했습니다. 그러나 본회퍼 목사님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길을 선택했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기로 결단했습니다.
1939년, 본회퍼 목사님은 미국으로 망명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붙잡는 사람들을 향해 “만일 지금 내 동포와 함께 시련을 당하지 않는다면, 나는 전쟁이 끝난 뒤 독일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재건하는 일에 참여할 권리가 없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매주 주일예배 후 부르는 찬양이 바로 이 본회퍼 목사님이 생애 마지막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그 선한 힘이 우리를 감싸시니 그 어떤 일에도 희망 가득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서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이 찬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말씀을 따르다 죽음 앞에서도 고백한 믿음의 선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참 많이 혼탁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손해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 그 말씀은 오늘도 살아 역사하는 생명의 능력으로 드러납니다.
이제 우리도 본회퍼 목사님처럼 말씀의 선한 힘을 의지하여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 길이 때로는 어렵고 힘들어 보일지라도, 우리가 그 길을 선택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와 함게 하실 것입니다.
<말씀의 문을 닫으며>
<말씀의 문을 닫으며>
이제 말씀을 맺겟습니다.
시대의 혼란 속에서 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선한 영향력을 끼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이자 능력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세상의 이념이나 체제보다도 높은 곳에 있습니다. 그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나라이며, 그 말씀을 따름으로 인한 고난도 감당하는 나라입니다. 우리에게 본회퍼 목사님이 고백했던 것처럼 선한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은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우리 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도 그 선한 힘을 의지하여 이 시대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지라도, 말씀의 능력을 믿고 선으로 악을 이겨나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거둠의 기도>
<거둠의 기도>
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저희에게 귀한 말씀을 들려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그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은혜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저희가 말씀을 읽고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저희 안에 살아 역사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때로는 저희 안에 교만이 자리 잡을 때가 있습니다. 말씀의 지식은 있으나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저희의 연약함을 용서하여 주시고, 날마다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시대를 살아가며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이 있지만, 본회퍼 목사님처럼 끝까지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 선한 힘이 저희를 감싸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 힘을 의지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며 살아가는 저희 되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우리 중앙교회 모든 성도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옵소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그 말씀이 생명이 되고 능력이 되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