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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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중 계명)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중 계명)
신학자들은 시편 1편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내용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수직 막대기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시편 1편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에는 수직 막대기만 있는 게 아닙니다.
상하로 그어진 수직 막대기가 좌우로 향하는 막대기와 만나
십자가가 됩니다. 이 때 좌우로 뻗은 나무 막대기는
이웃과의 관계를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시편 사십일편이 바로 그 이웃과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시편 일편과 시편 사십일편은 시편 이편에서부터 사십편까지를
지탱하고 있는 책꽂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성경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보라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이중계명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먼저 사랑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중심적이지 않습니다.
영어로 ‘죄’라는 단어는 ‘Sin’입니다. S와 N 사이에 어떤 알파벳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I’가 있습니다. ‘I’는 자기 자신을 뜻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S와 N 사이에 있는 ‘I’을 가리켜 I-centeredness / Self-centeredness 라고 말합니다.
이를 번역하면 “자기 중심성”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자기 중심성에서 유발합니다.
우리 안에 진실된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자기 중심성을 역행하려는
의지를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화의 삶입니다. 비록 그 성화의 삶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기도와 말씀을 통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점진적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중심성을 탈피하고 타인중심성으로의 변화인 것입니다.
시편 1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수직적 사랑인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시편 41편을 통해 저와 여러분들은
이미 경험한 그 하나님의 사랑이
참 사랑인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가짜 사랑인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수평적 사랑인 이웃사랑인 것입니다.
만약 내 안에 하나님의 참 사랑이 없다면 본문 1절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시편 1편에서는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는 사람이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수직적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받아 누릴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누리게 되는 형통의 ‘복’ 또한 누리게 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시편 사십일편 일절에서 ‘복’이 있는 자는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수평적 사랑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가난한 자”라는 뜻은 물질적 가난을 가진 자들을 포함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약한 자들을 가리켜 말씀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문에 가까운 번역은
“연약한 자”일 것입니다. 본문은 ‘연약한 자들’을 ‘보살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보살피’다는
단어는 맹목적이고, 분별력 없으며, 이해심 없는 것과는 반대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분별하며, 지식과
이해를 동반한 ‘보살핌’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은 한정적이고 이 땅에는
도움이 필요한 수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지혜없는 자와 같이 남들을 도울게 아니라 고민하고 생각해서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잘 도와 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성령께서 도와야 할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용기와 배짱 그리고 지혜 또한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살피’단는 의미인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여러분 주변에 있는 연약한 분들을 보살 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시편 일편을 경험한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 맞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 사십일편의 말씀을 경험한 사람들은 더 복된
사람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편 일편을 통해 우리가 만난 하나님이 진실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시편 41편 말씀을 통해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구제를 열심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 같이 시편 일편을
경험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불신자든 신자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불신자들 중에서도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지식을 쌓아도 자신의 가슴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말하며 기부, 구제와 같은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있는 사람에 속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편 1편의 하나님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이 시편 1편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면
수평적 사랑을 잘 실천하는 아주 멋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안에 이웃 사랑에 대한
열망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이러한
답답함을 호소하실 수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진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웃 사랑이 쉽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고백을 하시는 분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는 모습에서 ‘희망’을 찾으셔야 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오늘 시편 저자도 자신이 주님께 범죄하였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고쳐달라고 호소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로 경험했다고 하여도 타락한 세상은 여전히 타락한 세상입니다.
그 세상은 타락된 문화, 가치관, 세계관, 사고방식등을 통해
저와 여러분들이 연약한 사람들을 돕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나부터 잘 살아야해! 세상에는 연약한 사람들이 사라져야해! 약육강식의 세상이잖아!
이와 같은 세상이 저와 여러분들이 연약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방해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시편 1편을 통해 여호와의 말씀을 경험하고 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여도
우리 안에는 옛 자아의 속성이 남아 구원 받은 이후에 새롭게 생겨난 새 성품과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바울은 이를 두가지 법이 자신의 내면에 존재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옛 성품이 새 성품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연약한 자를 돕는 일에
수동적일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시편 1편을 통해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지만
시편 41편을 통해 아직 그 사랑이 자신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탄식을 합니다. 그 탄식이 바로 ‘질병, 배신, 속병, 불안, 우울, 공항’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란 이중 계명을
준수했던 시편 저자의 삶은 분명 ‘복’을 받은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질병과 배신’이란
고통이 시편 저자의 삶을 흔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시편 저자는 자신을 ‘그’로 묘사합니다.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하는 듯 자신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시편 저자는 연약한 자들을 돌보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연약한 사람 같아 보입니다.
인생이 처량해 보이는 것입니다.
육체가 병들면 우리 영혼도 병들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편 저자로하여금 연약한
자들을 도울 수 있도록 병상에서 그를 붙드셨다고 말합니다.
“붙드셨다”라는 말은 높이 들어 올리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일으키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과거를 회상하며 슬펐던 기억도 떠올립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병상에서 들어 올려 다시 건강하도록 만들었는데
친구들은 자신이 병상에 누워있을 때 자신에게
영원히 일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그러한 말을 했던 친구들이 어떠한 친구였는지에 대해 시편 기자는 9절 말씀을 통해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시편 41: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자신이 신뢰하여 떡을 나눠 먹던 ‘친구’란 자신의 속 마음까지 털어 놓을 수 있는 아주 가까운
친구를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친구가 자신을 대적하여 ‘발꿈치’를 들었다고
말씀합니다. ‘발꿈치를 들다’는 표현은 말이 뒷 발로 주변에 있는 동물들을 힘차게 걷어 차는
이미지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즉 뒷 발로 힘차게 뒷통수를 때리고 도망가는 친구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입니다.
‘발꿈치를 들다’는 표현은 ‘배신을 한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 인물입니다.
그의 인생은 누군가에게 배신 당하고 자신도 누군가를 배신하는 인생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 계명의 말씀을 지키기 쉽지 않은
환경에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인생은 시편 1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경험했었습니다. 수직적 사랑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시편 41편에서는 시편 기자는 하나님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실천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신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왔지만 ‘아직’ 그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다. 라고
말하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실제 마음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을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의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 힘들게 끼어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즉 연약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돕기를 원하신다면 오늘 본문 후반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렇습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것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바라봐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뒤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도
쉬지 않고 일하셨던 하나님의 일 하심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시편 1편의 말씀을 경험한 인생이시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 곳곳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분명 있으셨을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그 은혜를 상기했던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과거 현재 받아 누리고 있는 그 ‘복’을 세어보았던 것입니다.
시편 41편 11절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인 것입니다.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궁극적으로 시편 기자는
질병에서 놓임을 받았던지, 골리앗을 무찔렀던지, 삶의 환경이 개선 되었던지, 아니면
심령의 평안을 되 찾던지 그 어떤 것도 좋으니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 누린 ‘그 결과’에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그것들 말입니다.
오늘 숨 쉬고, 건강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을 포함해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 그리고 지금 누리고 있는
그 모든 것들 말입니다.
물론 타인의 것들과 비교하면 자신이 누렸고 지금 누리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초라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저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표현이 바로 41편 11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저와 여러분들의 과거와 현재에 경험한 다양한 문제들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집어 삼켰습니까? 여러분들의 인생을 계속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있습니까?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문제들이, 그 원수들이 나를 이기지 못했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 결과를 통해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와 여러분들은 오늘도 이와 같은 고백을 해야 합니다.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별개야...
하나님만 사랑하면 되지 무슨 연약한 사람까지 돌보라는 말이야...
네가 연약하잖아. 내가 가난하잖아. 내가 더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잖아
그러니 넌 안돼 넌 할 수 없어....”라고 원수가 끝없이 우리를 절망과 포기의
자리로 이끌었지만
지금 우리는 여전히 연약한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낮은담교회는 여전히 낮은곳으로 시간과 물질을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11절 말씀인 것입니다.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행하는
그 이중계명을 통해 우리는 11절 말씀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