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함’의 기준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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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함

요한복음 10:14–15 NKRV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에베소서 2:10 NKRV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랑합니다! 꿈사땅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빌런이라는 단어를 아는가? 그렇다. 악당이라는 뜻이다. 반댓말로는 영웅이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 악당이 존재하는 목적이 영웅 캐릭터의 반대 역할을 하며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용기와 정의를 추구하는 영웅과는 반대로 악당은 이기심, 악의, 오만, 교활함을 나타낸다. 요즘에 빌런이라는 단어는 법을 어기거나 옳지 못한 행동까지는 아니어도 무언가에 집착하거나 특이한 행동을 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확장돼 사용된다고 한다. 그래서 집착의 의미로 커피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보고 ‘커피 빌런’이라고 말하거나 회사에서 민폐를 끼치는사람을 가리켜 ‘오피스 빌런’이라고 말한다. 추가로 분리수거 빌런, 도서관 빌런, 주차 빌런 등 이렇게 말한다. 반대로 영웅은 어떤 사람을 가리켜 말하는가?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공공의 이익을 위한 뜻을 이루는 사람이다. 대표적으로 이순신 장군이 우리나라에 아이언맨과 같은 분이시다. 외세에 맞서 싸우신 의병들과 대한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우신 열사들, 민주화를 위해 싸우신 열사들, 불이 났을 때 신속하게 생명을 구하시는 소방관, 동네의 치안을 담당해주시는 경찰관, 나라를 지켜주시는 군인들이 한국의 영웅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역사 속에서 참 애매한 영웅이 있다. 홍길동과 임꺽정이다. 이들은 도둑이긴 하지만 의로운 행동을 한다고 하여 ‘의적’이라고 부른다. 부패한 지배층에게 훔친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그러나 임꺽정은 죄없는 사람들도 많이 살해하고 다녔고, 홍길동은 자신이 정체가 들어날까봐 자신을 숨겨준 일가족들을 몰살시켰다. 지금 시대에서는 의적이 없는 시대이다. 왜냐하면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닌 범죄로 얻은 것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은 결국 불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길동과 임꺽정을 사람들이 좋아한 이유는 공권력이나 기득층이 부패해서 시민들이 오히려 온건한 범죄자를 원하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또 도적들이 의롭게 보일 정도로 국가운영이 막장이거나 상류층의 이미지가 더러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착하다’, ‘선하다’의 기준이 무엇일까? 사실 이 세상에서 ‘착함’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마다 착함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왜 착함의 기준이 다른 것인가? 이유는 다른 것이 없다. 나에게 좋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쟤도 좋고 나도 좋으면 좋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쟤도 좋고 다른 애도 좋은데 내가 안 좋으면 좋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느끼는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말을 듣는 사람이 착한가, 말을 지지리도 듣지 않는 사람이 착한가? 그렇다. 어떤 사람이든 내 말을 듣고 잘 따르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다. 내 말은 안 듣고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으면 나에게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독립운동가들이 우리에게 왜 좋은 분인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셨기 때문에 좋은 분이라고 한다. 반대로 일제시대에 대한독립의 반대세력에게 있어 독립운동가는 일제의 영토확장을 막은 나쁜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사회에서 절대적인 선의 기준, 착함의 기준이란 있을 수 없다. 각자 원하는 것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이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선하다의 기준이 분명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무엇인지 살펴보기 원한다.
창세기 1:9–10 NKRV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을 하라”라고 명령하시니 그대로 되었을 때 하나님의 평가는 어떠했는가?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좋다’라는 단어 히브리어로 토브라고 한다. ‘좋다’라는 뜻을 가진 것 뿐만 아니라 ‘선하다’라는 뜻도 포함한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더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모습은 바로 모든 만물과 세계가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순종하면서 움직일 때 비로소 ‘선하다’고 하나님이 평가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의 기준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선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특히 솔로몬의 시인 잠언에서 의인과 악인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언급된다. 의인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다. 반대로 성경에서 악인이라고 말하는 빌런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구약 성경에서 보게 되면 하나님은 여호수아 때 가나안 사람들을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전부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다. 이런 상황을 보면 왠지 하나님이 너무나 잔인하다고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강대국이었던 이집트를 꺾고 모세를 통해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 얼마나 강하신 분인지를 이미 세계에 소문이 쫙 퍼졌을 것이다. 그때 이스라엘에게 항복하고 돌아오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백성으로 맞아주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주는 기간은 여호수아가 정복 전쟁을 시작하기 전까지였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정탐하러 갔을 때, 라합이 여호수아와 정탐꾼들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숨겨주면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은 꼭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실제로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함락했을 때, 라합과 그녀의 가족들을 살려주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을 보면 이미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여호와가 이집트 제국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실 수 있는 강하신 분이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으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은 대가로 모두 진멸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구약 역사만 가리키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기 전 정복하지 못한 가나안 땅에 그가 죽고 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은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진멸시키지 않았다. 일을 잘할 것 같은 사람들을 남겨서 일꾼으로 썼다. 매우 합리적으로 보였던 그들의 행동의 결과는 달랐다. 그에 따른 대가로 사사시대가 들어와서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만드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반드시 선하신 뜻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오늘날에도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 이스라엘의 1대 왕이었던 사울에게도 마찬가지로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이 사울에게 아말렉 족속을 모두 진멸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심지어 어린 아이, 갓난 아기와 가축까지도 모두 진멸하라는 것이었다. 그때 사울은 아말렉의 군대는 모두 무찔렀지만, 아말렉의 왕이었던 아각은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다. 그리고 제일 좋은 양과 소와 양뿐만 아니라, 그 밖의 모든 좋은 동물들도 살려주었다. 사울은 약하거나 쓸모 없는 동물들만 죽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기로 한다. 사울의 변명은 좋은 가축들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살려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이었는가? 아말렉 사람도 가축도 남김없이 모두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조금 불순종한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거역한 것과 같다.
사무엘상 15:22–23 NKRV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하나님은 아무리 예배를 온전하게 드리고,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더라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예배는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99% 순종한다고 하더라도 1% 불순종하면 무엇인가? 불순종이다. 하나님은 순도 100%의 순종을 기뻐하신다. 사무엘이 불순종을 무엇이라고 평가하냐면,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점치는 것과 우상에게 절하는 우상 숭배하는 것만큼 나쁘다고 말한다. 그러니 성경에서 말하는 ‘선함’의 기준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인정하는 착한 사람, 선한 사람, 의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중에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전도사님,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이 봉사활동이나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선한 것인가요?”라고 물어볼 수 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 가지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한국 국가대표 선수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대회를 나가서 금메달을 받으면 어느 나라가 좋은 것인가? 우리나라와 상관이 없고, 캐나다에게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 안에서가 아닌 하나님 바깥에서 행하는 선행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이 아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하는 봉사활동이나 기부나 여러 좋은 일들을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결국 자기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스스로 선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다. 죄인이라고 함은 하나님을 찾을 수도 알 수도 없는 영혼이 완전히 죽은 상태를 말한다. 그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아무리 하나님 없이 열심히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은 다 헛수고가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이뤄지는 선행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선행이다. 왜냐하면 내 안에 착한 마음을 주시는 분이 누구라고 고백하기 때문인가? 성령님께서 주셨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그러면 이 고백은 누구를 드러내는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되는 것이다.
오늘 요한복음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밝히신다. 왜 예수님은 선하신 분이신가? 첫 번째로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선 그 자체이시다. 두 번째로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오직 누구의 뜻대로 순종하셨는가? 자신의 뜻이 아닌 성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 가운데 오셔서 모든 일들을 행하셨다. 그것도 순도 100%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는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어 구원 받게 하기 위함이다. 온전히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신 분이 우리의 목자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시는 분이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그 친밀한 만큼 양 떼인 우리를 안다고 말씀하신다. 그 양도 예수님을 알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양 떼들과의 관계는 아버지의 아들과 같이 깊은 관계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는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왜인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버릴 만큼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 왜인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기 목숨을 버릴만큼 큰 사랑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이다.
에베소서 2:10 NKRV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왜 창조되었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무엇을 하기 위해? ‘선한 일’을 위해서 지으심을 받았다고 한다. 이 일이 무엇인가? 누구의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이 일은 하나님이 이미 오래 전에부터 계획하셨는데, 예수 안에서 그 일을 하게 하려 하셨다는 사실이다. 착한 일을 하게 하시는 분이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착한 마음을 주시는 분도 누구이신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사랑하는 꿈사땅 여러분. 하나님의 속성 중에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속성은 저번에 함께 나누었던 거룩과 오늘 나눈 선함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목자라고 비유하고 우리를 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른 것이 없다. 양은 목자의 품에서 벗어나면 죽음은 곧 시간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떠난 인생은 영원한 죽음과 멸망 앞에서 시간 문제이다. 선하신 주님은 여러분을 영원한 생명 가운데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따라가려면 누구의 음성을 들어야겠는가? 성경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보아야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알 수가 있다. 한구절이라도 성경을 펴서 읽어보기를 원한다. 또 하루에 5분이라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십자가 사건에 감사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최고의 인생의 여정들을 준비하셨음을 믿고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우리는 이해가 안되더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냥 덮어두고 믿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분명한 성경 역사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망했는가? 망할 것 같은 위기가 무수히 많아도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은 존재한다. 2000년 교회가 망했는가? 세상에서 어떻게든 교회를 망하게 하려고 수많은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는 지금까지도 존재하고 오늘도 함께 그 위대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신하려고 하고 제멋대로 행하려고 하는 양 같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택한 백성은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것을 기억하시라. 여러분 인생 절대 버려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의 인생 책임지신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걸어가길 소망한다. 함께 선포하길 원한다. “God is Good, All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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