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126 주일오후예배: 시편 145:3;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7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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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기도하시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145:3 입니다. 짧지만 한 절의 말씀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을 보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7문입니다. 제가 질문을 하면 같이 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7문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며, 존재와 영광과 복되심과 완전하심에 있어서 본래 스스로 무한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족하시며, 영원하시며, 불변하시며, 불가해하시며, 어디든지 계시며, 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아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지혜로우시며, 지극히 거룩하시며, 지극히 의로우시며,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며, 선하심과 진실하심이 풍성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주일오후예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날씨가 이제 예전보다 많이 따뜻해진 것 같습니다. 얼어붙을 것만 같던 추위도 이제 조금씩 풀리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 모든 자연의 순리는 자연의 법칙대로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운행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들입니다. 우리를 추위로부터 지켜주시고 이렇게 추위 속에서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오후예배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지난 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첫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살펴봄으로써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통해 자신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셨으니 우리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하나님을 찬송하는 재료로 사용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셨으니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속성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하나님의 “불가해성”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이해”라는 단어는 사소할 수도 있지만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해가 되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취급하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심지어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도 “이해”라는 요소는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아무리 서로가 잘 맞아서 사귀고 결혼했다고 하지만 우리는 상대방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이해의 차이부터 시작해서 각자가 살아온 환경과 경험의 차이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상대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내 관점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이해가 안되네..”, “이상하네”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지식이나 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떤 지식을 받아들일 때 우리가 머리 속으로 사고 회로를 돌려서 그 지식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을 받아들이기를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해를 요구하고, 이해를 하기 위해 설명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설명을 듣고 한다고 하더라도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이해가 되지 않거나 틀린 말 같으면,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아. 일단 알겠어.”라고 넘기거나 찝찝해합니다. 우리가 뉴스와 다른 TV 프로그램, 그리고 유튜브와 같은 매체를 통해서 어떤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거나 재밌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공통의 경험을 했거나 그 사람과의 공통된 지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하고,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는 매체를 재밌어합니다. 우리가 친구나 친근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왜 있습니까? 그 사람들과의 공통의 경험과 이해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히 “이해를 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는 이해를 하고 어떤 지식을 규정해놔야 편안해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우리는 우리의 언어와 표현으로 어떤 지식에 대해서 규정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개미의 몸의 구조가 머리, 가슴, 배라는 세 부분으로 되어있다는 것으로 규정하여 개미의 몸에 대해서 우리는 이해하고 있다고 여기고 이것에 대해서 편안함까지도 느낍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라는 요소는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영향을 끼친다는 겁니다. 우리는 첫째로 우리는 설교와 말씀을 이해하길 원합니다. 설교와 말씀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길 원하고, 무슨 뜻인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표현으로 들려주길 원합니다. 이것이 나쁘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부분을 한번 짚어보자는 겁니다. 그리고 둘째 우리는 최종적으로 설교와 말씀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길 원합니다. 그래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즉시 나의 삶에 적용하길 원합니다. 그래서 이해라는 요소가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 것마냥 여기고 생각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저는 이전에 신학, 특히 개혁주의 신학을 접하고 공부를 했을 때 신학이 가져다주는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렇다면 저의 모습에서 나와야 될 모습은 하나님을 이해하니 하나님을 닮아 겸손과 온유, 그리고 사랑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나타나는 모습은 오히려 “교만”이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을 깔보았고, 그 사람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교만이 있었습니다. 왜 이런 모습이 저에게서 나타났던 것일까요?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을 이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소유하고 있는, 소위 사유화하여 마치 하나님에 대해서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개혁주의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 전통이 가져다주는 엄청난 유산이 인간의 죄와 융합되어 나타나는 돌연변이와 같은 현상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이해하고 안다는 엄청난 지적 유희에 휩쓸려 자만하는 모습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을 이해하고 잘 안다고 여겼던 저의 모습은 깨지게 되었고, 지금도 신학 공부를 이어가고 있지만 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드는 저의 생각은 아직까지 하나님을 “잘 모른다”입니다. 그분에 대해서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몰랐던 부분들이 너무 많고 아직까지 알아갈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잠시 제 이야기를 꺼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불가해성”입니다. “불가해”라는 말의 뜻을 정확히 알아야 하는데요. 우리가 피해자, 가해자 할 때의 그 가해의 뜻으로 하나님을 해칠 수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 “불가”, “해”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사이에는 엄청난 질적인 차이가 있으며 존재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까 개미를 예시로 들었으니까 다시 개미로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개미 한 마리가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이 개미는 박사 학위 10개가 있는 아주 똑똑한 개미입니다. 개미 세계에서는 가장 똑똑하다고 할 수 있는 개미입니다. 그런데 아주 똑똑한 이 개미가 사람인 우리를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개미와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미는 우리 인간을 불가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피조물과 피조물 사이에서도 이런 엄청난 질적인 차이가 있는데,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사이에는 이보다 더 큰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쉽게 말해 과학적으로 이야기했을 때 점을 하나 찍고 다른 곳에 점을 하나 찍어서 그것을 연결하면 선이 됩니다. 이것을 1차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점을 네 개를 찍어서 선으로 연결하면 면이 되고, 그것을 2차원이라고 합니다. 선과 선을 연결한 것이죠. 그리고 면과 면을 연결해서 입체로 만들면 그것을 3차원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의 차원에서는 3차원이 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3차원 세계에서의 사고방식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3차원의 세계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라 무차원적이고 비차원적인 존재이십니다. 성경에서만 봐도 하나님은 시간과 시간을 넘어다니시는 분이시며 그분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분이십니다. 그분은 시간과 공간에 우리와 같이 얽매어 있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부분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대교리문답에 나와있습니다. 인간은 육체를 반드시 입고 있고 우리의 육안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며 보이지 않으십니다. 또한 인간은 유한하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무한하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스스로”라고 고백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기원이 없는 “스스로”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디에 의존하지 않으시지만, 인간은 반드시 어딘가에 의존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하나 하나 다 살펴보면 좋겠지만 시간상 그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 하나 다 따지면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엄청난 질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대교리문답에서도 하나님을 “불가해”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서도 다윗이 이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라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도무지 측량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른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욥기 26:14 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이것은 욥이 친구들을 향해 하는 말인데요. 보십시오. “이런 것들”이라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놀라운 것들을 말하지만, 이것들은 무엇이다?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다”, 더 정확하게는 “끝부분일 뿐이다.”, “외곽에 불과하다”라며 하나님의 무궁무진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사야 55:8-9 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인간의 생각과 길과 다르고, 하나님의 길과 생각은 인간의 길과 생각보다 높아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하나님께 죄를 지은 죄인인 인간인 우리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애초에 하나님을 알기는커녕 하나님이라는 존재 자체를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로마서 1 장에서 사도 바울은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었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애초에 알려고하지 않고,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던 존재가 바로 우리였습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고린도전서 1:25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아무리 사람이 지혜롭다고 한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사람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의 간극은 엄청난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만 놓고 봤을 때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접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어떻게 알리셨습니까? 우리가 그분을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사고방식으로 자신을 낮추심으로 알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도적으로 낮추셨음을 의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했듯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엄청난 질적인 차이가 있어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도 충분히 자신을 알리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교할 순 없지만 이해하기 쉽게 덧셈과 뺄셈도 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방정식과 함수를 가르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을 알리신다고 해서 그분에게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지 절대 선이신 그분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긍휼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으로 자신을 낮추셔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성경이고 우리는 이 성경과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해하고 알아갑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과 설교를 통해 자신을 알리셨다고 하지만, 이것을 통해 하나님 전부를 우리가 이해하고 알아갈 수 있다는 착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말하는 다양한 이름들이 있습니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 라파, 여호와 닛시, 여호와 샴마 같이 구약에서 나타는 하나님의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위와 사역에서 나온 호칭들일 뿐입니다. 그 이름 자체가 하나님 자체를 표현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이름으로 하나님을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그나마 하나님을 담기에 가장 정확한 이름은 한글 성경에는 “여호와”라고 번역된 이름, 더 정확하게 발음하면 “야훼”라는 이름입니다. 바로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하나님께 여쭈었을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가르쳐주신 그 이름입니다. 그나마 가장 하나님을 담기에 가장 적합한 이름인 여호와도 하나님을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성부, 하나님, 주님과 같은 호칭들도 그분의 실제적인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대교리문답에서 고백하듯이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인위적으로 나타나게 만들 수도, 행하게 만들 수도, 보여질 수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성경에는 많은 이름들이 나와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보십시오.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존성을 말하는 것이고,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능력에 대한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가 아니라 어떤 분이 아닌가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피조물인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들로 하나님을 말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들 들면 하나님은 유한하지 않으시고, 한계가 없으시며, 죄가 없으시며, 거짓말하지 않으시고, 불완전하지 않으시며, 변덕이 없으시며, 후회하지 않으신다는 등등이 있다는 겁니다. 이처럼 피조물인 우리가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만큼으로만 말할 수밖에 없다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이해의 저 너머에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게 더 정확할 정도입니다. 자신에게 고난이 찾아온 것을 이해하지 못한 욥에게도 하나님의 답변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이런 이런 이유 때문에 너에게 고난을 주었단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가 지혜를 아느냐”라며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큰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욥의 반응은 이것이었습니다. 욥기 42:3 입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의 반응은 하나님에 대해 자신이 무지했음을 깨닫고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라며 하나님을 자신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자신을 알리셨지만,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낮추신 것에서 기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완벽히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가 온전히, 그리고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주신만큼만, 자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드러내신만큼만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저번 시간에 배웠듯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이전에는 자연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을 우리에게 필요한만큼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도 자신들에게 필요한만큼만 계시하신 그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짓고 난 이후에는 이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불가능해졌으니 사람은 자연스레 죽음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대로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두셔도 그분에게 손상이 가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를 지은 것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셔서 특별계시를 통해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선상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은 그야말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혀 그럴 필요가 없으십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을 우리만의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 수 있는 그 어떤 능력과 같은 것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감성과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와 표현들로 자신을 계시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사역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불가해성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지점은 하나님을 불가해하다는 것은 100프로 우리의 관점에서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유한인 인간이 무한이신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인 우리의 관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을 완벽히 이해하십니다. 특별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삼위로 계신 하나님께서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자신을 완벽히 이해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2:10 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특징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 분, 즉 하나님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아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을 완벽하게 잘 이해하고 계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을 완벽하게 아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국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잘 알지 못한다는 결론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완벽하게 우리가 이해한다면 우리가 곧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결코 이해할 수 없어야만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유한한 인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불가해하십니다. 우리의 머리와 이해, 그리고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주신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항상 신앙고백을 정립할 때 하나님을 우리가 이렇게 이렇게 규정하자는 의미로 신앙고백을 만든 것이 아니라 순응과 찬송의 대상으로써 신앙고백을 남겨주었습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신앙고백이라는 아주 귀중한 유산들은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정리해놓은 것이지만 결국 마지막은 찬양으로 끝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리 이렇게 잘 정리해놓았다고 하더라도 이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표현으로 담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우리의 신앙고백 중에 “칼케돈 신조”라는 것이 있습니다. 칼케돈 신조는 예수님께서 참 사람이시자 참 하나님이심을 정립한 신앙고백입니다. 칼케돈 신조 중 일부분이 아까 말한 “하나님은 ~이 아니다”라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제가 일부분을 가져 왔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유일하신 그리스도이시며, 성자이시며, 주님이신, 독생자께서 두 가지의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데, 이 둘은 혼합되거나, 변화되지 않고, 또한 분할되거나, 분리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본성은 인성과 신성, 즉 사람과 하나님이라는 본성을 말합니다. 칼케돈 신조는 예수님께서 사람과 하나님이라는 두 본성을 지닌 분임을 고백하면서 이 둘이 혼합되거나 변화되지 않고, 또 분할되거나 분리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이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으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이해를 받으실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께 순응하고 찬송을 드려야 할 대상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불가해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45편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찬송의 대상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것을 알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역과 그분의 위대하심을 찬송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성도들에게서 나타나는 바른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무나도 친절하게 자신을 우리에게 필요한만큼만 알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인가 심오한 것을 말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그 유명한 교부인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인가 심오한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인간의 음성으로 겸손히 그분을 섬기는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이신다. 또한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입술과 말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즐거워하기를 바라신다.”
어거스틴이 한 이 말 참으로 그렇습니다. 성경만 봐도 우리가 하나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해서도 안되는 아주 큰 간격이 있는 존재임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언어와 표현으로 찬송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시편 88편에서 시인이 주님께서 자신을 흑암에 두셨다고 고백하며 자신에게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찾아온 것을 투덜대는 그 투덜거림도 그럼에도 고난 속에서 자신을 의지하고 있다는 그 발버둥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시편 88편을 남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께 순응하고 찬송을 드려야 하는 대상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도, 이해해서도 안되는 존재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만큼 자신을 알려주셨습니다. 자신을 알려주심으로 우리는 그분께서 알려주신만큼 알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을 알아감으로 우리는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불가해성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첫째로는 겸손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소유하고 사유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분 앞에서 항상 두려움과 겸손함을 가지게 됩니다. 말씀과 설교를 통해 자신을 알려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지며 그분의 말씀을 받들게 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분께서 친히 자신을 낮추심으로 알려주셨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도 자신이 남들에게 이해받고 싶고, 남들이 나를 이해해줬으면 하기 보다는 우리는 서로가 자신을 낮춰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알아가는 것에 힘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당연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이해하고 알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렵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은 친절히 자신을 우리의 언어와 표현으로 알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성경과 설교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그분을 찬양하는 것을 기쁨으로 누리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불가해성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공통의 기도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을 알려주신 분이심을 말씀을 통해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입니다. 이 시간 같이 기도합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에 힘쓰는 신실한 성도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고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에 힘쓰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하나님을 알아갈 때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게 되어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리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이 시간 이 기도제목들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에게 말씀을 주시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이해와 생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희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저희에게 자신을 계시하심으로 저희는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에 힘쓰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놀라우심에 경탄하여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는 신실한 성도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 그 성령 하나님께서 저희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날마다 가르쳐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