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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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기쁨을 누리라

우리 삶은 고통이 있으면 피하고 기쁨이 있는 곳을 찾고자 하는 건 인지상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쁠 때 들으면 다 좋은 말씀이지만 지금처럼 현실이 영화보다 고통스러울 때는 하나님의 말씀은 오히려 책망하는 듯하고 위로가 없는 듯 합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는 시편에 너무나 잘 드러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도움이 된다면 바로 시편을 가까이 두고 자주 읽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에 한 편을 설교하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만 이는 잠시의 분위기 전환의 효과가 좋다라고 할 수 있겠죠. 자주 옆에다 두고 읽어서 시인의 마음을 따라 갈 때야 비로서 평안을 되찾고 기도할 수 있다 말씀을 드립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지 말고 말씀 안에서 분명 주시는 위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설교자가 찾아 알려 드리고 싶으나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 느끼는 바가 서로 다르듯 다를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마음의 경계를 넘을 때는 마치 스물스물한 경험이나 순간 무엇인가 스쳐가는 듯한 기운을 받을 때 그런 부분을 놓치지 말고 말씀에 하이라이트를 친다던가? 순간 메모를 한다던가 함으로 기억해 두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된다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은 앞선 3장까지의 경고의 말씀에 이어 회복의 말씀을 다룹니다. ‘끝날에’로 시작하는 말씀은 한편으로는 끝이 있다는 소망을 줍니다. 고통받는 이들에게 ‘끝이 있다’는 메시지가 그런 것이죠. 고통의 끝이 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대한 기대는 무엇인가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물론 반대로 잘 나가는 상황이라면 ‘끝이 있다’는 일종의 경고가 되는 것이죠. 그러니 경고망동하지 말고 끝이 있는 것을 묵상하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 이미 예루살렘 주변의 성들이 함락되고 이제 예루살렘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선지자의 경고는 아픈 데 기름을 끼얹는 말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미가는 절말의 메시지만을 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는 메시지는 늘 책망 가운데 회복이 있다는 점을 기억하셨으며 좋겠습니다.
끝날에/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선다는 표현을 보시면 어디선가 숨은 듯 벌어지는 사건이 아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드러내놓고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오심은 우리 눈에는 작은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여러분들은 동박의 박사가 등장하고 천사들이 등장하는 말씀과 함께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말씀을 들으며 내 삶에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끝낼 시간은 언제인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잠시 나의 문제를 접어두시고 예수께서 나신 사건이 정말 미가 선지자가 말하는 ‘그 날’인가? 그날이 그런 날이라는 선포가 맞다면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는 방향으로 시선을 두시면 좋겠습니다.
그날에 2절은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지금 미가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방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앞선 3장 12절은 시온이 훼파되어 수풀이 자라는 모습으로 끝났지만 그 날에는 다시 하나님의 성전이 높은 산에 등장할 뿐만 아니라 많은 이방 사람들이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태어나신 사건은 동방박사의 경배를 보여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소수에 불과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최고의 것으로 아기 예수께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이 이르면 ‘많은 사람으로 소개되는 이방 사람들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하나님의 전’에 대한 경외이며 두 번째가 ‘그의 도를 가지고 가르치실 것’이라는 것이며 이어 세 번째가 ‘ㄱ의 길로 행하리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시편의 60편 이상을 받아 보신 분들은 이해할 수 있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러분들은 그렇지 못했기에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이 시편이다는 명제는 일부는 맞지만 일부는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편은 나를 괴롭히는 저 사람을/ 저 세력을 저주합니다. 망하게 해주세요라는 내용이 있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내 몸이 병들어 아프다, 고통스럽다는 절규가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잘되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우리가 대부분 잘 아는 내용이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중요한 표현이 ‘여호와의 전’, ‘여호와의 도’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 마음을 토로하는 것이지 신학적인 내용을 열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프면 아픈대로, 고통스러운 고통스러운대로, 상황이 그렇다면 그런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는 자기를 보는 과정이자 자기를 하나님께 보여 드리는 과정이 기도인 것이죠. 그러나 기도는 그렇게 끝나는 한탄이어서는 안 된다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시편은 그걸 어떻게 아느냐 할 때 ‘여호와의 전’에서 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서 알게 된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전에 가는 행위로 아는가 하면 그건 아닙니다. 여호와의 전을 사모한다 왜냐하면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고 그 말씀만이 나의 사정과 상황을 책망하고 회복하고 나아갈 길을 알려준다는 것을 시편에 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4장은 일종의 시편인 것이죠. 앞선 상황은 예루살렘이라는 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그곳에서 엄청난 제사의 형식이 벌어졌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 나와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원칙이 작용합니다. 이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도 에덴 이라는 동산에 중심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 나무가 함께 있었죠.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말씀은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과 생명이 동산 중앙에서 흘러 나오는 이미지가 성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하지만 공의와 인애를 저버린 백성에게 성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지 못하는 곳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성전의 기능이 상실되었다는 것입니다.
앞서 미래를 말해야 하는 가르침이 없는 상태 즉 말씀을 받은 자들이 자신의 입을 위해 예언을 하지만 캄캄한 상태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4장은 오히려 ‘많은 이방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깨닫고 여호와의 전이 있는 꼭대기를 향하여 가자, 듣자, 그렇게 행하자라고 말하는 놀라운 장면을 미가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며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래서 다시 예루살렘을 향하는 ‘백 투 더 예루살렘’이라고 말합니다. 의미는 좋은데 여기 예루살렘을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비록 휴전을 향하고는 있지만 전쟁 중에 있지 않습니까? 일부의 사람들은 복음이 전 세계를 한 바퀴 돌아서 발원지인 예루살렘으로 다시 들어가면 종말의 시대가 온다라고 미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싸하죠. 이는 맞고 틀리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난 1년 넘게 우리가 살펴본 요한복음의 말씀과 지금의 선지서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은가를 비교/묵상해 보시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런 시대가 일어나면 평화가 찾아온다는 말씀이 3절에 기록됩니다. 그런데 시작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고 ‘판결’이 이루어 집니다. 평화의 시작은 ‘정의’를 행하는 이후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평화는 그래서 주어지는 것 같아도 평화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옳다’는 보편적인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는 이방 사람들 즉 복음에 소외된 이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이 옳다는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일어난다는 것이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고 판결’하시면 이어서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든다’ 그리고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다’고 선포합니다. 평화는 그렇게 찾아옵니다. 지금 세계는 무기에 의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의 경제적인 무장은 이미 전 세계를 또 다른 긴장으로 이끌었고 결국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이 전쟁을 일으키는 상황까지 왔습니다.
미국만을 생각하고 정책을 펼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지 다시 세계는 요동치고 있습니다. 덕분에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와 휴전을 그리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휴전 상황을 염두해 두고 있는 이유도 경제적인 이익 또는 통제로 인한 것이죠. 전쟁의 시대가 무기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뒤흔들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4절에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는 상황은 목가적인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의 필요를 따라 빼앗기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이죠. 앞서 사람들은 꾀를 내어서 더 많은 이익을 취하고자 했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고발하셨던 내용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포나나무, 무화과나무’는 자신의 것을 활용하여 ‘일용할 양식’을 취해도 가난하지 않는 삶, 타인을 해치며 차지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의 평화가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6절부터 다시 등장하는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라고 표현하는데 특히 ‘저는 자’ 즉 가장 약자로 배척을 받은 이들이 제일 먼저 등장하는 데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로 다시 시작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멀리 쫓겨난 자들도 다시 강한 나라가 되게 하신 후에 다스리겠다고 하십니다. 앞서 무기가 농사를 짓는 변혁이 일어났는데 다시 강한 나라가 일어난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와께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다스린다’하면 달라지는 것이죠. 그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가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회복된다’는 메시지가 누구에게 먹히느냐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발을 저는 자’ 고통받는 자들, 꾀를 내어 당할 수밖에 없는 약한 자들에게 보다 큰 의미 전달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여전히 종교 지도자들, 부를 손에 쥐고 꾀를 내는 자들이 그렇게 될가요? 글쎄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진정한 평화는 어른 시대에는 남한과 북한이 통일을 이루는 개념으로 이해했다면 응원봉을 들고 나온 세대들의 평화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을 응원하고 줄 서서 굿즈를 사고 그들이 잘되는 일에 계엄의 통제가 없어지는 것, 그것을 방해하는 잘못된 민주주의가 바로 서는 것이 평화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 거리에 등장한 재밌는 프랜카드들 현실에서 만끽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평화는 통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북한도 나름의 삶이 있으니 그렇게 살면 되고 서로가 무기를 자랑하지 않고 인정할 수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포함되도록 하는 것등 해결할 문제가 많지만 방향은 지금과는 다른 것은 분명합니다. 고통의 시간은 지나서 끝날 것입니다. 느리지만 한 걸음씩 옮겨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멸망 가운데서 남은 자을 찾고 모으셔서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옳음에 이방 사람들도 찾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그들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면 언제든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11절에 ‘이제 많은 이방 사람들이 모여서 너를 치며’ 즉 범죄한 이스라엘을 치도록 하시지만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우월성만을 내세워 전쟁의 승리에 도취된다면 역시 그들에게도 ‘끝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12절에 ‘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며 그의 계획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혼돈’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혼돈과 혼란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고개를 돌리고 문제를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즘은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잠시의 평안을 얻고 싶은 마음도 당연히 있습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리에만 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3장에는 미래가 없다고 해서 미래 그 자체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미래가 어떨것이라는 하나님의 교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캄캄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가에게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힘들어하고 피곤해 한다는 역설이 있습니다. 내일을 알 필요가 없는 어린 아이를 보십시오. 아기들에게는 부모의 존재 여부만 가장 중요한 합니다. 그러나 알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다시 일어설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바꾸어 분발하는 에너지로 쓸 수 있고 화내는 마음을 다스려 환해지는 얼굴의 표정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을 향하여 하셨던 일이 그것입니다. 배신한 제자를 향한 화가 십자가로 가야할 필연을 드러내신 것이고 자리에 연연해 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무릎을 꿇어 가장 더러운 발을 씻기는 자신을 굽히는 태도가 오늘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다는 의미임을 기억하시고 보내고난 명절로 인해 가족간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었다면 그럼에도 다시 용기를 얻고 다음을 위하여 준비하고는 한 주가 되시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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