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복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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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입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주린 자는 복이 있다”, “우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의 현실과는 거리감이 있는 말씀이죠.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은 가난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배고픈 인생을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우는 인생을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가지기를 원하고, 누리기를 원합니다.
요즘에 저희집 첫째 딸이 17살인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자기 손으로 돈을 벌어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돈 버는게 얼마나 힘든지 한번 경험해봐라 해서 말리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일주일에 2-3일 정도 빵집에서 일을 하더군요. 돈 벌어서 뭐하려고 하니? 그랬더니. 아빠가 돈 때문에 고민하지 않고, 목회에만 전념하도록 작게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해서 한다는 기특한 말을 할줄 알았는데, 돈벌어서 자기 사고 싶은거 마음껏 사겠다고 하더군요. 여하튼 아르바이트를 좀 해보더니, 결론은 자기는 돈을 많이 벌거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질문을 한번 해보죠. 가난한 것이 복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부요한 것이 복이 있는 것입니까? 주린 것이 복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배부른 것이 복이 있는 것입니까? 우는 인생이 복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웃는 인생이 복이 있는 것입니까?
성경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부요함이 복이라 말씀합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소유가 많이 지게 되었다고 하고, 야곱도 비록 도망자의 삶을 살았지만 20년 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나올 때는 거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솔로몬 왕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자, 부와 명예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같이 성경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부요함이 복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 성경은 기쁨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고, 전도서에서도 슬픔보다 기쁨이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지금 주리고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단순히 경제적 가난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신앙의 태도 등 어떤 특별한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신 메시지가 무엇인지 찾아보고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우리가 추구해야할 삶의 방향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2. 대상 : 너희 가난한 자

먼저 우리가 살펴보고 싶은 말씀은 20절입니다. 20절을 보시면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너희 가난한 자’라고 표현하셨을까요? 지금 앉아 있는 회중들 면전에서 ‘너희 가난한 자’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 어떠했을까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난하다라고 말하면 화가나는게 인간 아닙니까? 그런데 면전에서 ‘너희 가난한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너희 가난한 자들”이라고 표현하신 것이 어떤 의도와 맥락에서 이뤄진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가난”이라고 하면, 물질적으로 부족하고 어려운 상태를 먼저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면, 그 “가난”이 단지 경제적인 개념만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앞 문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시면 눅 6장 12-19 에서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하신 후, 열두 제자를 택하시지요.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 12명의 제자들 외에도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누군가 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삶의 우선으로 여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시며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들”이라고 하신 것을 볼 때, 이것은 단순히 경제적 가난의 개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최춘선 할아버지라고 아시나요? 제가 대학생 시절에 한국교회에 크게 파장을 일으켰던 분이신데요. 김우현 이라는 감독이 지하철에서 맨발로 돌아다니며 전도를 하는 한 노인을 발견하고, 정신나간 광신도 같아 보이는 노인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노인이 범상치 않은 노인이라는 것을 직감 하게 됩니다. 그리고 취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우현 감독에 의해서 노인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그는 단순히 맨발로 지하철을 돌아다니는 정신 나간 광신도가 아니라, 70년대 김포 일대의 상당한 땅을 소유한 그리고 자가용 5대를 소유했던 재력가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 동경 와세다 대학에서 유학을 한 5개국어에 능통한, 김구 선생님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분이셨습니다. 강화도 일대의 수십만평의 땅을 피난민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지하철에서 맨발로, 남북이 통일 될 때까지 신발을 신지 않겠다며 지하철에서 전도하던 노인이었습니다. 이 분의 이야기가 당시에 영상으로 츨판되었는데, 영상의 제목이 “팔복,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였습니다. 저는 대학생 시절 봤던 이분의 삶을 다시 찾아 보면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의 뜻을 알고 예수님만 따라갔던 그런 분이 아니신가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이 새벽에 주 앞에 나와서 예배하고, 기도하며 제자의 삶을 살기 원하는 우리 모두는 곧 복있는 자들이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들임을 믿습니다. (옆사람에게 한번 이렇게 축복합시다. 당신은 복된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3. 왜 ‘지금’인가?

또 하나 본문에서 살펴 보고 싶은 표현은 21절입니다.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오늘 읽은 말씀, 누가복음 6:20-26 까지의 말씀이 마태복음에도 나오는데, “산상수훈”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죠.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좀 다른 면이 있습니다. 마 5:3 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표현 되어 있는데, 오늘 본문의 표현에 있어서의 차이점은 ‘지금’이라는 표현입니다. 누가복음은 굳이 ‘지금’이라는 표현을 넣은 것이죠.
누가복음에서는 왜 ‘지금’이라고 표현을 넣은 것일까요? 성경에서 반복은 매우 의도적인 것인데, 오늘 본문에서만 4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 ‘지금’을 넣은 이유는 뭔가 아주 특별한 의도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왜 ‘지금’이라는 표현을 넣은 것일까요?
누가복음 전체를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고, 하나님 나라의 특징 중에 하나가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먼 훗날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이미 시작되었고 하나님 나라는 영원히 펼쳐진다는 것이죠. 그런면에서 ‘지금’이라는 표현을 굳이 반복적으로 넣었다는 것은 즉, ‘지금’의 고통과 고난 속에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고 인내하며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성도들의 삶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지 말하려 했던 것이죠. 그래서 ‘지금’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과거에 아무리 신앙생활을 화려하게 했고, 세상이 뒤집어질만한 경험을 했다할지라도 지금 임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예배에 ‘이지선 교수’가 오셔서 간증을 했습니다. 23세 이화여대를 다닐 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온몸에 화상을 입고 흉측한 모습으로 인생이 망가져 버린 인생.. 목숨은 건졌지만 이후의 삶이 더 지옥같았던 삶이지만 … 이지선 교수가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깨달은 것은 자기가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니라, 사고를 만난 것, 하나님이 사고를 만나게 하신 것을 깨닫고 난 후에, 그제서야 비로소 ‘과거의 이지선과 헤어지게 되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현재 Here and now로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죠.

4. 앞뒤 문맥을 통한 본문 이해.

다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서 우리의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가난한 자”, “지금 주린 자”,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하신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본문의 문맥적 흐름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언제나 말의 해석에 있어서 문맥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큐티할 때, 앞뒤 문맥을 따라 읽고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문맥을 놓치면 해석이 길을 잃어 버릴 수 있습니다.
마치 이런 것이죠. 최근에 설명절이었습니다. 어떤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텍스트 메시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어머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시골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세요. 서로 자주 연락을 하면 좋겠어서 휴대폰을 하나 선물해 드립니다. 어머니, 오래 오래 사세요”라고 텍스트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만 오타를 냈습니다. ㅅ을 ㄴ으로 잘못 적어서. “어머니 오래 오래 사세요”가 아닌 “어머니 오래 오래 사네요”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한동안 대화가 끊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맥으로 보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거 아닙니까? 이처럼 성경도 문맥을 따라 보고 해석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깊은 메시지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조금 더 선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지금까지 던졌던 질문과 앞뒤 문맥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6장 전체의 상황을 잠깐 정리해보겠습니다.
1. 누가복음 6:1-5 보시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 이삭을 잘라 먹은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을 가지고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했습니다. 이유는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말라는 규정을 어겼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다윗도 배고플 때, 성전에 있던 진설병을 먹은 일이 있지 않느냐 하시면서, 율법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더 중요하다 가르치셨습니다. 즉,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 안식일과 율법에만 몰두한 나머지, 사람을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 하는 것을 지적 하셨습니다.
2. 이어서 누가복음 6:6-11 에도 여전히 안식일과 율법에 몰두해 있는 바리새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자, 바리새인들이 그걸 트집 잡아 예수님을 어떻게 해할까 고민했습니다. 어떤 주석에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마른 자를 고치시도록 일부러 병자를 데려다 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만큼 바리새인들이 악의적으로 예수님께 트집을 잡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관심사는 고통받는 사람을 회복시키고 자유케 하는 것이었는데,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이 사람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는가?”에만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일과 율법 지킴에 집착하고 몰두해 있는 사람들, 그러나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정신에서는 완전히 어긋나 있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인 것입니다.
3.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우십니다. 눅 6:12-19 에서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밤샘철야 하시고, 열두 제자를 택하십니다. 특별하게 선택하신 12명의 제자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무리들에게 말씀 하시기를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맥락적으로 따지면 율법 지킴에 집착하고, 몰두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상종도 하지 말라, 그들의 행동이나 삶을 조금도 따라하지 말라 그렇게 가르치셔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지금 주린자는 복이 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메시지, 눅 6:27-31 은 ‘원수를 사랑하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저주하는 자를 위해 축복하라, 이 뺨을 치면 저 뺨을 돌려대라...” 입니다.
이 메시지는 왜 나온 것입니까?

5. 문제는 되지 않는다는 것

문맥적으로 보면 오늘 말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복을 얻으려 하여도 되지 않는다 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율법을 잘 지키려 하여도 되지 않고, 아무리 사랑하려 하여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만의 율법과 기준을 만들어 놓고, 기준에 들어오지 않으면 트집을 잡고, 아니면 짓밟아 버리는 인간의 본능, 원수를 절대로 용납하거나 사랑할 수 없는 본능에서 인간은 절대로 헤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간 세계의 생태계이고,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상황들을 보십시오. 이 시대가 그런 상황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원리 원칙을 지켰느냐 아니냐, 가만히 보면 그 원리 원칙은 자신이 만든 원리 원칙이죠. 그것으로 트집을 잡고, 이편 저편 편을 갈라 댑니다. 그리고 서로 원수처럼 여기고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는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가만히보면 교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요. 교회 안에, 성도들 사이에도 얼마나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까? 자신들만의 논리와 규정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영적으로 살아나고 치유받고 회복 받는 일에는 안중에도 없고 트집 잡는 일에 몰두 합니다. 주도권을 누가 가지느냐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점점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12제자를 부르시고, 함께 있는 수많은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한편 뺨을 때리는 자에게 반대편 뺨을 돌려대라?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신기하게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 속에서 이 가르침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한편 뺨을 맞으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반대편 뺨을 돌려대기는 커녕, 죽탱이를 날려 버려야 속이 시원하지 않습니까? 원수는 커녕 나보다 조금 잘 나가는 사람, 조금 더 인정 받는 사람, 조금 더 영향력이 생기는 사람 있으면 미워하고 어떻게 해서든 끌어 내려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나를 먼저 미워하는데 어떻게 먼저 선대하겠습니까? 가만히 있는 나를 험담하고 미워하는데, 어떻게 축복합니까? 우리가 이것을 할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주님 앞에 율법적으로, 행위적으로, 영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가난한 심령으로 주앞에 나오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이 영적 파산자라는 사실을 알고, 죽었다가 깨어나도 원수를 사랑할 수 없고, 나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해줄 수 없고, 모욕하는 자에게 선대할수 없다는 사실에, 가난함과 궁핍함을 아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나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고 남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실력이 없는 자인지 알고, 내 힘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는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무엇보다 지금 주린자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굶주려 헐떡이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의 은혜라도 주십시오라고, 자신의 비참함을 직면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내려주시도록 소망하는 자, 하늘의 양식으로 배불리기를 소망하며 굶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결국 하나님이 먹이실 것이고 배부르게 하실 것이다.
지금, 내가 만든 율법, 기준에 들어오지 않으면 그것을 트집거리로 삼아서 함부로 말하고, 상대방의 인격을 짓밟고, 트집을 잡아 죽이려는 내 안의 과격함과 무자비함, 극단적 공격성을 내려놓지 못해서 지금 우는 자는 / 지금 눈물을 흘리며 눈물을 훔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경험했지만 나를 모욕하고, 하대하고 핀잔을 주고 함부로 말하고, 이유없이 미워하고, 억울하게 만든 자를 용서할 수 없어서, 지금 우는 자, 눈물을 훔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적 가난한 자임을 알고, 영적 파산자임을 알고, 십자가 앞에 엎드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내 능력으로는 이 죄된 본성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저는 처참한 지옥의 불구덩이에 던져져야 하는 사람입니다 고백하는 자들을
저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원수를 사랑할 수 없고, 저를 모욕하고 저를 이용해 먹었던 자들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며 하나님의 은혜에 굶주려 있는 자들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러고 있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긍휼히 여기소서 눈물 흘리는 자들을 위해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셨고,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시편 32:1-2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 제게 가난함을 주옵소서. 주린 마음을 주옵소서. 십자가 앞에 우는자 되어 복되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 원합니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
1.하나님, 우리는 우리 힘으로 도무지 원수를 사랑할 수 없고, 트집 잡고 평가하는대만 급급할 뿐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가난한 심령에 은혜로 채우시고, 지금 굶주린 심령으로 슬픔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것이 되게 하옵소서.
2.내일 주일 강단을 붙들어 주셔서, 모든 이들이 가난한 심령으로 나아오게 하시고, 말씀으로 굶주림이 채워지고 말씀으로 우는 자 되어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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