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하다(Br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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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총정리
갈라디아서 총정리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네 가지의 큰 주제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첫번째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두번째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세번째 성령을 따르는 삶
네번째 하나됨과 공동체”?
바울이 이와 같이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호소한 이유는 그들이
첫번째로 스스로 의롭게 된다.
두번째로 잘못된 가르침에 의한 자유
세번째 성령을 거스르는 삶
네번째 분열과 개인주의
이렇게 다른 복음에 의하여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의 결론은 ‘자랑’입니다.
‘자랑’은 단순하게 나의 잘남을 남에게 뽑내는 정도의 수준에 그치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중요한 서신의 결론에 ‘자랑’에 관하여 적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 모든 글들의 결론이자 신앙의 결론과도 같습니다.
바울은 ‘당신이 가진 믿음의 본질은 당신이 자랑하는 그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랑에 관하여
자랑에 관하여
심리학적으로 살펴본 ‘자랑’이란 ‘긍정적 자아상을 강화하려는 본능적 기제’와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즉 자기가 스스로를 긍정평가하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하여 자랑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랑을 많이 하는 사람일 경우에 역설적이게도 자존감이 낮아서 자랑을 많이 할 수도 있습니다.
자랑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자랑은 그 방법과 방향성 그리고 극단에 이르렀을 때 문제가 되는데 먼저 자랑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의 현상을 두가지로 구분합니다.
첫번째는 ‘오만’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에 대한 긍정이 너무 강해서 타인을 무시하는 경향으로 나타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나르시시즘’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런 경우도 자기애가 너무 강한 현상인데 오만과 다르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인정욕이 강하게 나타나고, 인정받지 못했을 경우에 공격적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최근에는 SNS시대가 열리면서 ‘겸손한 척하면서 하는 자랑’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험블브래그’라고 하는데, 겸손(험블)과 자랑(브래그)의 합성어입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있는 현상입니다.
왜 사람들이 자랑하지 않는 척 하면서 은근히 자랑하는 것일까요?
험블브래그
험블브래그
이는 먼저 도덕과 종교적인 관점에서 ‘자랑’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나 유교 등 전통적인 사상들은 ‘겸손’을 강조하고 ‘교만’을 경계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겸손, 겸양, 사양, 절제 등을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자랑’ 또한 하지 않는 것을 좋게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랑’은 사회적 지위와 자본으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브루디외’는 ‘문화자본’, ‘상징자본’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랑’이 단순한 자기 자랑을 넘어서,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한 상징투쟁의 일환이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자랑은 개인이 쌓아올린 교육, 재력, 인맥 등을 증명하는 효과적 도구가 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하여 계급적, 문화적 권력을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 자랑을 통해서 자신을 어필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쌓거나 타나낼 수 있는 방법이고, 이는 곧 자신의 자산과도 연결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론을 알지 못하더라도 본능적으로 이것을 느끼기 때문에 ‘자랑’을 하고, 또 없는 말을 지어내어 비난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흔히 남자들이 이것이 더 심한 이유도 남자가 더 사회적으로 밀접하게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점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종교적으로 통제되었던 ‘자랑’의 문화가 현대 시대에는 문화적인 변화로 인하여 점점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공동체 주의의 문화에서는 ‘자랑’이 겸손이나 미덕과 충돌하여 자제되었다면 개인주의의 문화에서는 자신의 성취나 노력 등을 드러내는 행동이 ‘자기표현’의 일부로 긍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변화의 시기와 SNS가 만나서 이런 ‘험블브래그’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갈라디아교인의 자랑
갈라디아교인의 자랑
그렇다면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 당시의 갈라디아 사람들의 자랑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시대는 우리의 시대와 너무나 흡사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통적 종교관과 도덕적 가르침으로 인하여 억제되었던 본능이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와 만나서 폭발하던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 행위와 성취를 자랑하기에 힘썼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사회덕 인지도로 연결되었을 것입니다.
점점 더 눈에 보이는 것에 주목하고 자신을 드러내기에 힘쓰던 사람들은 결국 부딪치고 분쟁하게 됩니다.
나는 할례를 받았다, 나는 율법을 잘 지켰다, 나는 누구의 가르침을 받았다, 나는 이런 직분을 받았다 등등 이런 것이 언제부턴가 ‘자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서두에 말했듯이 우리가 자랑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자랑하는 것이 종교적 행위라면 나의 믿음의 본질은 종교적 제도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에요.
내가 자랑하는 것이 내 자식이라면 내 믿음의 중심은 나의 자녀입니다.
내가 자랑하는 것이 내가 가진 물질이라면 내 믿음의 중심은 물질이고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유물론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고 늘 강조하는데 이 말씀을 토대로 보았을 때,
우리의 자랑이 자식이라면 내 믿음의 뿌리는 자녀의 건강과 성공, 출세 등이 될 것이고 그 자녀가 잘되는 것이 나에겐 ‘정의’가 됩니다. 그리고 그 자식이 무너지는 것은 곧 나의 믿음의 붕괴를 나타냅니다.
우리의 믿음이 순금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십자가와 할례나 율법 등을 섞어버리는 믿음은 합금이나 도금과 같은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은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단순한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랑을 통하여 교회와 예수님의 문화적, 사회적 영향력과 인지도가 상승하도록 해야 합니다.
나의 믿음이 복음에 근거하고 예수님을 본질로 삼고 있다면 우리는 하기 싫어도 자연스럽게 예수님과 복음을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예수의 흔적이라고 표현합니다.
전쟁터에 나갔던 군인이 총알에 스친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며 평생을 자랑하듯 그 날 이야기를 하는 것을 실제든 드라마든 영화에서든 보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 날의 현장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자신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을 몸소 체감했다는 사실에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자랑이 그와 같습니다. 자기의 삶에서 신앙생활을 통해 예수님을 만난 경험은 전쟁터에서 총알을 맞은 것과 같은 충격입니다. 그러므로 그 흔적이 자기 몸이든 마음이든 새겨져 있어서 그것을 만나는 사람마다 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론
결론
예수님은 자랑할 것이 넘쳐나는 분이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모든 만물이 그가 지으신 것이라는 신적이 평가 외에도 복음서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그분은 자랑할 것이 누구보다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언행을 살펴보세요.
수많은 사람들의 질병과 심지어 죽을 병을 고쳐주고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평생 신학을 공부한 신학자들과 신학과 철학을 논할 때 그들이 놀랄만한 가르침을 주었을 때에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나 평가는 없습니다. 저는 하찮은 지식도 드러내려 할 때가 많은데 정말 놀랍습니다.
그리고 오천명을 먹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사라집니다. 우리는 오천명이 아니라 50명이 모인 자리만 대접하더라도 자기를 드러내고 알리기 바쁜데 정말 놀랍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끊임없이 자기비움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오직 아버지만을 자랑합니다.
늘 아버지에게 감사했고, 아버지께서 하신 것을 본 그대로 따라했다고 말하며 모든 영광을 아버지께로 돌립니다. 심지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줄 때 이렇게 기도를 마칩니다.
“나라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이정도 능력과 명예와 부를 가졌다면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모두 내 것이라고 외칠 것인데 예수님은 정말로 우리의 본이 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예수님 믿고 예수님을 닮아가시기를 그래서 자기 내세움의 삶이 아니라 자기 비움의 삶으로 승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