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삶의 원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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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았다고 믿을만한 유일한 증거는 과거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경험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투영된 현재의 삶이다. “내가 그분을 아노라, 말하면서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요, 진리가 그의 속에 없느니라.”(요일 2:4)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피조물답게 행동한다. 하나님은 신자들을 조금씩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가시는게 아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이 이미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자들이다. “그러므로 만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 5:17).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가졌던 주된 관심사이며, 거기서 바울은 신자의 “새 생명”을 세밀하게 묘사한다(고후 5:4, 7:6).
바울은 앞서 입증했다(17~24절). 신자들은 구원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임을 안다는 것이다(엡 4:22, 24).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극에 그저 자동으로 반응하는 로봇이 아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은 또한 우리에게 명하신다. 여전히 우리 안에 거하는 구속받지 못한 인성을 성령의 능력으로 복종시키고(고전 9:27),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며 새로운 피조물로 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역설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 둘 다 작동한다. 신실한 신자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언과 명령에 긍정적으로 반응한다. 
바울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며, 어떤 위치를 갖는지 보여주었다(1~3장). 그런 후, 먼저 새로운 삶을 실제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기본 사항을 전체적으로 설명하고(4:1~24), 뒤이어 이 편지 나머지 전체에서 새로운 삶을 위한 구체적 명령들을 제시한다. 4장 25~32절에서 그는 옛 사람과 새 사람 간의 여러 대비가 투영된 명령들을 제시한다. 신자들은 자신의 새 생명을 토대로 거짓말을 버리고 진리를 말하며, 분을 내도 죄를 짓지 말고, 도둑질을 그치고 선한 일을 행하며, 부패한 대화를 버리고 좋은 말을 하며, 모든 악감정을 버리고 부드러운 마음을 품으라고 명한다. 
1. 거짓말을 버리고 진리를 말하라
“그런즉 거짓말을 내버리고 자기 이웃과 함께 각 사람이 진리를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이기 때문이라.”
그런즉은 4장에서 두 번째 나오는데 (17절),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 생명에 관한 일반적 기술에(20~24절) 대한 올바른 반응을 제시하며, 새로운 행보를 위한 구체적인 첫 명령을 시작한다. 
거짓말 쟁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호색꾼들과 마술사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에서 자기 몫을 받으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고전 6:9). 신자는 여느 죄에 빠질 수 있듯이 거짓말에도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속이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거짓말이 신자의 삶에 습관으로 자리를 잡는다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을만한 성경적 근거가 없다. 거짓말이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어 늘 거짓말을 한다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사탄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것이다(요 8:44). 사탄은 하나님, 그리스도, 생명, 죽음, 천국, 지옥, 성경, 선, 악을 비롯해 모든 것에 관해 거짓말을 한다. 기독교 외에 모든 종교는 사탄의 다양한 속임수를 중심으로 세워진다. 인간 종교들에서 발견할 수도 있을 제한적이고 얼마 안되는 진리조차도 속이려는 더 큰 계략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아담의 타락 이후, 거짓말은 거듭나지 못한 인류의 공통된 특징이다. 우리 사회는 거짓말에 크게 의존한다. 그래서 진실을 말하는 쪽으로 갑자기 바뀌면, 우리의 생활방식이 무너질 것이다. 세계 지도자들이 오로지 진실을 말하기 시작한다면, 틀림없이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다. 너무나 많은 거짓말이 겹겹이 쌓이고, 너무 많은 단체와 사업체와 경제와 사회질서와 정부와 조약이 이러한 거짓말 위에 세워진다. 그래서 거짓말이 갑자기 그치면 세상 체계가 붕괴할 것이다. 분노와 적대감이 끝을 모를 것이며, 상상할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거짓말은 직접적인 것짓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거짓말은 과장을 포함하며, 참되게 시작된 것에 거짓을 덧붙이는 것도 포함한다. 여러 해 전, 어느 그리스도인이 강력하고 감동적으로 간증으로 아주 유명해졌다. 그러나 몇 년 후, 그는 간증을 중단했다. 이유를 맏자, 꽤 솔직하게 답했다. “지난 여려 해 동안 저는 이야기를 너무 부풀렸고, 이제는 무엇이 사실이었고 무엇이 사실이 아니었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보거나 세금을 환급받을 때 부정행위를 하는 것도 거짓말의 한 형태다. 어리석은 약속을 하거나, 신뢰를 저버리거나, 아첨하거나, 변명하는 것도 모두 거짓말의 한 형태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종류든 거짓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거짓을 버림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이어야 한다. 거짓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본성가 양립할 수 없으며, 그의 새로운 주인에게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버리고로 번역된 ‘아포티떼미’는 폐기, 벗음, 내다버림 등과 관련이 있다. 누가는 이 단어를 예루살렘 유대 지도자들에게 사용했다. 이들은 스데반에게 돌을 던질 때,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앞에 두었다”(행 7:58). 이들은 겉옷을 벗어 옆에 두었다. 자신들의 사악한 일을 더 자유롭게 할 수 있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인은 거짓을 버린다. 주님의 의로운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기 위해서다.
바울은 스가랴 8장 16절을 인용하면서 부정적 금지에서 긍정적 명령으로 옮겨간다.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라. 그리스도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요 14:6), 성령은 “진리의 영”이고(17절),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다(요 17:17). 사람은 신자가 될 때, 거짓의 영역에서 나와 진리의 영역으로 들어가며, 그러므로 모든 형태의 거짓말은 그의 새 사람과 전혀 맞지 않는다.
진리를 말해야 한다고 해서 우리가 아는 전부를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신뢰를 비롯해 합법적인 비밀을 지키는 것과 충돌하지 않는다. 우리의 모든 말은 무조건 참이어야 하며, 속이거나 오도하려고 정보를 감추는 것은 거짓말의 한 형태다. 그러나 진실함은 그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아는 것을 전부 말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진실함은 싫어하는 사람들을 향한 안 좋은 감정과 의심과 미움을 모두 버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관심사는 하나님이 우리의 잘못된 감정들을 처리해 제거하시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어설프게 정당화하면서 이런 감정들을 제멋대로 표현해서는 안된다. 또는 이런 감정들을 표현하면 이것들이 사라지거나 이것들 때문에 깨진 관계가 회복되리라는 잘못된 기대를 품어서도 안 된다. 바울처럼 우리가 완전하지 않고 죄로부터 자유롭지도 않음을 기꺼이 인정하는 것과(롬 7:15~25; 빌 4:12~14) 우리의 죄를 자세하게 떠벌리는 것은 전혀 별개다.
하나님의 경륜은 진리에 기초하며, 개인으로서든 교회로서든, 하나님의 백성이 진실하게 살지 않는다면 그분의 일에 적합한 도구일 수 없다. 우리는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이기 때문이다. 이웃이란 단어는 서로 지체라는 어구가 정의하며, 동료 그리스도인을 뜻한다.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든, 그 누구에게든 진리를 말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신자들에게 진실한 데는 특별한 동기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동료지체이며, 따라서 서로 지체이기 때문이다.
육체적 몸은 각 지체가 정확히 소통하지 않으면 제대로 또는 안전하게 기능하지 못한다. 뇌가 갑자기 발에 거짓 신호를 보내기 시작하면, 우리는 비틀거리거나 인도 경계석에서 멈추는 대신 달리는 트럭 앞으로 뛰어들 것이다. 뇌가 온기와 냉기를 거짓으로 알려주면, 우리는 너무 덥다고 느껴 열어 죽거나 뜨거운 물로 샤워하다가 화상을 입으면서도 춥다고 느낄 수 있다. 눈이 뇌에 거짓 신호를 보내기로 하면, 위험한 고속도로 커브 길이 곧고 안전해 보여 사고가 날 것이다. 손과 발이 다쳤을 때 그곳에 분포한 신경이 뇌에게 알려주지 않으면 발이 짓이겨지거나 손가락이 화상을 입는데도 모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나병이 아주 위험한 이유다. 신경이 통증이란 위험 신호를 보내지 못하기 때문에 상처와 질병을 비롯한 고통이 몸을 파괴하는 것이다.
교회는 지체들이 서로 진실을 가리거나 솔직하게 사랑으로 하께 일하지 못하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특히 동료 신자들 사이에서 “사랑안에서 진리를” 말하지 않으면(엡 4:15), 서로에게 또는 함께 효과적으로 사역하지 못한다.
2. 분노를 멈추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26~27).
‘파로르기스모스’는 잠시 밖으로 끓어 넘치는 분노나 안에서 들끓는 울분이 아니라 깊이 자리 잡은 단호하고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다. 이 단락에서 보듯이, 이 단어와 관련된 신약성경의 용례는 동기와 목적에 따라 좋거나 나쁜 감정을 가리킬 수 있다.
바울의 명령은 화를 내라는 것인데, 여기에 죄를 짓지 말라는 조건이 붙는다. 이 말에서 바울은 의로운 분개, 악을 향한 분노, 곧 주님과 그분의 뜻과 목적에 맞서 행하는 일에 대한 분노를 정당화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악을 미워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품는 분노다(시 69:9). 이것은 모든 종류의 불의와 부도덕과 불경을 혐오하는 분노다. 이것은 영국 설교가 로버트슨(F.W. Robertson)이 어느 편지에서 썼던 분노다. 그는 어린 소녀를 꾀어 성매매하려는 한 남자를 보고 분노한 나머지 그의 입술을 때려 피를 냈다.
예수님은 자신이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주는 모습에 분개하는 바리새인들의 완악한 마음을 향해 분노를 표현하셨다(막 3:5). 예수님은 성전에서 환전상을 쫓아내셨다. 이 사건을 다루는 복음서 기사들은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러한 분노를 느껴 이들을 쫓아내셨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마 21:12; 요 2:15). 아버지께서 비방을 받으시거나 다른 사람들이 학대당할 때마다 예수님은 분노하셨다. 그러나 자신에게 한 짓에는 절대로 이기적 분노를 표현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의로운 분노의 척도다.
다른 한편으로, 죄에 해당하는 분은 자신을 방어하고 자기 잇속을 차리는 분노, 자신에게 한 짓에 분개하는 분노다. 이러한 분노는 살인과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진다(마 5:21~22).
이기적이고 통제되지 않으며 앙심을 품는 분노는 죄악되며,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잠시라도 이런 분노를 위한 자리가 없다. 그러나 이타적이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관심에서 비롯된 분노는 허용될 뿐 아니라 명령된다. 진정한 사랑은 그 대상이 해를 입는 것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의로운 분노라도 쉽게 응어리와 분개와 독선으로 바뀔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뒤이어 말한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더없이 좋은 동기에서 시작된 분노라도 변질 될 수 있다. 따라서 하루를 마무리할 때, 분노를 버려야 한다. 분노를 잠자리까지 가져가면, 마귀가 틈을 타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것이다. 분노가 오래가면 앙갚음하려 할 수 있고, 이로써 로마서 12장 17~21절이 가르치는 원리를 범할 수 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정직한 일들을 예비하라. 가능하다면 너희가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라.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진노하심에 맡기라. 이는 기록된 바, 원수 갚는 일은 내것이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만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그를 먹이고, 만일 그가 목마르거든 그에게 마실 것을 주라. 이는 그렇게 함으로 네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을 것이기 때문이라. 악에게 지지 말고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기라.”
26~27절도 전적으로 이 불의한 분노를 가리킬 것이다. 거기서 바울은 명령형을 사용한다. 분노가 일순간 들어와 신자를 장악하기 때문에 분노가 성장하고 곪아터지는 경향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분노를 즉시 처리하라는 것이다. 즉 하루가 끝나기 전에 고백하고, 버리며, 하나님께 맡겨 씻어버리시게 하라는 것이다.
적접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어떤 분노든 끼고 살면, “사탄에 속게”되고, 사탄이 자기 연민, 독선, 복수심, 우리의 권리 방어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이기적 죄와 하나님의 거룩한 뜻 범하기 등으로 우리의 분노를 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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