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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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사도행전 10장 24~43절
우리 옆 사람과 인사합시다. 우리가 이렇게 고백해 봅시다. "예수님의 음성인 말씀을 들읍시다." "예수님의 삶을 재현합시다." 이 고백처럼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항상 주님의 음성을 말씀으로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여 예수님의 삶을 재현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 시대를 "설교의 위기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는 현대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 중 하나로, 설교가 그 본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설교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는 중요한 수단이자, 성도들의 신앙을 강화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도구여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이러한 설교의 본질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가지 정도로 이야기할수 있습니다.
"첫째로 설교의 권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도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설교자가 성도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흥미로운 이야기나 시사적인 예화를 사용하려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설교는 종종 강연이나 개인 간증의 시간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둘째로, 설교의 내용이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성도들이 재미있고 흥미롭게 들을 수 있는 내용을 찾기 위해 성경 본문을 넘어 다른 자료들을 참고합니다. 이는 성도들이 설교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느끼는 대신,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셋째로, 설교자의 삶과 말씀 사이에 간극이 존재합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설교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며, 설교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영향력을 약화시킵니다. 저는 오늘 설교의 위기 속에 어떤 바른 설교를 들어야 하고, 그를 통해 우리는 어떤 삶의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바른 설교가 가져오는 모습 세가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설교가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부분을 잠시 나누겠습니다.
사도행전 10장 24-25절입니다.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려 절하니.” 이 본문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초청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고, 베드로가 도착할 때까지 자신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렸습니다.
베드로가 드디어 고넬료의 집에 당도합니다. 그러자 고넬료는 자신의 문 앞에서 베드로를 환대합니다.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합니까? 엎드려 절을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행동이 고넬료의 신앙을 말해줍니다. 고넬료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로마의 100명의 병사를 거느리는 지휘관입니다. 그러기에 그가 절한 대상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로마의 황제입니다. 또는 그 당시 올림푸스의 12명의 신 중 하나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절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실상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예를 갖추는 것으로는 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모습이 왜 나타났을까요? 지금 고넬료는 베드로를 단순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온 메신저인 천사에게 엎드려 절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통해 고넬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설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메시지를 듣는 것이며, 마음을 열고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했을 때, 고넬료와 그의 친척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준비된 상태였다는 것은 우리가 설교를 듣는 데 있어 어떤 태도로 나아가야 하는지 잘 말해주는 본문입니다. 이제 설교준비가 끝났다면 본문을 통해 설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설교는 하나님 앞에 서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자세를 요구합니다. 사도행전 10장 3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고넬료는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그는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초대교회 때도 그렇고,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에게 메시지를 주십니다. 그러기에 그 메시지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말씀과 삶의 간극이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메신저도 사람인지라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성격을 통해 이러한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지만 두려움과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넬료가 로마의 장교이기에 혹시 예수를 믿는 자신을 해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를 알 수 있는 점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갈 때 혼자 가지 않고 욥바에 온 예수 믿는 사람들과 함께 갔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 23절). 메신저가 부족할 수 있지만, 그 메신저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들을 때 우리는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오늘날 설교에 가장 큰 문제는 메시지의 권위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왜 생겼을까요? 사실, 설교자에게 가장 큰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풀어 전하려 하지 않고, 성도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어떻게 하면 재미있고 흥미롭게 들을까를 더 고민합니다. 그래서 설교 본문을 시사나 흥미로운 이야기에서 찾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설교는 강연이나 설교자의 간증 시간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결코 메신저의 모습이 아닙니다. 구약이나 신약 시대의 메신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주는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만약 설교를 듣고 설교자만 기억에 남았다면, 그것은 잘못 전한 것입니다. 설교는 반드시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남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더 알고 싶어지는 사모함이 생겨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함께 이 한국교회 설교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설교자나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해달라고 기도해 주세요. 설교자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성실하게 풀어 전하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받는 모습을 보이게 해달라고 기도해 주세요. 이로 인해 우리의 신앙이 더욱 굳건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삶이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설교는 예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6절입니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베드로가 본격적으로 고넬료와 함께 한 무리에게 설교를 시작하면서 어떻게 말합니까?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렇게 시작합니다. 즉 지금부터 전해지는 모든 이야기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과 신약은 누구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약은 오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설교자는 누구를 설교 가운데 드러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전에 사역할 때의 일입니다. 그 당시 부교역자로 부임하고 얼마 되지 않아 담임목사님이 안식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안식년 동안 모든 설교를 제가 담당해야 했습니다. 그때 마음속에 한 달 동안 예수님만을 전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실 부임하면서 제가 목격한 교회의 모습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성도들의 얼굴은 무표정했습니다. 찬양이나 기도도 형식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였고, 예배 중간중간에 잠을 자는 성도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이러한 수동적인 성도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며 많은 염려를 했습니다. 특히 예배 중간에 2층에서 팔짱을 끼고 전혀 예배에 집중하지 않는 분도 계셨습니다.
첫째 주 주일에 예수님을 전하는 설교를 했지만 성도들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습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다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설교했습니다. 그러자 서서히 성도들의 얼어붙은 마음이 녹기 시작했습니다. 그 증거는 교회 내 성도들의 관계 변화에서 나타났습니다. 예전에는 작은 일에도 싸움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서로 양보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부임 후 처음으로 불평 없이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4주째가 되었을 때, 교회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팔짱을 끼고 예배에 전혀 집중하지 않던 그분이 팔짱을 풀고 말씀을 듣는 모습이었습니다. 심지어 말씀을 듣다 눈물을 흘리며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모습까지 보였습니다. 그분이 저런 분인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 후로 교회는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말 그대로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제가 예수님의 삶을 먼저 느끼고 그것을 성도들에게 전달하려고 애썼기 때문입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예배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설교 가운데 잘 드러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결단했습니다. 어떤 설교를 하든 고집스럽게 예수님을 전하겠다고, 예수님이 진정한 우리의 삶의 답이라는 것을 먼저 믿고 확신 있게 전하는 메신저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 교회 설교 가운데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가 따로 있습니다. 그 말은 한국교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지 않는 설교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란, 사실 오늘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한 설교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설교를 구성합니다. 이를 통해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죽음, 부활, 가르침 등을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설교는 반드시 결과를 낳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이 이런 메시지를 들을 때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 구원의 의미를 더욱 깊이 느끼고 실천하려는 동기가 생깁니다. 결국 설교의 주인공이 예수님이 될 때 예수님의 삶을 재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바꾸어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삶을 재현하지 못할 때 설교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닙니까? 오늘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자주 반복되어 나타나는 표현이 있습니다. 찾으셨습니까? "증인," "증언"이라는 단어입니다. 증인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본 사실을 그대로 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12명을 사도로 정하시고 그들에게 모든 사역을 맡긴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며 모든 것을 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제자들이 본 것과 같이 예수님을 전할까요? 바로 여기에 설교자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말씀 속에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난 예수님을 생생하게 마음에 담아 전하는 역할을 맡은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이런 생생한 예수님을 2025년 2월 2일 이곳에서 다시 재경험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설교입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최근 설날을 맞이하여 아이들과 함께 눈썰매장에 다녀왔습니다. 분명 눈썰매도 재미있었지만 사실 더 기억에 남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빙어잡기였습니다. 눈썰매장 매점 한 구석에 빙어잡기 부스가 있었습니다. 빙어를 잡는 방식은 간단합니다. 수조에 빙어가 가득 있는데 뜰채가 수평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곳에 빙어를 올리면 되는 것입니다. 제한 사항은 20마리만 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수평으로 된 뜰채에 빙어를 올리려 하면 그냥 빠져나가 버립니다. 그러나 빠른 스피드로 뜰채를 올리면 빙어가 걸린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2~3마리씩 빙어를 건져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잡은 것을 바로 옆에서 튀겨주는데, 튀김 사장님이 이야기합니다. "20마리가 다 넘어요. 많이 잡으셨네요. 원래 만원은 주셔야 빙어를 튀겨주는데 9,000원만 내세요." 그렇게 빙어를 튀겨 대호와 하음에게 주었습니다. 얼마나 잘 먹던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마치 경험한 것처럼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게 가능합니까? 먼저는 제가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설교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설교자가 전하는 말씀이 먼저 경험되어야 합니다. 마치 그 말씀이 지금 설교자 자신에게 일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이를 위해서 설교자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험된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을 들음으로 재경험 되어지는 설교의 시간이 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셋째로 설교는 어두워진 눈을 밝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 43절입니다.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말만 잘하고 행동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눈이 죄로 덮여 있어서 제대로 주님이 원하는 길을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목욕을 했다고 해서 샌들을 신고 돌아다니면서 발을 안 씻어도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 짓는 죄, 또는 인식하면서도 짓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대낮 같은 삶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가려워 어둠에 사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눈이 가려워져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로 설교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다가 보면 "아, 저 모습은 예수님과 내가 다른 모습인데?" 하는 것이 발견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아, 저게 빛의 길을 걸어가는데 가로막고 있는 죄악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그냥 교양강좌처럼 들으면 안 됩니다. 말씀을 듣다 보면 찔리는 부분이 있게 됩니다. 그때 "왜 저런 불편한 이야기를 하실까?" 생각하지 말고 "아, 저 부분이 내 눈을 가리는 부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있다면 메모를 해두고 그 부분을 가지고 회개해야 합니다. 때로는 예배당에서 주어지는 회개 시간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부분을 기록해 놓았다가 끈기 있게 그 죄에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때까지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죄는 매우 끈질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한 번 "예수님 죄송합니다" 하는 것이 결코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 기도는 계속 넘어지는 그 죄에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설교는 반드시 회개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는 모습 중 하나가 무엇일까요? 바로 설교 후에 드려지는 회개의 기도입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 순서를 보면 기도 시간이 굉장히 많습니다. 예배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하는 통성기도를 시작으로, 마음을 씻는 회개기도, 말씀을 듣기 위한 성령 임재 기도, 열방을 위한 기도,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결단의 기도가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기도를 예배 순서에 넣은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는 우리의 예배가 일방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가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시간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소통합니까? 기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올려드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받음으로 소통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난 다음에 드리는 결단의 기도는 너무 중요합니다.
분명 우리 성도들은 결단의 기도를 마음을 다해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 번 더 결단의 기도가 왜 이렇게 중요한지 더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는 본래 어둠에 살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들을 하나님은 예수를 믿게 하심으로 빛에 두셨습니다. 이제는 빛이 임하니 문제가 없을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빛에 살아가고 있지만 어느 순간 죄라는 것이 우리의 눈을 가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우리가 빛에 있어도 빛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때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을 가리는 죄를 벗어 던져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죄사함의 회개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매일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죄사함의 회개로 나아가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바른 설교가 무엇인가?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설교는 단지 좋은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경건한 시간입니다.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생명을 경험하는 통로입니다. 또한 우리의 눈을 밝혀 죄로부터 돌이켜 빛의 길을 걷게 하는 중요한 은혜의 수단입니다.
오늘 주신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내는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날마다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간절히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결단의 찬양하겠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