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자원하는 임원
0 ratings
· 7 viewsNotes
Transcript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사랑하는 임원 형제, 자매님들 교회당에서 오랜만에 주무셨죠?
어떻게 춥지는 않고 잘 잤나요? 오랜만에 서로의 온기와 잠버릇을 보며 혹 불편한 잠을 잤나요?
하지만 우리는 서울은평교회 청년회 직분자, 임원으로서 묶여 함께 말씀듣고 프로그램을 하며 잠도자고 1박 2일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담임목사님 말씀을 들으며 먼저는 우리 직분을 가진 임원들이 말씀으로 채워져야 삶 가운데 행함이 되는 믿음이 되고 그렇게 말씀으로 체험한 하나님을 청년 형제, 자매님들과 교제 할 때 간증으로 맛보여주고 말씀을 전해줄 수 있기에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우리 임원수련회 주제 말씀인 시편 51편 12절 말씀을 함께 상고해보겠습니다.
시편 51:12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이 시편은 상단에 기록된 바와 같이 다윗왕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다윗에게 온때에 지은 시입니다.
사무엘하 11장에는 다윗왕이 밧세바를 탐하고 신복이였던 우리아를 전쟁 가운데 죽임을 당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간음죄와 살인교사 죄를 짓었고 이 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여호와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냈습니다. 그 사건 가운데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먼저 보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왕에게 그 잘못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먼저 이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간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나단이 우연히 온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 가운데서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의 크고 작은 일 가운데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계시다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고 주님 앞에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통상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그저 우연히 일어난 일이다라고 치부해 보면서 살아가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아지만 이 다음 해, 그리고 이 다음 해 즉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 봤을 때 그것은 막연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이자 필연이였음을 뒤늦게 발견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사건 가운데에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은 목적한 바를 이루는 섭리가 어떻게 작은 일상 가운데서 미묘하게 얽혀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는가를 자세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중 에스더서에서는 기적적이다 라고 할만한 초자연적인 일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적적인 사건이 기록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일상의 일들을 통해서 그들 백성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내시고 구원하시는 더욱더 놀라운 기적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것을 분명히 우리가 깨달을 수만 있다면 마치 엘리야에게 나타나셨던 그 여호와의 음성처럼 뇌성이나 바위나 천둥 가운데가 아니라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게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속삭임을 우리는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5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다윗은 1~4절에서 나단 선지자가 부한 자와 가난한 자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에 따른 다윗의 반응은 어떠하죠? 이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1~4절까지 기록된 그 불의한 사람에 대한 모습을 전혀 자기 자신이라 생각하지 않고 마땅히 죽을 자라 말을 하고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다윗은 나단이 온 것은 그냥 우연이였고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내심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밀한 죄는 이렇게 우리의 눈과 귀를 그리고 또 마음을 막아버리고 닫아버릴 수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죄와 타협된 삶은 점진적으로 번져나는 문둥병처럼, 궁금적으로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그저 죽은 것과 다름없는 그러한 삶으로 만들어 버린다 라는 것을 죄의 이무서운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발견해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그 우리아의 사건이 너무나 은밀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아무도 알지 못할 거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살아나가는 과정 가운데 큰 죄도 문제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일상에 잠잠하게 베어져 있는 작은 죄들이 더 큰 문제를 유발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팔아 먹은 유다도 처음에는 돈궤에서 돈을 슬금슬금 훔치는 것부터 그 죄가 시작 되었음을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일을 그치지 않았을 때 급기야 사단은 그의 삶을 주목하고 그 생각에 예수님을 팔아먹을 생각을 집어 넣었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3:2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큰 죄도 문제이지만 작은 죄 역시 우리 삶을 아주 못 쓰게 만들어버리는 결코 용납돼서는 안 될 부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다윗은 모르긴 해도 그 우리아의 사건이 아무도 모르고 또 은밀하게 진행 된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속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도 다윗이 나름대로 그 일을 은밀히 진행했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2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다윗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어찌하여 그 일이 들통나고 어찌하여 이 자기의 그 그릇된 일이 삼천 년이 지난 이 시대에까지 이렇게 읽혀지고 회자되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의 실제의 삶 가운데 아무도 보지 못했다라고 해서 여전히 내 곁에 두고 있는 숨은 죄가 없는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그 상태가 지속될 때 우리의 눈이 멀어지고 마음이 둔하여지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내가 나를 업신여기고 햇사람 우리야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 즉 칼이 네 집에 영영이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말씀을 업신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항상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의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진짜 성경에서 인정하시는 정로인지, 혹시 하나님 말씀 바깥으로 벗어나고 있는 걸음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항상 주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기준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기록된 이 성경의 말씀에 나의 삶을 비추어 보고 내가 길 곁으로 나가고 있지는 않은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는 항상 우리의 마음을 살펴봐야 될 것입니다.
신명기 5:32 “32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여호수아 1:7 “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잠언 23:19 “19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로로 인도할지니라”
어제도 담임목사님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말씀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안에 마음에 있을 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지혜를 얻어 마음의 정로로 갈 수 있습니다. 분명한 기준을 갖고 분명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일로 우리는 당당하게 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내 주변에 여러 사람들이 아니라고 해도 성경이 말씀이 그 길이 옳다고 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길로 갈 필요가 있는 겁니다.
다윗도 그러 했었습니다. 엔게디 황무지 굴속에서, 십 황무지 장막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상황 가운데 주위의 신복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했지만 다윗은 그 중심에 말씀이 있었기에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밧세바를 취할 때는 게으른 상태였습니다.
말씀이 중심에 바로 설때 우리는 어떠한 시련와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4:15 “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판결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신원하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구원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시편 71:15 “15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의 은혜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의 은혜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람은 사람한테만 은혜를 입어도 그 은혜를 생각하면 그 사람에 대한 좋은 마음들이 올라오잖아요. 우리는 하나님께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시편 116:12 “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모든 은혜”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다 주님께서 내게 허락하여 주신 것들입니다.
내가 구원 받기 전에는 내 모든 것이 은혜인 줄 몰랐습니다. 그냥 당연한거도 내 노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구원 받고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며 알아가는 것중 하나는 무엇입니까? 바로.. 은혜입니다. 내 모든 것이 은혜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으로 바꼈습니다. 몸도 주님의 것이고 재능도 주님의 것이고 무엇보다도 내게 주어진 시간도 주님의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 얼마나 드릴 것인가? 근데 누군가가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꾸는게 더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가질 것인가? 왜냐하면 모든 것이 주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께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드릴 것인가? 얼마나 가질 것인가? 두 글자의 차이지만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리고 분명 각각의 생각에 따른 마음과 태도도 다를 것입니다.
레위기 성경에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득 담겨있습니다.
1장 1절부터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회막에서 부르셨습니다. 근데 그 전까지는 어디서 부르셨냐면 진 밖에서 특히 시내산에서 부르셨습니다.
출애굽기 40 장을 보면 성막을 딱 세우거든요? 그리고 난 후에 레위기 1장으로 넘어와서 이제는 성막에서 부르십니다. 멀리계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시는 모습으로 진 밖도 아니고 시내산도 아니고 진 중에서 부르셨습니다. 이때부터 함께 계시는 하나님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 받은 순간 우리 안에는 성령님이 내주하십니다. 구원 받으면 성령으로 인쳐주십니다. 우리 안에는 항상 성령님이 함께하시고 날마나 나와 동행하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시며 내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다 거룩한 성막이다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찌니라 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찌니라
가장 처음으로 번제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번제는 헌신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희생 제물을 번제단 불에 완전하게 태워 그 향기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를 말합니다. 태운다는 것은 내 삶의 전부를 드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번제는 헌신과 충성을 다짐하는 제사로 모든 제사의 기본이 됩니다.
노아는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내린 뒤 번제를 드렸고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자 했고
출애굽 전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번제를 통해서 몇가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레1:2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번제의 큰 특징 중 하나는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제사에는 의무적으로 드리는 제사가 있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가 있습니다. 번제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여호와께 예물을 드려라 가 아닌 드리려거든 으로 시작합니다. 자원하는 마음을 말씀합니다.
레1:3 “여호와 앞에” 봉사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직분의 역할을 하는 것은 주님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위해서 또는 사람에게 인정 받기 위해서 봉사를 하게 되면 내 의가 들어가기 때문에 그 마음이 힘들 때도 분명 생깁니다. 우리가 봉사 가운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 앞에서 하는 것이다.
레1:9 “불살라 번제를 삼을찌니” 번제는 말 그대로 불로 태우는 제사입니다. 우리가 일을 하다 보면 개인적인 경험이나 생각으로 인해서 일의 스타일이 다르기도 하고 추구하는 것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딪힐때도 있습니다. 불로 태운다는 것은 ‘하나님 저는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뜻에 맞추겠습니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서로 맞춰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로가 인정해주고 존중해주고 그게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레1:9 “향기로운 냄새니라” 내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나를 버리고 주님을 위해 한다면 주님은 그 모습을 아름답게 향기롭게 기쁘시게 받아주십니다.
레1:3 “소의 번제이면” 레1:10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레1:14 “새의 번제이면”
하나님께서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자원해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수 있도록 값비싼 소부터 저렴한 새까지 번제물로 정해두셨습니다.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주님께서 받아주시고 또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2025년 한해 벌써 한달이 지났습니다. 사실 아직 많이 뒤숭숭합니다. 우리는 마지막시대라고 간증도 하고 말씀도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많이 느끼고 체감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말뿐이 아니라 이제는 마지막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다운 모습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이 오셨을 때 나에게 맡겨주신 직분에 충성되이 하는지 안하는지는 보실 겁니다.
그래도 이왕하는 거면 주님께 칭찬 받음을 기대하며 주를위해 사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함께 기도하고 동행하고 합심하는 임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될 수 있으면 임원부터 이름을 부르기보다 서로 존중하고 세워주는 성숙한 형제, 자매님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