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시려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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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은혜 안에서 만나주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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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은혜 가운데 우리를 만나주시고 만져주시는 하나님

Matthew 6:12–15 NKRV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신앙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데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는 예수님을 닮을 수 있을까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용서”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감정에 기반한 인간의 그것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용서는 언약의 말씀에 기반한 용서입니다. 곧 공의와 사랑에 기반한 용서라도 하겠습니다.  
묵상하면서 제가 좋아하는 한 식당의 군만두가 생각났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외피는 바삭하고, 만두속은 육즙이 떨어지면서 부드럽고 진짜 맛있습니다. 겉빠속촉! 뭔지 아시죠? 겉을 바삭하게 구워서 단단하게 그 형태를 붙잡아주고, 동시에 속에 육즙이 손실되지 않도록 잡아 주니 시간이 지나도 속이 촉촉한… 겉빠속촉!
저와 여러분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바로 겉빠속촉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를 범하면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공의요 정의입니다. 이것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이것이 겉빠입니다.
겉빠 속에 감춰진 속촉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심으로 나타났습니다. 가죽옷은 피 흘린 희생을 의미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피를 흘려 우리의 모든 죄를 덮는 가죽옷, 아니 “의의 옷”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단단하여 절대 무너지지 않고, 그 속으로 멈추지 않는 사랑이 흐르는 것. 겉빠속촉! 용서는 바로 이와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용서의 은혜 가운데 우리를 만나주시고 만져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은혜로 우리도 용서하는 삶을 살며 더욱 주 예수를 닮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1. 용서함으로 사회를 건강하게

한 유명 상담가는 용서하는 것이 정신적, 정서적 건강에 필수적이고, 분노 불안 등 모든 스트레스에 도움을 준다는 연구 결과 말하면서, 누구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 용서하라고 합니다.
맞아요. 우리는 마음의 문제를 지혜롭게 잘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나에게만 포커스된 용서는 기독교의 용서가 아닙니다.
저의 아이들에게 너는 용서를 해준 일이 많니? 용서를 받은 일이 많니? 물어보았습니다. 모두 용서받은 일이 많다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우리는 사회에서 누구나 가해자이며, 동시에 피해자라 합니다. 누군가에게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고, 또한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 사람이라는 겁니다.
본문은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인데, 주님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해서 모두 “우리”에게 역사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기본적으로 함께 하는 기도, 주기도문처럼 내가 용서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더욱 겸손한 자세로 살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수 없이 용서받았고, 오늘도 누군가 나를 용서해 주었기에 오늘 우리가 살아갑니다. 그래서 진정한 용서는 나를 자유케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에 보면 아들을 유괴해 죽게 한 살인자를 용서하겠다고 주인공이 감옥에 찾아 갑니다. 그런데 이 살인자가 미소를 띤 평안한 얼굴로 하나님이 죄 많은 인간을 만나주셨고, 회개하니 죄를 용서해 주셨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을 위해 평생 기도를 하겠다는 겁니다. 말만 들으면 이 사람이 은혜를 받고 순한 양이 되었구나 싶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범한 죄가 있잖아요. 용서를 구할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죽인 아이 엄마에게는 사죄의 말은 한 마디 하지 않고, 당신을 기도하겠다는 것은 기독교의 용서의 방법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 속건제라는 제사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면 그 피해에 5분의 1일 더하여 갚고 용서를 구하는 관계적, 사회적 회복을 위한 제사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예수님은 하나님께 예배하려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화목하고 와서 예배하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먼저 형제에게 용서를 빌고 와서 예배하라는 것이죠.
궁극적인 용서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웃과의 관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사람들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이것이 수직 수평 십자가의 원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려면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는 오늘 본문은 조건부 용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용서라는 것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개인적인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관계적이고 사회적이고, 나아가 하나님께 연결되는 신앙적인 것이라 말씀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다함이 없는 용서의 선물 받았다면, 속건제를 드렸어야죠. 남의 자식 죽인 죄, 자기 목숨으로 갚을 수 없다면, 땅 바닥에 엎드려서라도 빌어야죠. 피해자 앞에서 가슴을 찢고 평생 참회하며 고개 숙이고 살겠다 했어야죠.
기독교의 용서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겉빠속촉이라 했잖아요!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한 용서는 작동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용서는 받을 때나, 베풀 때나 용서는 개인적이고,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적이고 사회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건강한 사회는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고, 또 용서를 베푸는 사회입니다.

2. 용서함으로 교회를 교회되게

용서는 목적이 있습니다. 용서의 목적, 그것은 “화목”입니다. 화목은 하나가 되는 것이고,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되는 것은 곧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Ephesians 1:23 NKRV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참된 용서는 화목을 이루고, 화목함은 교회를 교회되게 합니다. 교회는 한 몸 공동체, 가족 공동체, 사랑 공동체입니다.
저희 아이들이 어릴 때 큰 잘못을 하면 저에게 혼이 났습니다. 아이가 다섯이니 화낼 일도 5배!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한 번에 확실하게 고치는 것이 좋죠. 엄청 무섭게 야단을 쳤습니다. 그러면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한 번만 용서해 달라 울면서 말해요. 정말 다시는 안 그랬을까요?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기도하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정말 우리가 다시는 그러지 않을까요?
용서는 그럴 것을 알면서도 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하나님은 알고도 용서하시는 거예요.
용서한다고 상대방이 뉘우치고, 변화되고 새사람이 될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는 어떤 것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아들을 용서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연약함을 알면서도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기대를 내려놓고 기다려 주는 것.
용서라는 원어는 탕감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가면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면 개인적으로 충고하고 기회를 줘라. 그래도 또 그러면 두세 사람이 함께 가서 충고해라.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가 말을 하고, 교회 말도 안 들으면 이방인처럼 여겨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대해 설교하신 것으로 보여집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적 용서는 3번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는지, 예수님 형제가 제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이면 될까요? 엄청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 진 신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임금은 너 자신과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전재산을 다 팔아 갚으라 하니 이 사람이 꿇어 엎드려 ‘갚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간청하는데 임금이 불쌍히 여겨 이 빚을 탕감해 주었답니다. 그런데 빚을 탕감 받은 신하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보더니 멱살을 잡고 돈 갚으라 하고, 갚지 못하니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 얘길 임금이 듣고, 이 인간 안되겠구나 하면서 이 사람을 일만달란트 빚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라 했다는 얘깁니다. 그럼 이 사람 몇 년형 받았을까요?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었니, 1달란트는 아무것도 쓰지 않고 20년을 꼬박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럼 일만 달란트는요? 곱하기 만 = 20만년을 일해야 모으는 돈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큰 빚을 지게 되었는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20만년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 100데나리온의 빚진 친구를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은… 100일을 기다려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배려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Ephesians 4:32 NKRV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예수님은 동료, 곧 친구라면 서로를 위해 인내하며 기다려 주는 용서의 삶을 실천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화목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용서함으로 성령이 충만하게

구약의 용서는 덮다(to cover), 치우다(to lift away), 보내다(to send away)라는 의미로 표현됩니다. 신약에서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인한 분리입니다. 보혈의 능력이 죄인을 죄로부터, 곧 죄와 인을 분리시키고, 죄와 분리된 인, 사람에게 의가 연합하여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용서는 곁에 있다, 함께 있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하나님께 자신을 못박은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양옆에 강도들이 한 사람씩 달렸는데, 한 사람은 이 마당에 무슨 용서냐? 그럴 수 있으면 우리나 구원해라 하면서 예수님을 모욕했고, 다른 한 사람은 죄를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의를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눅 23:43)고 하셨죠.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마 28:10)이라 하셨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곁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게 어렵습니다. 미운 사람 안 보면 좋은데 곁에 있어야 한다니 보통 일이 아니죠.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라 해도 사실 육적인 삶에 더 익숙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래서 용서는 어렵고, 아니 어쩌면 불가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성령을 헬라어라 파라클레토스라 하는데, ‘파라’가 곁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 곁에 함께 하십니다. 바로 그 함께 하심이 우리가 용서받은 증거죠.
우리에게는 솔직히 용서의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늘 곁에, 함께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는 그 능력이 있죠.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빌어 사용하는 겁니다. 용서하는 일은 그렇게 주님께 속한 영적인 일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처럼 할 수 없습니다. 조금씩 실천해 가는 겁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하셨으니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지금도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서두에 언급한 영화 밀양은 상처로 가득한 여주인공이 밀양이라는 동네에 이사오는 데 처음부터 차가 고장이 나 견인 받아 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주인공은 견인하는 카센터 사장에게 밀양은 비밀 밀에 볕 양자, 비밀스런 빛이라고 말을 하죠. 존재하는 빛인데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빛, 그것이 밀양입니다. 밀자는 빽빽한, 촘촘한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드러나지는 않지만 가득하고 충만한 빛이 밀양입니다.
클 태, 볕 양이라 하면 큰 빛 태양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내 인생에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이 비추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죠. 그러나 빛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어둠은 사라져도 빛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보지 못할 뿐이죠.
성부 하나님이 태양과 같다면, 우리 곁에 계신 성령 하나님은 드러나지 않지만 언제나 어디서나 충만하게 비추시는 밀양과 같습니다.
영화에서 카센터 사장 송강호 배우는 처음부터 영화의 끝까지 주인공의 곁에, 혹은 배후에 항상 있습니다. 꼭 그렇게 있을 필요가 없는 것 같은 장면에도 그가 있습니다. 뒤에 흐리게 보이고, 거울에, 창에 비추어 드러나지 않지만 모든 씬에 촘촘하게 있는 겁니다. 밀양 이름을 가진 동네는 그 역할을 못하는데, 이 사람이 상처입은 사람에게 밀양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수많은 문제들의 연속입니다. 캄캄한 밤과 같은 시간이 옵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때에 대체 어디 계시는지 답답해하며 때로 원망도 할 때 있습니다. 왜 내 인생에는 찬란한 태양이 뜨지 않는 것인지?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그와 같은 때에도 은밀히 도우시는 하나님, 밀양처럼 비밀스럽지만 충만하게 비추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곁에 있고, 함께 있는 용서의 은혜! 우리는 이 아름다운 선물을 나누어야 합니다. 누군가의 곁에서 힘이 되어 주고, 함께 있음으로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파라클레토스 곁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 임마누엘 함께 하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일입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을 누리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용서의 은혜로 우리를 만나 주시고 만져 주십니다.
우리는 상처와 아픔을 미움과 증오, 분노, 두려움 같은 것으로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용서로 흘려보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감정에 기반한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곧 진리 말씀에 근거한 용서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네 어렵습니다. 그러나 겉빠속촉! 양보할 수 없죠.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으니 우리도 그렇게 살도록 지혜를 구하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용서는 우리가 속한 사회를 건강하게, 교회를 교회되게 합니다. 그리고 용서는 날마다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충만함을 누리게 하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용서하는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겁니다. 용서로 화목, 곧 하나됨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향나무는 자신을 찍는 도끼 날에도 향을 묻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향기나는 생명나무셨습니다. 우리의 신앙 가치는 예수님 닮는데 있다 했어요. 그렇다면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향기 나는 의의 나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를 고통스럽게 찍는 도끼날 같은 사람에게도 그리스도의 복음의 향기를 입히는 그런 나무 말입니다.
<나눔>
1. 겉빠속촉 만두 이야기로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2. 진정한 용서가 왜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라 할 수 있나요?
3. 용서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이고, 이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4. 용서와 성령님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나누어 봅시다.
5. 용서는 받는 것도, 베푸는 것도 어렵습니다. 왜 그런지 각자의 경험을 토대로 나눠봅시다.
<적용 및 목회적 제안>
먼저 자신을 용서하세요. 그러나 용서의 주체는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그리고 용서하는 삶을 살며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십시오.
누군가에게 잘못한 일이 있다면 속건제 예배를 드리세요.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보상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용서를 베풀 일이 있다면 우선 대상을 위해 기도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봅시다.
영화 밀양을 감상하고, 기독교인의 관점으로 평가하고 토론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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