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Notes
Transcript
[주일저녁설교]
인사
식사하셨습니까?
기도
하나님, 우리를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못난 우리의 모습도 사랑하시고 품어주셔서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주님께서 감싸주시고 위로하시고 회복해 주옵소서.
예배를 통해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드시고,
들으시고 하늘의 좋은 것들로 우리를 채워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팀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 하신 후에 박순녀 집사님 대표기도하시겠습니다.
성경봉독 요한복음 21:1-14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아동부 성경캠프 베개 싸움으로 전도사님을 공격하려는 배신자들
저는 예수님과 같은 성품이 못 돼서 다 때려주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시는 장면입니다. 이번에는 디베랴 호수에서 나타나시는데요. 디베랴 호수는 팔레스타인 땅 맨 위쪽에 있는 단 지역의 헐몬산에서부터 흐르는 골짜기의 물이 흘러 갈릴리 호수가 크게 만들어졌는데요. 그 커다란 갈릴리 호수 서쪽에 디베랴 도시가 있습니다.
디베랴는 기획도시입니다. 신도시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러나 지도층을 위한 기획도시였습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티베리우스 황제를 기리기 위한 도시였습니다. 로마 황제인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잘 보이고자 바친 이스라엘의 왕 헤롯 안티파스가 지은 도시입니다.
이스라엘 땅을 4곳으로 나눠가진 헤롯 분봉왕들은 각자 지역에 있었는데 헤롯 안티파스는 북서쪽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면서 디베랴 땅을 수도로 삼고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바친 것입니다. 온천이 나오는 도시여서 온천과 휴양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를 건설하려면 막대한 자금과 노동력이 필요합니다. 그 자원은 누가 감당해야 했을까요? 그 도시에 사는 지역민들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로마가 지어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로마에게 맞추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세금과 노동을 착취 당했습니다. 특별히 호숫가 지역이었기 때문에 도시민들의 주업은 어업이었습니다. 어업으로 겨우 먹고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아마 온 가족과 어린 아이들까지도 생계를 위해 어업에 뛰어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영화 어부의 딸에도 보면요. 노벨 평화상을 받은 말랄라 유사프자이의 영감을 받아 만든 영화인데요.
그 영화에서도 딸 아이는 학교에 가고 싶어하지만 아빠는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하는 생계 노동자입니다. 그런 어부들의 삶에서 헤롯 안티파스는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입니다.
배의 크기에 따라 세금을 거둬들입니다. 그리고 수확량과 상관없이 배를 띄우기만 해도 세금을 부과합니다. 또한 물고기를 보관하는 염장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염장 공장은 물고기를 부패하지 않도록 보관하고 수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부들에게 헐값에 납품하도록 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어부들에게 제대로된 값을 주지 않고 수확한 물고기를 헐값에 가져가서 외국에 팔아 돈을 모았습니다. 자국민의 노동을 착취해서 자신의 배를 불린 왕입니다.
그러니 디베랴의 어부들은 힘든 경제적 생활을 반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024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대런 애쓰모글루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 보면요.
“세상의 다른 가난한 나라드르이 공통점은 대다수 국민의 인센티브를 꺾어버려
필연적으로 가난을 초래하는 착취적 경제제도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p.16
국민을 착취하는 제도가 나라를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오히려 국민들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포용적 경제제도를 만들어주는 것이 나라 경제를 살리는 일입니다.
이처럼 권력자가 욕심을 내거나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그들의 일을 성공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돕는 것이 더욱 경제를 살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 안티파스의 권력 아래 국민들과 특히 디베랴 지역 어부들은 착취를 당하고 권력자만 배를 불리고 어부들은 가난해지고 나라 전체적으로 점점 가난해지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디베랴는 그런 아픔과 절망의 도시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특별한 의미가 있죠. 착취 당하는 자,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을 불러 제자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디베랴 지역이 또 다시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 제자들이 다시 돌아간 곳은 디베랴입니다.
갈 곳 없는 자들이 가는 땅, 가장 힘든 노동의 현장이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가야하는 취약한 일터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취약한 사회계층은 살기 위해서 또 다시 취약한 일터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베드로를 따라나서는 제자들
제자들도 예수께서 죽으신 후 모든 것을 잃고 소망도 잃고 가장 밑바닥인 배 타는 일로 돌아갔습니다. 숨는 마음으로 배를 빌려 탔습니다. 2절에서는 7명의 제자들이 베드로를 따라서 물고기를 잡으러 갑니다.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라고 하니 다른 제자들이 “우리도 함게 가겠다”하고 ᄄᆞ라 나섭니다. 제자들은 모두 7명이었는데요.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 요한, 또 다른 제자 둘입니다. 여기 제자들 중에 이름이 직접적으로 나온 인물은 누구냐면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입니다.
이 제자들만 이름이 나오고 다른 제자들은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름이 등장한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의 특징을 부각시켜 주려고 한 것인데요. 베드로는 어떤 제자인가요? 다혈질의 배신자였고요. 도마는 회의주이자, 나다나엘은 요한복음 1장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냐’며 무시했던 냉소주의자였습니다.
부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세 인물입니다. 다혈질과 회의주이자, 냉소주의자. 이들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을 예수께서 찾아가십니다. 찾아가셔서 베드로를 다시 뜨겁게 하시고 회의주의자 도마를 더 깊은 신앙으로 불러내시고,
냉소주의자 나다나엘을 따스한 품으로 품으시며 신비의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힘은 그러한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감정적인 사람, 회의주의자, 냉소주의자 같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부르십니다.
얘들아
한 밤 중에 어둠 가운데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르실 때 어떻게 부르시나요? 5절에 보니까 “얘들아” 부르십니다. 이 “얘들아”라고 하시는 말씀은 지금 두 번째 하시는 건데요.
처음에는 13:33에 나옵니다. 새계명에 대해 말씀하실 때 사용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싸우고, 가룟 유다가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그리고 ‘베드로가 나를 부인할 것이다’하는 예언을 하시기 직전에 서로 사랑하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나는 이제 떠난다. 그러니 너희끼리 서로 사랑해라
물론 우리 성경에는 “작은 자들아”라고 하셨지만 이 의미는 ‘얘들아’ 하시며 친근하게 부르시는 것입니다. 어린 애들 같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얘들아”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도 고기를 못 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마치 자기가 한 수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얘들아, 아직도 고기를 못 잡았니? 저기 오른 편에 던져라” 이렇게 한 수 보여주십니다. 어쩌면 제자들을 보기에 조금 어색한 상황이기 때문에 장난스레 물고기 잡는 법을 매개로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면서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의 말대로 했더니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많이 느껴 본 느낌이어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주님이시다”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듣고 바다에 뛰어들어 달려 들어갑니다. 약 100미터 정도 되는 거리를 달려갑니다.
숯불
그런데 예수께서 숯불을 피우시고 생선과 떡도 있었습니다. 여기 숯불이 등장하는데요. 이 숯불은 그냥 숯불이 아닙니다. 요한나복음 18:18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쬐던 숯불과 같은 단어입니다. 성경은 이 불과 숯불을 오버랩 시킵니다. 예수께서도 그냥 숯불을 피우신 것이 아닙니다.
안나스의 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은 잡혀서 신문당하고 있는데 자신은 춥다고 불을 쬐고 있던 그 불을 떠올리게 합니다. 불을 쬘 때 베드로의 얼굴은 환하게 보였을 것이고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 베드로라고 잡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부인했고 그 불을 사이에 두고 베드로와 예수님은 눈이 마주쳤을지도 모릅니다. 베드로의 부인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 그런 장면이 종종 나옵니다. 숯불을 사이에 두고 예수님과 베드로가 서로 눈을 마주치는 장면이요.
상처를 사랑으로 바꾸신다.
오늘 디베랴 해변에서 숯불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상처와 배신의 숯불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상처를 넘어가지 않으시고 따뜻하게 만드시며 먹을 것으로 바꾸십니다.
상처의 숯불, 그 사건을 떡과 생선을 굽는 불로 재해석을 하시는 것입니다. 상처의 숯불을 밥상으로, 환대로 바꾸십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의 상처를 그냥 무시하지 않으시고 그 상처를 새롭게 바꾸십니다. 상처를 치유하시고 사랑을 경험하게 하셔서 새롭게 나아가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마음을 느꼈고요. 이런 부족한 나를 받아주시고 밥상을 차려주시는 따스한 용서와 사랑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디베랴와 같은 삭막한 땅, 제각기 연약한 성경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 배신자, 상처입은 자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따스한 불을 피우시고 떡과 생선을 구워주십니다.
그 따스하고 감성 있는 캠핑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모습이건, 어떤 잘못을 했건, 어떤 부끄러운 것을 가지고 있건 상관 없습니다. 그냥 조반을 먹으십시오. 주님의 밥상과 사랑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의 형편도 아시고, 실수도 아시고, 못난 모습도 아시는 주님께 우리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부끄럽지만 그저 주님의 품에 안겨 그 사랑을 누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송가 290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