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잠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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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4:33-40
“교회에서 잠잠하라”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2025. 2. 3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교회에서 잠잠하라”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교회에서 잠잠하라. 사실 이 말이 고린도전서에서 총 세 번 나와요. 오늘 본문 위에 28절을 봐 볼까요? 28절을 보면, 통역하는 자가 없을 때는 방언하는 자가 잠잠하라고 그랬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
두번째는요, 30절입니다. 30절은 예언하는 자에게 잠잠하라 그랬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누가 먼저 예언을 하다가 다른 사람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예언을 하게 되면, 먼저 하던 사람은 잠잠히 있어야 됩니다. 오늘날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고린도교회는 갑자기 감동을 받아서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러면 먼저 하던 사람은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세번째로 잠잠하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오늘 본문 34절이죠. 3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아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러분, 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랬을까요? 우리가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성차별적인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남자는 말해도 되고 여자는 말하만 안 되나?
그런데 이 말은 그런 말이 아니에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은 예배시간에 잠잠하라는 말입니다. 잠잠하라는 말이 총 세 번 나왔는데, 이 말이 다 예배시간에 잠잠하라는 말이거든요. 예배가 순조롭게 잘 흘러가기 위해서, 예배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잠잠하라고 말하는 겁니다.
특별히 세 번째 잠잠하라는 말은 여자들에게 하고 있거든요. 이는 곧, 여자들이 예배를 방해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예배시간에는 말을 하면 안 되죠. 특히 설교시간에는 조용히 설교자의 말에 집중해야 됩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설교시간에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바로 여자들이죠. 여자들이 말씀을 안 듣고 떠들어요. 여자들이 왜 떠들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1세기의 시대적인 배경을 이해해야 됩니다.
오늘날에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공부를 많이 해서 여자들이 굉장히 똑똑하죠. 하지만 1세기의 여자들은 공부를 한 적이 없어요. 남자만 학교를 보내고 여자는 학교를 안 보냈기 때문에 글도 잘 모릅니다. 글도 모르고 조금만 어려운 말을 들으면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해요. 여자들이 머리가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배우지를 못해서 그런 거죠. 배움의 기회가 없어서.
그러다보니까, 설교시간에 설교말씀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해를 못하니까 집중을 못해요. 집중을 못하니까 자기들끼리 떠드는 거죠. 1세기에 교회는 남자와 여자가 따로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남자들끼리 앉아있는 쪽에서는 조용히 말씀을 듣는데, 여자들끼리 앉아있는 쪽에서는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어요. ‘개똥이 엄마, 저것이 먼 말이데? 나도 몰라. 저것이 먼 말이여? 우리말은 맞는거여?’ 속닥속닥 자기들끼리 말하는데, 예배에 방해가 될 정도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참다 못해서 말을 하는 거예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4세기에 대단한 설교자였던 크리소스토모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이 사람이 얼마나 설교를 잘했는지, 별명이 “황금의 입”이었어요. 황금의 입. 얼마나 설교를 잘했는지 짐작이 되시죠? 이 사람이 하루는 안디옥 대성당에서 설교를 하는데, 설교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자들은 시장이나 목욕탕에서보다 예배시간에 더 말을 많이 한다. 저들의 대화에 설교가 방해를 받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설교중에 이런 말을 한 겁니다. 오죽했으면 이런 말을 했겠어요? 예배당이 무슨 돗데기시장도 아니고, 말씀은 안 듣고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으니까 예배에 방해가 되고, 예배가 무질서해져요.
여러분, 예배는 질서가 있어야 됩니다. 교회에서는 모두가 그 질서를 따라야 돼요. 오늘 본문 33절에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그랬어요. 그런데 왜 너희가 예배를 무질서하게 만드냐는 겁니다. 반드시 질서를 지켜야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여자들에게 말씀합니다. 35절인데요. 35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아멘.
말씀을 배우고 싶으면 집에서 해라. 예배시간은 말씀을 듣는 시간이지 질문하는 시간이 아니에요.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예배질서입니다. 기본적인 것부터 우리가 지켜야 돼요.
자, 그러면서 바울은 이제 단락을 끝마치면서 자기가 선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책망을 합니다. 37절을 보면, 고린도교회에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37절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아멘.
자기를 선지자나 신령한 자로 생각하는 자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자기들의 말만 진리이고, 다른 사람의 말은 진리가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들이에요. ‘나는 선지자야. 그러니까 내 말은 진리야. 하지만 너는 선지자가 아니지? 네 말은 진리가 아니야.’ 이렇게 말씀에 대해서 교만한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바울도 인정을 안 해요.
그런 자들에게 바울이 말하는 겁니다.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쉽게 말해서 이런 말이에요.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도 주의 명령이다.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을 안 한다면, 너희 다 가짜야.’ 이런 말이에요. 하나님의 말씀도 못 알아보면서 너희가 무슨 선지자냐? 라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은 누군가가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교회에서는 누구든지 성령의 감동과 계시를 받으면 예배시간에 차례를 따라 말씀을 전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무시하고 내 말만 진리라고 주장을 한다면, 그 사람은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닌 것이죠. 성령의 은사에 대한 기본개념이 안 잡힌 사람이에요.
그래서 38절에 바울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바울의 편지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바울의 편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돼요. 왜냐하면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편지를 썼기 때문에.
우리가 바울의 편지들을 성경으로 인정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죠.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썼어요. 그래서 그것이 진리인 겁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따르지 않으면 가짜가 되는 겁니다.
고린도교회에는 바울을 따르지 않는 가짜들이 많아요.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가짜들이 많습니다. 바울을 무시하고 성경을 무시하면서, 새 시대에는 새로운 계시가 필요하다고 말을 해요. 그러면서 이제는 동성애를 인정해야 된다고 그러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예요. 우리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배경에서 쓰여졌는지, 연구하고 제대로 해석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아요.
바울은 바로 그러한 이유로,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예언과 방언을 사모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식만으로 되지 않고,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령한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39절에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는 겁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아멘.
바울은 예언이나 방언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사모하라고 말하고 있어요. 바울은 모든 성도가 다 예언하기를 바라고, 모두가 다 방언하기를 바랍니다. 다만, 여기에는 조건이 있어요.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조건이 있느냐? 그것이 오늘 본문 40절 내용입니다. 4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아멘.
우리가 은사를 사용함에 있어서 반드시 품위 있게 해야 하고,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 품위라는 것은 격식이 있다는 말이에요.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격식에 맞게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질서가 있어야 돼요. 절대로 예배의 질서를 어지럽혀서는 안 됩니다.
질서를 어지럽히는 모든 것은 잠잠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예언이나 방언이라 할지라도, 예배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면 멈추고 잠잠해야 합니다. 또 말씀이 이해가 안 되고 궁금해도 잠잠해야 돼요. 내가 궁금하다고 해서 옆사람을 방해하면 안 됩니다. 궁금한 것은 예배후에 물어보든지, 아니면 집에 가서 물어보든지 해야겠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과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화평과 질서의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인생이 화평과 질서를 따라 품위 있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시기 바랍니다. 정치 때문에, 경제 때문에 일희일비 하지 말고, 품위 있게, 질서 있게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