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신 뜻에 참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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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2:1–2 NKRV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간 자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
에스라 2:68–70 NKRV
어떤 족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 터에 이르러 하나님의 전을 그 곳에 다시 건축하려고 예물을 기쁘게 드리되 힘 자라는 대로 공사하는 금고에 들이니 금이 육만 천 다릭이요 은이 오천 마네요 제사장의 옷이 백 벌이었더라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 몇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고 이스라엘 무리도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라

복음, 무엇에 참여해야 하는가?

우리는 계속해서 에스라를 살펴보며 복음에 대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도 복음을 놓고 함께 고민할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큰 은혜가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저번에 우리는 복음이 우리안에 가득할 때, 우리안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나눴었습니다.
복음이 우리안에 가득하게 된다면, 우리의 일상속에서 하나님의 주시는 놀라운 말씀들을 경험하며 느끼며 관점이 바뀌는 것을 나눴었죠.
오늘은 복음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함께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문득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두고 우리의 삶속에, 이 교회에, 나라와 민족을 이뤄가시는데, 복음을 누리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말씀으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기쁘신 뜻에 참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참여하는 것은 어떻게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 것일까? 오늘 말씀을 같이 고민하면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참여하는 하나님의 가이드를 함께 살펴보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사람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정말 쉽게 넘어가기 쉬운 말씀입니다. 왜냐면 우리랑 전혀~ 상관없다고 느껴지는 족보, 또는 명단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는 장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구약에서 족보나 명단은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때가 있는데, 창세기를 예를 들면 중간중간에 계보들이 나옵니다. 족보들이 나오고 나면 그 다음 서막이 열리게 됩니다. 종종 족보에는 그 다음장의 키포인트를 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5: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아담부터 노아의 족보에 이르기까지 노아가 어떤 인물이 될지를 보여주죠.
창세기 11: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아브라함의 족보를 소개하면서는 아브라함의 결핍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신약에서는 처음으로 세워진 7집사의 명단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신약은 주로 이슈를 안고 갈 포인트의 인물을 명단 마지막에 넣고는 하는데 니골라 집사는 훗날 이단문제에 얽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의 명단에서 유다가 가장 마지막에 소개되는 것도 그렇죠.
이처럼 명단은 지나가기 쉽지만 영화의 서막을 알리는 것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고레스가 칙령을 내린 후 70년이라는 세월을 타국에서 정착하며 자리잡은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 소식을 들은 후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동안 살던 땅에서 계속 살 것인지 칙령의 내용을 따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참여하기 위해 그동안 살던 땅을 떠나 고향 나라로 들어가야할 지 선택해야했습니다.
고향땅으로 돌아가길 선택하면 그 땅에서의 삶을 보장해준다고 말했지만 적응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그럼에도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기쁨, 또 이스라엘의 정체성이었던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을 지을 수 있는 기쁨의 소식을 듣고 반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에스라 2:64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요”
약 42,300명 정도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반응했습니다. 정말 이스라엘 민족의 전체를 생각해본다면 소수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기쁘게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명단이 성경에 기록되어 오늘 날 우리에게도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죠.
이 명단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누리기 위해서 참고할 가이드를 우리에게 제시해주시는데 몇가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기쁘신 뜻의 참여는 제한이 없다.

첫번째로 복음을 누리는 것,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참여하는 것에는 제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명단을 살펴보면 특이한 구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민족, 가문을 대표하는 명단들이 있는가 하면 가문을 대표하는 명단이 아닌 또 다른 명단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돌아온 인원들의 명단 속에서는 특정 가문을 대표하지 않은 명단들이 등장하는데, 첫번째는 외국인들의 명부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에스라 2:12 “아스갓 자손이 천이백이십이 명이요”
에스라 2:14 “비그왜 자손이 이천오십육 명이요”
아스갓 자손, 비그왜 자손의 이름은 정통 히브리어에서 나온 이름들이 아닙니다. 아스갓은 이집트 아람어에서 등장한 이름이며, 비그왜라는 이름은 페르시아 이름이라는 것이죠.
분명히 우리는 포로기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들이 돌아왔고, 이 명단은 이스라엘 민족들의 명단이라고 알고 있는데 왜 외국인 명부가 있는걸까요? 이들이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인정되는 것일까요?
또 특이한 것이 있습니다.
21절부터 35절은 가문의 자손들을 말하기 보다는 각 지역에 속한 사람들을 명단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에스라 2:21 “베들레헴 사람이 백이십삼 명이요”
에스라 2:28 “벧엘과 아이 사람이 이백이십삼 명이요”
에스라 2:34 “여리고 자손이 삼백사십오 명이요” 등 지역에 속한 사람들이 명단으로 소개 된다는 것이죠.
바벨론의 정복된 이후, 이들이 어떻게 이스라엘 사람들로 인정되는 것인지 확인하기 쉽지 않지만, 그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족보를 가지고 있거나, 그 지역에서 살았던 기록을 가지고 있거나 했을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에 대한 소개는 조금 신기합니다.
남쪽 베들레헴을 시작으로 아나돗,아스마벧등 북쪽으로 체피라, 베롯등 북서쪽 벧엘과 아이로 이동하여 엘람 하림으로 남서쪽으로 이동하는 등 이스라엘의 전역을 한바퀴도는 것처럼 명단이 소개된다는 것이죠.
이들이 어떤 가문 출신인지는 명확하지 않을 지 모르지만,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고백하며 성전재건에 참여한 사람들이라는 것 만큼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이 표현들은 옛 이스라엘 영토의 전역의 사람들이 마음을 담아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명단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은 다양합니다. 다양한 이론 속에서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들이 외국인의 이름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성전이 재건된다는 기쁜 소식앞에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지금 이 곳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들이 누구의 자손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전 지역을 대표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죠.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명부가 성경에 기록되게 하셨다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참여하는 것에는 어떤 제한도 없이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속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든, 지금의 나의 상황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기쁘신 일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기쁨으로 참여하는 것에는 제한이 없다는 것이죠.
외국의 이름으로 평생을 살며 가정을 이뤘던 사람도 성전이 재건되는 기쁨 앞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고백이 있을 때, 함께 참여하게 된 것 처럼, 가문의 목록은 없지만 이스라엘을 고향으로 알고 살던 그 자손들이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듣자 그 말씀에 반응하여 참여한 지역의 자손들 처럼,
우리도 때때로 하나님과 멀어져 있어, 시대라는 이름을 입고 살고 있었을 지라도, 세상이라는 지역속에서 영적 고향,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마음을 품고 살고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발견되었을 때 기쁨으로 참여하는 것에 제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그래서 제한이 없습니다. 주님의 복음이라는 놀라운 기쁨 앞에 참여하고자 하는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습니다.
설령 나의 삶이 하나님앞에 그동안 부끄러웠을 지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는 일, 즉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인 나를 말씀앞에 세우는 일, 주님의 이름앞에 모인 교회라는 영적공동체를 함께 세우는 일에 어떤 제한도 있지 않다는 것이죠.

2. 기쁘신 뜻의 참여는 등급이 없다.

그렇다면 두번째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참여하는 것은 제한이 없지만, 하나님의 기쁘신 뜻의 참여할 때 우리는 등급을 매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깨달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꺼이 다시 성전을 세우고 예배를 세우는 일에 기쁨으로 참여했지만, 유독 참여가 저조했던 그룹이 있었습니다.
에스라 2:40 “레위 사람은 호다위야 자손 곧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이 칠십사 명이요”
그것은 바로 레위인들인데, 우리가 알기에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제사장들을 도와 성전의 일을 돕는 귀한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아닌가요? 그래서 이들은 분깃은 없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배를 세우면서 십일조와 헌물들을 가지고 생활 할 수 있는 충분히 기쁜 자리임에도 레위인들은 이 소식에 참여가 저조했습니다.
반면 제사장의 가문들은 어땠을까요?
에스라 2:36 “제사장들은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이 구백칠십삼 명이요”
제사장은 973명이나 될만큼 많지만 레위인은 왜 74명 뿐일까요?
제사장은 당시 예배의 전면에 나서는 중요한 직책이었습니다. 2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평신도 그룹은 약간의 정통성이 확인이 어려울지라도 용인되었다면 제사장들은 제사장 가문이 확실하게 증명된 인원들만 명단에 기록한 것처럼, 드러나는 자리에서 상징적인 역할을 했었죠. 반면 레위인들은 성전 기물을 관리하거나 예배 집례를 돕는 등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일하는 역할이어서 상대적으로 고생에 비해 인정을 덜 받는 자리였습니다.
바벨론에 멸망을 당한 후, 레위인들의 입장에서 오히려, 자신들의 정착할 터전이 생기고 생계가 안정이 되자, 굳이 불안정한 성전을 섬기는 일을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가뜩이나 눈에 띄지 않는 힘든 일인데, 그렇다고 지금 당장 성전이 완성된 것도 아니어서 더 눈에 띄지 않고 힘들 것 같은 일에 굳이 참여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었죠.
결국 에스라는 8장에서 급하게 레위인들을 모았습니다. 그럼에도 추가로 섭외된 38명의 레위인들을 제외하고는 220명의 성전봉사자로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레위인들을 묵상하며, 어쩌면 우리 안에서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참여할 때, 등급을 매기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참여하고 있는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선호하는 사역과 기피하는 사역, 또 선호하는 양육과 기피하는 양육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항상 사역지에서 마다 겪는 일중에 하나가 연말에는 각 부서에서 함께 사역할 분들을 모집하고는 하는데, 가장 모집이 어려운 부서들을 살펴보면, 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거나 힘든 일을 하는 부서에는 참여가 저조합니다.
예를 들어, 찬양팀, 성가대를 모집하는 경우 어느교회나 마찬가지로, 신청자가 많지만, 미디어팀이라던지, 차량주차팀, 디자인 같은 보이지 않는 사역은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주일학교 교사라던지 이런 사역은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니 연말이 되면 담당사역자들의 공통적인 고민이 내년에는 교사분들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양육은 어떤가요? 제가 다른 부서를 섬길때 보면 소그룹, 기초양육, 양육반 같은 것은 정말 참여율이 좋은데 이상하게 제자훈련 참여가 저조했는데, 그 이유중에 하나는 제자훈련을 받으면 리더로 섬겨야해서, 너무 힘들기 때문에 안하겠다고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참여하는 것은 정말 보이지 않는 다양한 영역에서 이뤄집니다. 그 사역들은 보여지는 사역이나 보이지 않는 사역이나 한 몸을 이루는 교회를 세워가는 데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또 양육훈련들 또한 개인의 성전, 영적 성장을 하는데에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이걸 수료하면 이걸 해야하고 라는 어떤 라이센스가 아니라 그 훈련들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함을 누리는데 중요하죠.
하지만 우리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어, 때때로 사역이든 양육이든 어떤 것을 참여하는데 등급과 난이도를 매기고 참여하거나 참여를 망설이고는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에 등급을 매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레위인들이 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참여하고자 하는 성전봉사자들을 통해 그 축복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이죠.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참여하는 것에, 등급과 난이도를 매기지 않고 기쁨으로 참여하며 예비하신 축복들을 마음껏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3. 기쁘신 뜻을 참여하는 것은 강요가 아닌 선택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는 제한도 없고 등급도 없지만 모든 것은 자발적인 순종과 헌신으로 함께 이루어가신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참여하는 것은 강요가 아닌 마음에서부터 일어난 선택으로 이뤄진다는 것이죠.
에스라 2:64–67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요 그 외에 남종과 여종이 칠천삼백삼십칠 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 명이요 말이 칠백삼십육이요 노새가 이백사십오요 낙타가 사백삼십오요 나귀가 육천칠백이십이었더라”
하나님의 성전이 다시 지어진다는 기쁜 소식속에 반응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수를 비례할 때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은 고레스가 칙령을 내린 후 그 칙령의 소식앞에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죠.
그 결과로 성경에 명단이 세겨지며, 하나님의 일에 참여한 사람들로 기록되어지게 됩니다.
간혹 이런 표현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정말~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저를 여기로 끌고 오셔서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정말 위험한 말입니다. 또 다르게 얘기하면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죠.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하나님의 섭리를 하나로 오해하고는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의 모든 것을 미리 정해놓았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반대해도 나는 그 길을 가게 될 것이다.
크게 본다면, 맞는 말입니다. 인생을 통틀어 뒤돌아보면 하나님이 나를 위험에서 건지시고, 나를 끝까지 돌봐주시며 구원으로 인도하셨음을 우리는 발견하죠. 이걸 우리는 성도의 견인이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건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작정을 말할때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 작정을 이뤄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식을 말하는데, 이것은 사람의 선택과 함께 만들어져가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죠. 하나님의 구원작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태초전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이 죽을 때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구원을 얻던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만나 구원을 얻고 죽을 때 까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되던지 하나님의 계획은 변함이 없으시죠.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을 설명할때, 포도원 품꾼의 비유와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의 이야기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섭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속에 일하시는 방식인데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예를 들어 나를 통해 A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데, 제가 거기에 반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안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또 다른 B를 통해 그 A를 구원하시는 것이죠.
우리의 삶의 다양한 선택이 하나님께 전혀 영향이 없는 것도 이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자리에 있도록 허락하시든 그것은 내가 기쁘게 참여하는 것이죠.
제가 목회자로 있던, 평신도로 있던, 선교지에 있던 하나님의 구원 작정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저는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상황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 하나님안에서 기쁨으로 참여하길 선택한 저의 자발적 참여로 인해 만들어지는 모든 상황과 모습들, 지금의 저의 자리가 섭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반응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선택하면서 현재는 이 목회의 자리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의 이 명단에 제외되어 있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구원을 누리지 못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2차 귀환 등 다양한 역사의 흐름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섭리, 일하심을 보게된 약 사만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분의 놀라운 역사를 실제로 경험하고 보며, 믿음이 성장하고, 더욱더 하나님안에 깊어져갔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원을 받고 백성으로 사는 것과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그 역사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깊이 느끼고 경험하며 자라가는 것은 인생의 순간 순간 하나님이 주시는 선택의 기회 속에서 우리가 그 기쁘신 뜻에 참여하기로 결정할 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참여하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우리의 삶속에서 다양한 영역 속에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잃어버렸던, 그 동안 놓치고 있던 하나님의 성전이 다시 재건된다는 기쁜 소식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놓치고 있던 우리의 영적 성전을 잘 세워가고 계신가요?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성전을 재건하자고 말씀하십니다. 분주함과 일상속에서 놓치고 있던 주님의 말씀이 우리안에 기쁘신 뜻으로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복음이 외쳐지고, 복음이 울려퍼지기를 소망하며 우리가 계속 나아가고 있는 이 때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계속해서 우리가운데 선포되어지고 기쁘신 뜻에 참여하는 것에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를 향해 내밀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는 어떤 제한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의 일상의 분주함도, 나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짐도,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참여하는 것에 제한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는 등급이나 난이도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볼 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어느 곳에서나 동일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기쁘신 뜻은 하나님이 강제하시거나 비인격적으로 끌고 세우시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가 마음을 두고 기쁨으로 참여하기를 선택할 때, 하나님이 그 속에서 준비해 주시는 은혜들을 마음 껏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이렇게 마무리가 되어져 갑니다.
에스라 2:68–69 “어떤 족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 터에 이르러 하나님의 전을 그 곳에 다시 건축하려고 예물을 기쁘게 드리되 힘 자라는 대로 공사하는 금고에 들이니 금이 육만 천 다릭이요 은이 오천 마네요 제사장의 옷이 백 벌이었더라”
기쁘게 드리고, 힘 자라는 대로 들였다고 마무리되어져 갑니다.
올 한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위해 강력하게 외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가요?
복음으로 세워져가는 공동체! 복음이 울려퍼지는 교회 아닙니까?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우리의 영적 성전을 재건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워야 할 성전은 어떤 것인가요?
먼저는 나라는 성전을 세워야 합니다. 성령의 거하시는 전인 나라는 성전, 나의 영적 성장을 위해 우리가 시간과 마음을 내어 기쁘게 참여하며, 힘이 자라는 대로 참여해야 할 것 입니다.
그동안 우리 공동체에서 기도하며 꿈꿨던 양육들이 하나씩 준비되어 이제는 시작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개인의 영적 성장의 시간에 기쁨으로 참여하길 지금부터 기도하며 준비하시면 어떨까요?
또 하나의 세워야할 성전은 바로 우리의 공동체, 교회입니다.
올 해도 다시 세워지는 3부 예배와 보이지 않는 곳, 사역 속에서 많은 섬김이 필요합니다. 당장 2월에 진행될 오붓한 식탁의 교제도 손길들이 필요한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다양한 공동체의 사역속에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시길 선택하며, 각 영역에서 준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간 함께 찬양하며 기도하길 원합니다.
기도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반응하기 원합니다. 첫번째로 기도하실 때, 주님의 기쁘신 뜻을 나의 생각으로 제한하지 않겠습니다. 내 기준에 가두지 않고 주님의 뜻에 기꺼이 반응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주장하여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2. 두번째로 기도할 때에, 주님의 크고 놀라운 계획을 의지합니다. 주님이 보여주시는 놀라운 계획과 일하심에 참여하길 원하오니 주님 내미시는 손길을 굳게 잡고 기쁨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마음과 상황을 열어달라고 함께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3. 마지막으로 교회가운데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우리 모든 공동체가 함께 누리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구하길 원합니다. 복음을 마음껏 누리며 나눠지길 원하시는 주님, 우리 곁에있는 교회가 더욱더 복음이 풍성하게 나눠지도록 은혜를 부어달라고 함께 기도하며 가져오신 기도제목을 올려드리며 나아가겠습니다. 함께 주여 부르짖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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