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칠 정도로 멋진 복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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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하나님의 아들
예수, 하나님의 아들
‘복음’이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소식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누구인지,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왜 구원하셨는지에 관하여 설명하는 이것은 간단하게 말하기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복음’이 사실적 정보전달이나 논문이 아니라 이야기로 전해지는 이유는 그것이 아주 복잡한 개념을 설명할 때 훨씬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감정과 경험을 통해 의미를 전달한다.
예를 들어 ‘자기희생은 매우 중요합니다.’라는 사실을 직접 전하기 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서사를 들려주는 것이 훨씬 기억에 남고, 의미도 잘 전달됩니다.
이미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도무지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하기 힘든 범주의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 그들을 만난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하는 질문인 ‘도대체 예수가 누구요?’라는 질문에 답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마가복음 1:1 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옛 선지자가 예언했던 그 메시아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며 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이야기 한 것이다.
마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더 설득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것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다윗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그가 육체적으로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며 복음을 이야기하였다.
이후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에 충만하여질 때에 예루살렘에 큰 전쟁과 박해로 인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다. 역설적이로 이 사건을 통해 복음은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이제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을 누가가 쓰기 시작하였다. 누가는 바울과 아주 친밀한 의사이자 역사학자였다. 그는 이 예수의 복음이 유대인만을 위한 복음이 아닌 모든 인류를 위한 복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의 족보를 뒤로 거슬로 올라 3장에서 설명하는데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 가게 되었다.
이제 비로소 복음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의 것이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나눌 요한복음이 마지막으로 쓰여졌다.
요한의 서술 연대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시간이 존재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것은 매우 충격적이면서도 깊고 심오하고 혁신적인 메시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고 만져본 그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던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이 믿기 힘들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을 설득하기 위해 요한복음을 써내려 간다.
그는 이 책을 쓴 이유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누구인가?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요한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진리의 말씀
예수, 진리의 말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지금까지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물론 뉘앙스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나타낸 말씀들은 있었지만 이렇게 파격적으로 예수님을 표현한 글은 복음서 중에는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뉘어집니다. 과학은 그것에 대하여 계속 탐구하고 인지할 수 있는 것만이 사실이라고 주장했지만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과학을 통해 그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인지할 수 없는 세상에 관하여 ‘영적이다’라고 표현합니다. 요한복음은 그 영적인 세상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 해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태초’라는 단어가 창세기에도 나오고, 요한복음에도 나옵니다. 이 두 단어는 같은 의미이지만 다른 시작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태초’는 창세기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태초’는 그보다 이전의 시작으로 우리가 알 수 없는 시작점입니다. 그러므로 그 영역은 ‘영적’인 영역으로 이해하고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태초라는 시점에 ‘말씀’이라는 대상이 있는데 이 대상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런데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말씀은 우리의 이성이나 상식으로 풀려고 하면 오류가 나기 쉽습니다. 그 말씀은 그대로 두고, 이후에 성경의 말씀이 말씀을 해석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그의 아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조금씩 알아가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만물이 말씀으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가장 먼저 ‘빛이 있으라’하셨습니다. 이것이 말씀이지요?
그 말씀으로 ‘빛’이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는 빛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빛은 태양을 통해서 비추는 빛입니다. 이것은 먼저 만들어진 빛의 모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넷째날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첫째날에 만들어진 이 빛은 무엇이냐?
이것은 영적인 ‘빛’인데, 진리의 빛이며 생명의 빛 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여기서 땅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덮여있습니다. 그런데 진리와 생명의 빛이 비추니 이 모든 것이 구분되어졌습니다.
이 빛은 자체로 발광하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마치 태양과 같이 빛이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신 사건이 있습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이 빛이 바로 진리와 생명의 빛이며 아담의 죄로 인하여 사람들은 이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계시록에서 다시 그 빛을 찾게되는 이야기로 인류의 구원이 완성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벌거벗은 것을 깨닫고 나뭇잎으로 수치를 가립니까? 그 전에도 벌거벗었는데 단순히 생각이 바뀐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비추던 빛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이 빛을 잃어버린 이후에 끊임없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방황하고 괴로워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빛을 찾기 위한 여정을 계속 해왔습니다.
그 빛은 여러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지는데 그 중에 한 가지가 바로 글과 말 입니다. ‘말씀’은 글일수도 있고 말일 수도 있으며 소리일수도 있고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다고 규정하는 순간 아닌 것이 됩니다.
그 진리의 빛이 이 예배를 통해 이 말씀을 통해 우리 가운데 우리의 삶을 비추고 계심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 가운데 오셔서 진리의 빛으로 우리를 비추고 계십니다.
그 빛이 비치는 곳마다 혼돈했던 것들이 질서있게 변하고, 공허했던 것들이 의미로 가득 차게되며, 어두었던 것들이 밝게 빛나게 됩니다.
그래서 계속 비추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이 미칠 정도로 멋진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삶이 송두리째 진리의 빛으로 비춰지는 경험을 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