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누리는 사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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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ut
헌금기도
사랑의 주님, 한 주 간도 은혜 가운데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시간 하나님 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우리의 마음을 받아주시고
시간마다 뜻과 정성을 다해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나오며,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주실 은혜를 사모하는 심령으로 귀한 예물 드리는 손길들 있습니다.
감사헌금, 일천번제, 00헌금, 00헌금을 올리오니 받으시고
기도의 제목마다 응답하여 주시고 하늘의 문을 열어 주시옵소서.
더 많이 섬기고 나눌 수 있도록 더 큰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부족한 종이 말씀을 대언할 때,
저의 연약함은 십자가 뒤에 감춰주시고
하나님의 지혜만 나타나게 하옵소서.
말씀을 사모하여 주 앞에 나온 우리 영혼을 불쌍히 여기사
성령으로 기름부어 주시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옵소서.
오늘도 그렇게 일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모든 말씀 오늘도 살아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
요한일서 1장 1~4절 말씀입니다.
요한1서 1:1–4 NKRV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할렐루야~ 우리 앞 뒤 옆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서론
오늘은 특별히 이룸청년부 새봄수련회로 모였습니다.
새봄수련회 첫 시간을 이렇게 집회로 시작했기 때문에,
사실 이 시간이 개회예배면서 동시에 첫째날 저녁집회입니다.
그래서 함께 수련회 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위에 걸린 현수막에 뭐라고 적혀있나요?
Embrace Relationship
엠브라스, 포용하다. 품다.
릴레이션십, 관계
관계를 포용하라. 서로를 품으라. 더 깊게 나아가면
서로 사랑 안에 하나되라.
이번 수련회의 주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일서 1장 1~4절 말씀을 통해
“더불어 누리는 사귐” 즉 성도의 교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세상에서는 절대로 찾을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것임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함께 입증해보기 원합니다.
우리의 교제가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우리가 누구와 더불어 사귐을 갖는 것인지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욱더 교제를 사모하고,
함께 교제하는 가운데 충만한 기쁨을 얻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론
교제란 무엇인가?
오늘 본문의 요한일서는 사도요한이 쓴 편지입니다.
요한은 주후 85년에서 96년 사이에,
밧모섬에서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
이 편지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장로로 섬기던 에베소 교회에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의 대상은 2절의 인사말에 적힌 것처럼 “너희”입니다.
이 말은 특정한 대상을 알 수 없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 편지를 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요한은 이 편지를 통해서
자신의 삶의 마지막에 다음세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요?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구절이 3절입니다.
요한1서 1:3 NKRV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사도요한은 이 편지를 통해서 그당시 동역자들과 함께
보고 들은 것을 다음세대에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특별합니다.
보통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누군가에게 전할 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전합니까?
내가 이번에 그랜트캐년을 다녀왔는데,
와, 왜 BBC에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1위로 뽑은지 알겠어.
지각판이 충돌하고, 바람과 물이 깎여서 만들어졌는데...
이건 설명해도 몰라. 직접 가봐야해.
왜 이러는걸까요? 자기 다녀왔다고 자랑하는거죠.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는 보통
보고 들은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동역자들과 함께 보고 들은 것을
다음세대에 전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나요?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
이것이 사도 요한이 다음세대에게 요한일서를 남기는 이유입니다.
사도행전 2:42 NKRV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여기서 사용되는 ‘교제’라는 단어가
바로 사도 요한이 본문에서 말한 ‘사귐’과 같은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코이노니아’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통해 원했던 것이 바로 ‘코이노니아’,
즉 사귐, 교제입니다.
요한은 사도로서 이 편지를 통해 가르침을 전달하고,
그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서로 교제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 42절에 말하는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요한이 나누기 원했던 사귐. 교제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보통 ‘교제’라고 하면 좁은 의미에서 ‘대화’를 생각합니다.
교제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은
성도가 함께 대화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식사교제’라고 하면, 밥을 먹으면서 대화하는 것입니다.
‘분반교제’는 반을 나눠서 대화하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교제’는 단순히 ‘대화’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표면적으로 보면, ‘대화’라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단순히 ‘대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제’는 대화를 통해 서로의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제라는 단어보다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사귐’이라는 단어가
더욱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교제’, ‘사귐’을 나타내는 헬라어 ‘코이노니아’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면,
더욱 자세히 그 의미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14 NKRV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첫째, 교제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이 서로 사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빛과 어둠은 서로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은 빛끼리, 어둠은 어둠끼리 사귀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귀다’는 단어가 ‘코이노니아’, 교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귀다는 의미는 속성이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속성이 다르면 사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즉, 구별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귀는 것은,
세상의 어둠과 혼합되지 않고, 하나님의 삶과 방식으로 구별되어
믿는 자가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불신자들과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죄악된 가치관에 타협하지 말고
거룩한 구별됨을 유지하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의 교제입니다.
고린도후서 13:13 NKRV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둘째, 교제는 서로 연결되어 교통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통하심을 ‘코이노니아’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교통하다는 의미는 서로 연결되어 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전기가 콘셉트와 전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흐를 때, 교통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우리와 교통하시는 것은
우리 안에 한 몸으로 연결되어 소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안의 교제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하나로, 한 몸으로 연결되어서
서로 소통하는 것이 바로 교제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우리가 각각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교제는 더욱 특별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6 NKRV
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셋째, 교제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여’라는 단어가 ‘코이노니아’로 쓰였습니다.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여하는 것,
이것이 곧 교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교제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함으로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닮아가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을 우리 모두가 함께 함으로
공동체가 함께 예수님을 닮아가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의 교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교제는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영적 교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 안에 예수님 없이는 온전한 교제가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몸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는 자리인데,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시기로 결단하는 자리인데,
주인공인 예수님이 없이 그리스도에 몸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15:26 NKRV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넷째, 교제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연보’라는 단어가 ‘코이노니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연보는 우리말로 표현하면 구제, 나눔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성도를 위해서 구제한다.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표현하면, 가난한 성도를 불쌍하게 생각해서
동정한다는 이미지가 더 강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구제, 나눔보다는 사랑의 실천에 더 가깝습니다.
우리가 받은 영적인 은혜, 은사, 물질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성도가 있으면 기꺼이 기쁨으로 주는 것입니다.
또는 나의 도움, 나의 은사가 필요한 사람에게
기꺼이 나의 시간과 에너지와 열정을 쏟아내어 도와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재능과 물질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을 물질로 도울 때도
내 것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성도를 기쁨으로 돕는 것은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서로 나누는 교제입니다.
여러분, 아직 수련회 회비를 못낸 분들이 계신가요?
혹시 마음 주신 분들이 그분들의 회비를 기쁨으로
기꺼이 나눔, 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셀모임 할 때, 함께 식당이나 카페를 갈 때,
모임비를 걷으면, 돈이 부족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쁨으로 기꺼이 내주세요.
그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교제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교제는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
서로 연결되어 소통하는 것,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
서로의 고난에 동참하고 물질을 나누며 섬기는 것,
이 모든 것이 코이노니아, 곧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단순히 ‘대화’라는 방식에
모두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제는 서로의 삶을 공유하고, 나누고, 권면하고,
격려하고, 끌어줘는 관계를 통해 온전히 세워질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이런 사귐을 여러 성도들이
함께 나누길 원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준 ‘교제’의 참 의미를 생각하면,
과연 우리가 이런 교제를 실제로 나누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됩니다.
특히 오늘날 세상은 개인주의와 세속주의가 만연해,
교회 안까지 그 폐해가 깊숙히 침투해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과연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코이노니아’를
풍성히 누리며 살 수 있을까요?
여러분, 지금 옆에 계신 형제, 자매와 깊이 교제하고 있습니까?
내 삶 속에 성도를 초청하여, 그 성도와 함께
삶을 나누고, 공유하고 있습니까?
세상에 속하지 않고, 발버둥치며 믿음의 싸움을 싸울 때,
함께 그 싸움에 동참하며 격려하고, 서로 좋은 것을 권하는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고통을 함께 나눠지고, 물질적으로 어려울 때
서로 도와줄 수 있는 진정한 성도가 있습니까?
그렇다고, 큰 돈을 서로 주고 받으며 도와주라는 말은 아닙니다.
로마서 15장 26절에서도 언급했듯이
가난한 성도가 있을 때 기쁘게 얼마를 연보했다고 말합니다.
‘얼마’라는 표현은 적은 돈을 말합니다.
갑자기 교회 안에서 셀모임을 깊이 있게 나누다가,
자신의 삶에 너를 초청한다면서 자신이 몇 백만원, 몇 천만원
빚이 있는데, 도와줄 수 있겠냐고 요청하는 것은 교제가 아닙니다.
서로를 향한 배려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잠언 22장 26절에서 보증을 서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22:26 NKRV
26 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왜냐하면, 서로에게 빚을 지면 그 둘의 관계 안에
‘돈’이라는 물질의 개념이 들어오기 때문에
온전한 영적 교제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좋은 친구끼리는 절대로 빚을 져서는 안됩니다.
차라리 받지 않을 돈이라고 생각하고 줄 수 있을 때,
돈을 빌려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 서로의 어려움을 함께 나눌 때
우리는 진정한 교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사랑하는 감정을 품으라는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아무런 교류도, 관심도 없이 살다가
주일에 청년예배 때, 셀모임 때 한번 만나서
형식적인 인사와 대화를 나누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말과 혀로만이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의 짐을 대신 지고,
서로의 필요를 공급해 줄 수 있는 사랑.
상대방의 삶을 내 삶 속에 초대하여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랑.
그것이 예수님의 새 계명을 따라 우리가 누리는
교제의 참 모습입니다.
2. 우리의 교제는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이런 사귐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교회를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예배드리지만, 각자 신앙생활 한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나에게 진짜로 친밀감을 줄 수 있는 공동체,
깊은 공감과 풍성한 나눔으로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를 찾아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큰 교회들 중에는
이렇게 삶의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셀을 만들어 주기 위해
동질그룹의 셀을 디테일하게 구성해서 운영하는 교회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혼자 셀그룹을 만들어줍니다.
이혼한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자신의 속얘기를 꺼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셀배치를 받았더니, 나는 3번 이혼했어요.
나는 4번 이혼했어요. 셀리더는 5번 이혼했어요.
그러니깐 2번 이혼한 사람은 명함도 못내밉니다.
너무 마음이 편한거에요.
힘들다고, 부끄럽다고 말 못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대형교회들은 사람이 많으니 다양한 사람들을
비슷한 부류로 동질그룹 셀모임을 운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전략으로 많은 성도들이 수평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교제는 무엇을 근거로 이루어지는가?
물론 동질그룹으로 셀모임 하는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가능하다면 우리 교회에서 그렇게 운영하면
말못할 사연이 있는 분들이 더욱 자유롭게 삶을 나눌 수 있어
교회에 잘 정착할 수 있어 좋을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서 더욱 솔직하게 드러내고
용서받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을 품지 못하는 셀모임
진정한 교제를 추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쉽게 나누기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그 문제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그 삶에 함께 들어가서
짐을 나눠질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제 아닐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런 깊은 사귐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사귐을 든든하게 묶는
근본적인 끈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때론 어떤 사람은 혈연관계가 교제의 근거로 작용합니다.
교회 안에 가족이 있어 친밀감을 느끼고,
그 안에서 교제의 만족을 찾습니다.
어릴 때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교회를 다니는 것도
이와 비슷한 교제의 끈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릴 때 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면, 가족의 끈에서 벚어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는 분들이
다른 교회로 흩어져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간혹 보면, 아직도 부모나 자녀가 신앙적으로 독립하지 못해서
같은 셀에 배치가 되어있는 경우를 봅니다.
부모나 자녀 중에 하나가 신앙생활을 잘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일에 겨우 교회에 나오는 정도이고,
셀모임을 따로 가져야 하는데, 부모 없이 다른 셀에 배치되어
다른 성도들과 교제하는 것이 두려워서 떨어지지 못합니다.
아직 신앙적으로 어린아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또 어떤 성도는 지연과 학연에서 사귐의 장을 만듭니다.
오랜 세월 많이 보고 자란 사람끼리 있어서
편안함을 느끼고 친밀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 전도되어 올 때, 학교 친구, 동네 친구,
직장 동료로 전도되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계속 하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하나의 지체로, 모든 성도들과 연결되고, 연합되는 과정을
거쳐서 교회의 한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치 손톱이 손가락과 붙어있다고 해서
손가락하고만 연결되어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손톱이 아프면, 손가락만 아픕니까? 온 몸이 아픕니다.
저는 손톱이 아프면 계속 발가락을 줬다 폈다를 엄청 반복합니다.
제 몸은 발가락과 손톱이 엄청 친합니다.
교회는 그런거에요.
김집사님이 학교 동창 박성도님들 전도해왔는데,
갑자기 박성도님이 아프면, 그 소식을 듣고 생전 보지도 못했던
최 권사님이 새벽예배 나와서 기도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손톱이 아프면 발가락이 얼마나 기도 많이하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손톱이 다 나으면 발가락한테 고맙다고 하나요?
박성도가 최권사님께 고맙다고 하나요? 몰라요. 그냥 지나가요.
그런데 그렇게 한번, 두번 은혜를 경험하면 나중에 아는거에요.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내가 이 교회에 한 몸이구나.
그게 교제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가족도 없고, 교회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는 사람도 적으며, 마땅히 취미나 관심사를
공유할만한 것도 없어서 교제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혈연, 지연, 학연 등 나에게 교제권을 만들어줄
근거를 찾아 사귐을 시도하고,
그것이 안되면 과감히 교제권을 변경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즉, 나랑 맞지 않으면 교회를 옮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도가 교제할 때
무엇을 근거로 삼아야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무엇 때문에 교회 안에서 교제를 시작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교제를 지속하고, 더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참된 교제가 부족한 이유 중
가장 큰 문제가 우리의 교제를 묶고 있는 근거를
엉뚱한 곳에서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그 근거를 어디에 두고
우리가 서로 사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지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3절을 보면, 두 무리가 등장합니다.
요한1서 1:3 NKRV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바로, ‘우리’‘너희’입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과 함께 한 동역자 무리이고,
너희는 이 편지를 받는 모든 그리스도인,
곧 여기 모인 우리들입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자신의 무리들과 우리가
함께 사귀기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과 우리 사이에 연결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혈연관계인지, 지연과 학연이 있는지,
혹은 공통의 관심사나 취미를 가졌는지 조금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우리와 너희가 사귐이 있게 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사도 요한이 ‘보고 들은’ 바로 그것입니다.
요한은 1~2절에 그가 다른 목격자와 함께 ‘보고 들은바’
무엇인지 설명하는데, 바로 그것이
우리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그것이 무엇일까요?
요한1서 1:1–2 NKRV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듣고, 보고, 만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영원한 생명.
어떤 분에게는 이 설명이 수수께끼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를 오래 다니셨거나, 말씀을 잘 아는 분들은
1절에서 ‘태초에 있는 생명의 말씀’을 읽자마자
요한복음 1장 1절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1 NKRV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곧 하나님 자신이신 그 말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만졌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정보를 기록으로만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환상이나 영으로 보이신 것도 아니고,
믿는 자들 마음에 감정적인 감동을 일으켜서 전하지 않았습니다.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먹고, 자고,
울고, 웃고, 대화를 나누며 함께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자신의 삶을 나누셨습니다.
즉, 인간과 ‘코이노니아’, 사귐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게 죄 없으신 하나님께서
죄 많은 사람과 교제할 수 있습니까?
빛과 어둠이 어떻게 사귈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말하길 우리 인간은 죄로 인하여
이미 영적으로 사망선고가 내려졌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6:23 NKRV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의 결과는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망은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
다시 말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요한이 계속 예수님을 어떻게 부르는가 입니다.
1절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절에 이 생명,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요한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만진 분이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단절된 죄인,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영원히 회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의 결과는 사망, 하나님과 단절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원한 생명,
다시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당하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5:24 NKRV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이 죄인된 우리의 생명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할 수 없던 우리가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귐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양자로 삼아주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영원히 교제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이 예수님을 믿을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3 NKRV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그 구원자를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지식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알다’헬라어 ‘기노스코’라는 단어로
단순한 정보 전달이나 지식의 습득이 아닌
경험과 체험을 통해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깐 영생이란 하나님을 체험해서 아는 것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해서 아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예수님을 만나고 교제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가 회복됨으로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것이 성도의 교제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자녀, 양자로 삼아주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영적 교제의 장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게 되어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가 회복되어 영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고,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 때문에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 가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 교제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혈연이 아닙니다. 지연도 학연도 아닙니다.
같은 취미나 관심사가 아닙니다.
직종이 같거나, 연령대가 비슷하거나,
성격이 잘 맞기 때문도 아닙니다.
성도의 교제가 가능한 이유,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
더 견고해지고 풍성해지는 이유,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 안에서 서로 앙숙이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떻게 하나가 되었을까요?
주인과 종이 어떻게 한 교회를 이룰 수 있었을까요?
여자는 인구수에 계수하지 않던 시대에
어떻게 남자와 여자를 ‘하나’라고 선포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교제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그 특별한 사귐이 무엇에 근거한 것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들은 예수 안에서 한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예수 안에서 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안에서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겼고,
함께 하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믿음과 한 사랑으로,
같은 세례를 공유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안에 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
그리스도인은 충분히 서로 교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혈연관계가 다른 어떤 관계보다 더 끈끈하다는 말입니다.
확실히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보다 진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담을 허무시고, 영원한 사귐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 십자가 보혈의 사랑은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걸고 이루신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교제할 때,
예수님 외에 다른 근거를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다른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 외에 다른 관계가 매우 중요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매개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동아리 모임, 동기 모임 다양하게 교제권을 만들면서
어떻게든 교회 안에 들어와서 예수님을 만나게 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 아닙니까?
혈연, 지연, 학연, 취미, 직종, 연령대, 관심사 모두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보다 중요할 수 없습니다.
잘 몰라서, 어색하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성격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성향이나 관심사,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성도의 사귐을 가로막는 장벽을 다시 세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를 단절시킨 죄의 장벽까지
모두 허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성격이나 관심사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 외에 다른 모든 이유들이
우리의 관계를 맺는데 더 중요하다고 하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다시 하나님과 연결시키기 위해 애쓰신
그 공로를 헛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어떤 장애물도 뛰어넘어 서로 교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옆 사람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시다.
“우리의 사귐은 예수님이면 충분해”
혹시 옆에 청년이 아닌 권사님이나 집사님,
교회 안에서 우리가 서로 다른 그룹이었다고 생각되는 분이 계시면
그 분을 바라보며 이렇게 고백합시다.
“저와 권사님의 사귐은 예수님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동성이면 꼭 안아주시고,
이성이면 눈을 마주보고, 손을 꼭 잡아주세요.
“저와 집사님의 사귐은 예수님이면 충분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교제의 근거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교제에는 어떤 장애물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내가 어떤 지체와 교제하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면,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인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나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내가 제대로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부터 돌아가서 혹시 관계가 어려웠던 분들이 계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두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관계 가운데 오직 예수님만 근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성격, 가치관 다 필요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성격, 가치관 다 받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은지가 언젠데
아직도 우리의 성격이 이 모양 이 꼴입니다.
우리의 생각, 가치관이
아직도 예수님의 마음을 1%로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영생을 주셨습니다.
우리와 교제하시고,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기다려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내 옆 사람을, 내 가족을, 내 동료를 받아줄 수 없습니까?
가정으로, 직장으로, 삶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을 근거삼아 회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는 누구와 더불어 사귐을 갖는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누구와 더불어 사귐을 갖는가를
함께 생각해보길 원합니다.
우리는 교제가 무엇인지,
무엇을 근거로 삼아 이루어지는지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제는 누구와 더불어 사귀는 것일까요?
성도의 교제는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만남입니다.
역사적으로 종파와 인종, 계급과 성별 등
다양한 갈등의 장벽을 뛰어넘은
놀라운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근거로 교제하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의 삶을 공유했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모든 물건을 함께 사용하고, 나누어 주었습니다.
오늘날 공산주의에서 무력을 통해
강제로 만들어야 일어날 법한 시스템을 자발적으로 행했습니다.
어쩌다가 한 번 만나 이벤트성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한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늘 기쁨과 순수한 마음으로 교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술에서는 늘 찬송이 흘러나왔고,
이웃들에게 칭찬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셨습니다.
이렇게 성도에 교제에는 큰 기쁨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교제에는 왜 이런 기쁨과 능력이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성도의 교제 가운데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우리와 더불어 사귐을 갖기 때문입니다.
요한1서 1:3–4 NKRV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요한은 이 편지를 통해서 결론적으로
우리의 사귐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우리의 사귐에 기쁨과 능력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안계신 곳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자리에 우리 모두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부족한 제 설교도 여러분과 함께 듣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성도의 교제에 더불어 함께 하시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교제할 때, 방관자로 그냥 지켜보시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다양한 방법으로 일어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깨달음을 주시고,
우리 마음에 선한 일을 하도록 동기부여를 주시고,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할 때 지혜를 주셔서
잘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때로는 말도 안되는 상황 가운데 물리적으로 변수를 만들어
인간의 생각으로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해결해 주십니다.
또는 돕는 사람을 붙여주시거나,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을 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제할 때, 우리의 모임 가운데
우리가 서로의 삶을 공유할 때,
그 교제가운데 개입하셔서 우리의 교제를 더욱 풍성하게
기쁨과 능력이 넘치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제 대학교를 막 졸업한 20대 중반의 청년 10명에게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10명 모두 문과 대학을 졸업한 것입니다.
수학은 1도 모르는 학생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몰래카메라였습니다.
그 중 한명은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한 학생이었고,
다른 한명은 그 학생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서울대 수학과 학생이 우리 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수학과 학생은 문과생인척 연기를 해야됩니다.
그러면서 이 학생들이 스스로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그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먼저 문제를 쉽게 풀어서 이해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도와줄 것이고,
그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잘못된 길로 가려고 할 때,
자연스럽게 그 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학생들은 자신들이 이 문제를 잘 풀고 있는지
우리가 이 문제를 결국 풀어낼 수 있을지 의심하면서
계속 머리를 긁적이며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 한명은 마음이 평안합니다.
너무 기쁩니다. 믿고 맡기면 결국 풀어낼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이 모임 중에 서울대 수학과 학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바로 우리의 교제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 모임 중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더이상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대화할 때, 우리의 삶을 함께 공유할 때,
서로의 어려움을 위해 기도하고 돕기로 작정할 때,
하나님이 함께 일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반성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청년부나 장년부를 맡아서 어떤 모임을 인도할 때,
“모이기에 힘쓰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러면서 예배 후 셀모임, 나눔모임을 하게 되면
꼭 출석체크하는 선생님처럼
“셀모임 빠지지 말고 꼭 참석하여 함께 교제합시다”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면서 광고합니다.
광고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외치는 제 마음 속에는 이런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셀모임에 나와야 관리가 되는데...
거기서 친한 사람을 사귀어야 교회 안빠지고 잘 나올텐데...
내가 맡은 부서가 인원이 계속 늘어날려면
이 셀모임 조직이 잘 구성되고 운영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총무, 관리자의 마음으로 교제 모임을 권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교제가 어떤 모임입니까?
왕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더불어 사귐을 갖는 시간입니다.
그분은 돈도 많고, 능력도 많고, 지혜로우시고,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셀모임을 하면 그분이 다 계시는 거에요.
그러면 그 분과 만나는 시간을 놓치면 누구만 손해입니까?
여러분이 손해인거에요.
그런 마음으로 나에게 맡겨진 영혼들이
이렇게 정말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될텐데.
그런 마음으로 권면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회개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서울제일교회라는 한 공동체 안에서
형제 자매로 만날 때, 하나님과 더불어 사귐을 갖습니다.
형제를 돌보고 섬기는 그 일 가운데
예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합니다.
자매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손길 중에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경험할 수 있는 은혜의 방편,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사귐을
더욱 풍성히 누리시고, 많이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이후에 비대면 예배가 생활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가 지나고, 많은 교회들이 예배 회복운동을 했지만,
예전만큼 교회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교회의 성도수가 절반 가까이 줄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들이 강조한 메시지는 ‘모이기에 힘쓰라’ 였습니다.
성경에서 모이기에 힘쓰라고 했는데,
왜 영상으로 설교만 듣고 모이지 않느냐.
왜 성경대로 신앙생활하지 않느냐.
교회 나오지 않는 성도들을 야단쳤습니다.
물론 그 말도 맞지만, 더욱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께서는 교제를 통해 우리 삶에 역사하기 원하십니다.
성도가 함께 교제하며 삶을 공유할 때,
그 가운데 하나님도 더불어 함께 사귀기 원하십니다.
나 혼자 성경읽고, 설교듣고, 해석하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자칫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이단의 잘못된 해석을 듣게 될 수도 있고,
성경을 읽으면서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
그러나 함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각자의 삶과 연결시킬 때
성경은 더욱 풍성한 메시지와 해석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성경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보편적인 것입니다.
모두에게 적용해도 늘 변하지 않고 옳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삶에 함께 적용해보고
그 결과를 듣고, 따져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정말 그러한가. 그렇게 적용하는 것이 맞는가.
그런데 이 작업은 절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도가 말씀에 관해서 깊이 나눌 때
하나님이 우리의 대화에 관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임은 풍성하고, 기쁨이 넘치고,
교제 후 적용하는 삶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찬양팀 준비해주세요.
여러분, 우리 교제합시다. 교제 많이 합시다.
하나님이 우리 서울제일교회에 많이 역사하시도록.
그리고 교제를 통해 한 성령, 한 사랑, 한 믿음 안에서
한 소망 가지고 나아갈 수 있도록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통해 이루기 원하시는 뜻이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께 교제하며, 함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아름다운 교회로
함께 거룩하게, 건강하게 지어져가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그런 고백을 담아, 하나님을 기대하며
‘기대’라는 찬양을 같이 고백하기 원합니다.
찬양 - 기대
기도제목
이 시간 들은 말씀 생각하며 기도하실 때, 서울제일교회 안에서 우리가 함께 교제할 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흘러 넘치게 하옵소서.
형식적인 만남이 아닌 진정한 코이노니아,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사귐을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교회를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함께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제입니다. 우리 교회가 한 성령, 한 사랑으로 단단하게 묶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이 우리교회의 꿈인 둔촌동 성전부지 그린벨트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지될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교회의 꿈인 새성전, 새비전, 새역사를 이루는 교회되게 하옵소서.
그 일을 위해 우리에게 많은 영혼을 보내주셨습니다. 특별히 올림픽파크 포레온 아파트 12,032세대, 4만 명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우리교회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강동구를 넘어 서울지역, 우리 나라에 꼭 필요한 교회, 세상을 밝히는 등불같은 교회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이시간 다음세대를 위해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점차 자녀를 낳지 않는 인구절벽의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학령기 인구 감소율보다 교회학교 감소율이 더 낮습니다. 다음세대 자녀들이 교회를 계속해서 떠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자녀도 교회를 나오지 않습니다. 이 세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우리 한국교회를 살려 주시옵소서. 우리의 미래 세대를 다시 한번 일으켜 세워 주시옵소서. 이 부흥의 불씨를 일으키는데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오늘 청년부 수련회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교회학교 새봄수련회가 진행됩니다. 온 성도가 함께 이 새봄수련회에 집중하여 다음세대를 살리는 일에 동참하게 하옵소서. 물질과 기도, 섬김과 봉사, 격려와 칭찬으로 다음세대 사역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게 하옵소서.
또한 몸과 마음으로 고통받는 성도님들을 치유하여 주시고, 돌보는 가족들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끝까지 믿음 잃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옵소서.
그리고 각자의 기도제목을 위해서 기도하시다가 자유롭게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10분 후에 찬양하며 청년부 수련회 기도회를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원하는 분들은 계속 남아서 기도하시다가 참여하셔도 좋습니다.
찬양 - 여호와께 돌아가자
기도제목
이시간 기도할 때, 우리의 교제를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이룸 청년부 안에, 서울제일교회 안에서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마음 속에 용서하지 못한 지체가 있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이 교제의 회복을 통하여 나의 삶 속에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더불어 누리는 사귐이 내 안에 회복되어 주님을 더 깊이 만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2명, 3명씩 짝을 지어 옆사람과 손을 잡고 함께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되게 하옵소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 앞에 있는 지체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지체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어 함께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져가게 하옵소서.
서로에게 좋은 것을 권면할 수 있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붙여주시니 감사합니다. 함께 삶을 공유할 때마다 서로 격려하고, 세워주며 위로하는 은혜의 자리가 되게 하옵소서.
이번에는 서로의 기도제목을 함께 나누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 원합니다. 각자 자기의 삶에 기도하는 제목들, 삶의 문제, 가족 문제, 취업, 직장, 학교 문제, 우리 교회 안에서 관계의 문제, 나의 개인 신앙의 문제 등 함께 고민거리를 나누세요.
교회는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혼자만의 기도제목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성도의 기도제목을 듣고 기도할 때,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풍성하게 나누고, 최선을 다해 들으시고, 간절하게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찬양을 부를 때 둥그렇게 큰 원을 그리며
다함께 손을 잡고 찬양하기 원합니다.
우리는 다 함께 이룸 청년부라는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우리 각자를 향한 계획과 뜻이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꿈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소망을 바라보며 같이 찬양하겠습니다.
찬양 - 하나님의 부르심
기도제목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는 진정한 교제가 회복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교제가 학연, 지역, 성격, 관심사 등 세상의 논리와 방식이 아닌 예수님 한 분만을 근거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형제 자매를 바라볼 때,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바라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겨있는 한 명, 한 명 아름다운 작품들임을 인정하고, 그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동역자임을 인정하고, 나의 모든 편견과 장벽을 허물고 모든 지체를 품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옵소서.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깊이 있는 영적 교제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서로의 삶을 나누며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가 되게하옵소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귀는 기쁨의 교제, 능력의 삶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각자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나타내는 거룩한 삶으로 성장하게 하옵소서.
나의 삶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거룩하게 구별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도록. 세상의 유혹 가운데 넘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고, 유혹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용기로 잘 이겨낼 수 있도록
우리 교회를 통해 성내동, 둔촌동, 강동구 지역 주민들에게 복음이 선한 영향력이 흘러갈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우리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각자 자리로 돌아가서 나의 삶에 붙여주신 영혼들을 위해
복음이 필요한 영혼, 위로가 필요한 영혼, 예수님이 필요한 영혼
나를 통해 온전한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끈이
회복되게 하옵소서. 가슴에 손을 얹고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찬양 - 예수 예수
기도제목
복음이 필요한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위로의 메시지가 될 수 있도록. 전도된 영혼들이 교회 안에서 참된 교제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게 하소서.
교회의 모든 모임과 예배가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모든 교제 가운데 하나님이 주인되어 주시옵소서.
교제를 방해하는 모든 세상적 가치관이 무너지게 하옵소서. 이시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우리의 교제를 방해하는 모든 악한 영들은 물러날지어다. 예수 이름을 선포하며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의 모임에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서로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용납하는 마음을 주셔서, 서로에게 섭섭한 마음, 불편한 마음이 모두 사라지고, 약할 때 강함되시는 하나님을 서로의 약점을 통해 고백하게 하옵소서.
찬양 - 충만
마무리 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교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혈연과 지연, 학연과 성격을 넘어 오직 예수님만을 근거 삼아
서로 사랑하며 하나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모든 모임과 교제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역사하사 기쁨과 은혜가 넘치게 하옵소서.
우리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날마다 건강하게 세워지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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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주님께
영광의 박수 올려드리겠습니다.
잔잔하게 음악을 틀어주시면, 계속 더 기도하기 원하시는 분들은
남아서 기도하시면 되겠습니다.
간식은 11시부터 교육관 2층 식당에서 먹습니다.
기도하시고, 교제하시다가 천천히 이동하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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