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05 수요강론: 마태복음 5: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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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겠습니다.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5:21-26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21–26 NKRV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수요강론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번 주 갑자기 얼어붙을 것 같은 날씨로 매서운 추위가 찾아왔는데요. 이런 날씨 속에서도 잘 나오셨습니다. 추운 날씨지만 하나님으로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하고 계시는지를 알아야 하는데요. 오늘 말씀을 통해 그것을 알아가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산 위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 바로 산상수훈을 함께 살펴볼텐데요. 지난 시간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바로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가질 수 없는 무능력한 자들이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더 나은 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시간 말씀은 이후에 말씀하실 예수님의 말씀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말씀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로운 모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바로 직후에 하신 말씀으로 “분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이제 함께 살펴보면서 “분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깨닫고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운 모습이 어떤 것인지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먼저 오늘 말씀의 구조, 그리고 5장 전체의 구조에 대해서 알려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21절부터 시작되는 5장 전체의 말씀을 보면 각각 하나씩 하나씩 문단으로 나누어져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시면 오늘 말씀 21절에서도 “옛 사람에게 말한 바”라고 말씀하시고, “~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예수님꼐서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구조가 5장 전체에 있습니다. 27절에서 “또 ~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구조가 5장 전체를 보시면 나타나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구약의 율법의 참 의미가 무엇이며 의인의 참된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러한 모습들만이 의인의 모습이라는 것이 아니라 대표적인 예시를 드시는 겁니다.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청중들도 이렇게 이해했을 겁니다.
이러한 구조로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고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옛 사람”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당연히 율법하면 떠오르는 모세를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고, 십계명과 살인에 대한 율법을 말씀하신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살인”은 “죽이다”라는 포괄적인 살인이 아니라 고의적이고 불법적으로 생명을 취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고의적이고 불법적인 살인을 한 자를 율법에서는 “심판”함으로 처벌합니다. 어떻게 심판하는지 구체적으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대표적으로 출애굽기 21:12-14 을 한번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1:12–14 NKRV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만일 사람이 고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 내가 그를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이 출애굽기 말씀에서 말하는 살인자에 대한 처벌은 한 단어로 하자면 “처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인을 했으니 자신의 생명을 그 값으로 내어놓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출애굽기 말씀에서도 내포하고 있듯이 고의적이고 불법적인 살인자를 처형시킬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는 “살인하면 처형을 받게 되리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심판을 받게 되리라”라고 하셨다는 것인데요. 왜 “심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걸까요? 그 이유는 구체적으로 “처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심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심으로 살인자를 죽이는 것이 비공식적 피의 보복이 아니라 정당한 법적 절차를 거친 것임을 강조하시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그냥 살인을 당한 자의 가족이나 친척이 살인자를 향한 복수심으로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을 통한 정당한 법적 절차를 통해 처벌하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이렇게 율법에서 살인에 대한 규정이 이렇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살인에 대해서 이어서 말씀하시는데요.
이어서 하신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혼란을 만들어내는데요.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말씀으로 마치 “너희가 이렇게 들었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다”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씀도 이렇게 들리는데요. 22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리하자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희는 이렇게 들었지만, 이것은 틀리고 내가 너희에게 진짜 무슨 말인지 알려주겠다.”라고 우리는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도 말했듯이 예수님은 율법에 부족한 채우려고 하신다거나 율법을 더 확장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이어져 온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시고 그것을 완전히 성취하시고자 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율법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시 청중들도 예수님은 살인을 금지하신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지금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 더 나아가 모든 유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율법은 하나님의 본래 의도를 겉으로만 알고 있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기 위함입니다. 청중들은 21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 나는 살인하지 않았어. 내가 누구의 생명을 고의적으로 빼앗은 적은 없지. 그렇다면 나는 의로운 사람인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청중들의 생각을 예수님은 깨십니다. “너희는 이렇게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살인에 대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여기서 우리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고, 형제에게 라가, 즉 바로라고 욕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각각 구별된 처벌을 받게 된다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가장 핵심적인 것은 형제에 대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분노”입니다. 형제에 대하여 분노하니 “라가”라고 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 모두 하나님께서 육체적인 행위인 살인도 문제가 되지만, 그 보다 더 깊은 곳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라가라고 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으로든 입술로 직접 말하는 것이든 구분하지 않으시고 그저 이것들을 하는 자를 지적하십니다. 상대를 향하여 분노하고 모욕하는 것은 모두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에 그 형제를 향한 분노를 품고 있는다면 예수님은 살인자와 똑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형제를 향하여 분노하는 자는 살인자와 똑같은 공회, 즉 법정에 잡혀가고 심판을 받고, 심지어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아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청중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심판”을 법정에 잡혀가서 사형 선고를 받는 것까지만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욱 급진적으로 하나님에게도 심판을 받아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아주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십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예수님은 살인에 대한 율법을 폐지하고 계시거나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율법의 가장 풍성하고 진짜 의미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청중들, 즉 12제자를 포함하여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모든 제자들인 교회는 진정한 선생이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모든 의를 이루”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넘어서는 의”를 얻기 위해 자신의 마음에 있는 문제를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육체적인 살인을 하지 않는 것은 굉장히 훌륭하고 옳은 행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형제를 향한 분노를 품고 있는 마음과 말을 살피는 것은 살인적인 폭력을 억제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도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율법을 주실 때도 “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시고,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은 “중심”을 보시는,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가장 근원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의 행동은 모두 마음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가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입니다. 가인은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을 살해하였습니다. 그가 살해한 이유는 “분노”였습니다. 1차적으로는 자신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향한 분노였고, 그 분노가 아벨을 향한 질투가 되었고, 살인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자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가인은 정말 문자 그대로의 형제를 향한 분노로 인해 살인을 한 살인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노하는 가인에게 죄를 다스릴 것을 말씀하셨지만, 가인은 결국 살인을 저지르고 맙니다. 이처럼 살인은 형제를 향한 분노라는 마음에서 기인합니다. 물론 육체적인 살인을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는 당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봤을 때 형제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은 살인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분노”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처벌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마음만 품고 있다면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숨길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으며, 형제를 향하여 분노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청중들은 아주 충격적이었을 겁니다. 제가 말했듯이 청중들은 육체적인 살인을 하지 않았고, 육체적인 살인을 하지 않았다는 거에 자신은 율법을 충실히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 형제를 라가라고 말하는 자, 형제를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를 살인자와 똑같은 위치의 선상에 놓고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특히나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형제”는 문자 그대로 “형제”뿐만 아니라 “자매”까지 포함하고 있는데요. 말 그대로 가족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다시 말해 교회의 모든 지체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청중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더욱 급진적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자신은 살인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가족과 친척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 있는 모든 형제를 향한 분노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인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아주 충격적이었을 겁니다.
더욱이 청중들은 아마도 분노나 자신들이 일상에서 하던 욕설로 재판을 받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낄낄거리면서 웃다가 “지옥 불”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에 표정이 굳어지며 심각하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릅니다. 마태복음에서 “지옥”은 악인이 최후로 멸망 받을 장소입니다. 지옥으로 번역된 이 단어는 ‘게엔나’로 예루살렘 바깥에 있는 힌놈 골짜기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힌놈 골짜기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구약 이스라엘이 한때 몰렉에게 인간을 불에 태워 바치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옥 불”이라는 단어를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청중들은 마태복음 25:41에서 말씀하듯이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불”이라는 생생한 이미지를 떠올렸을 겁니다. 청중들 입장에서는 고작 마음으로 분노를 품고 있고, 형제를 향해 일상적인 욕설을 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살인한 것과 마찬가지이며 악인과 같은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청중들은 자신이 적어도 한 번쯤은 살인한 살인자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며,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듣고 마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한 것처럼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청중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이제 해결책까지 친절하게 제시해주십니다. 23-24절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반드시 이 방법만을 고수해야 한다기 보다는 대표적인 예시를 가르쳐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려고 가다가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난다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한 다음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이들이 제물을 바칠 수 있었던 제단은 예루살렘 성전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곳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입니다. 갈릴리와 예루살렘은 130km라는 먼 거리입니다. 지금은 차로 1시간 3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이지만 당시에 130km는 아주 먼 거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르면 제물을 가지고 예루살렘까지 130km라는 먼 거리를 가는 예배자를 떠올렸을 것이고, 이 예배자는 제물을 바치기 전에 자신이 범죄한 형제와 화해하려면 성전에 제물을 그대로 둔 채 다시 갈릴리로 한 주 이상 걸려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정말 이처럼 고생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실제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의 요점은 그만큼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겁니다.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한 주 이상 걸리는 이 엄청난 거리를 감수하는 아주 결단력 있는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이 말씀은 형제와 화목하는 것은 비단 형제와의 수평적인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와도 연관이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전에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만일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예배자라면 형제와도 화목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 믿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예배와 형제 사랑이라는 겁니다. 만일 형제에 대한 분노를 그대로 품은 채 하나님을 예배하러 온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실 거라는 것도 이 말씀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형제와의 화해의 중요성을 보여주시기 위해 또 하나의 말씀을 하시는데요. 25-26절입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앞의 말씀에서 예시로 든 사람은 화해를 주도적으로 하는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오히려 위협 속에 있습니다. 이 사람은 상대방에게 큰 빚을 져 고소를 당하여 패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적법한 고소 절차를 통하여 감옥에 가기 전에 그 형제와 화해하면서 합의하여 현명하게 해결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두 절의 말씀은 마치 변호사로써 오늘 날 법적으로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을지 현실적인 조언을 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형제와의 화해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강조하시기 위해 이러한 예시를 사용하신 겁니다. 보십시오. 만약에 이 사람이 감옥에 간다고 한들 이 형제와의 관계가 좋아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적법한 처벌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러나 형제와의 사이는 결코 좋지 못할 겁니다. 이 형제는 감옥에 간 이 사람을 향해 원망하는 마음이 계속 들겁니다. 그렇지만 만일 형제와 화해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더 좋은 결과가 생김과 동시에 이 형제와의 사이도 좋아질 수가 있을 겁니다. 바로 채무 관계가 해결되고 화목한 관계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이처럼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청중들이 알고 있었던 “살인하지 말라”라는 이 율법의 진정한 의미는 육체적인 살인뿐만 아니라 마음에서 형제를 향해 분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형제를 향해 분노한다면 그것은 살인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더 무시무시한 형벌을 받게 될 겁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15 에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쩌면 “분노”한다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외적인 행동으로 드러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누구나 다 다른 사람을 향해 분노해 본 적도 있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괜찮다고 은연 중에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한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가히 “분노”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를 향해 분노합니다. 유튜브 댓글만 봐도 누군가를 향해 분노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습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하든 분노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노를 즐기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분노를 항상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 그 분노를 묵상합니다. 분노하는 그 대상을 항상 생각하면서 그 사람을 마음 속으로 짓밟으며 그 사람 위에 올라서서 승리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형제를 향해 분노한다면 그 사람은 살인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당시 청중들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인 형제를 향해 분노하지 않고 화목한다는 것을 결코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적어도 한 사람을 향해 분노하는 살인자들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5장 끝에서 교회 내의 형제들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너무나 쉽게 어기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단 한번도 불법적이고 고의적으로 형제를 향해 분노하신 적이 단 한번도 없으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예배가 더럽혀지는 것에 대한 거룩한 분노를 내신 적은 있으시지만, 그 이유가 아니고서는 단 한번도 여타 다른 이유로 분노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심지어 십자가에서 자신을 향해 수치와 모욕적인 말을 하는 자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품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긍휼의 마음이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분노의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아야 할 대상들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모든 분노를 없던 것과 같이 여기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안다면 우리는 형제를 향해 분노하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화목해야 합니다. 오늘 제 설교의 제목이 “화가 아닌 화목”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향해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형제와 화목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25-26절에서 말씀하신 법적 고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18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만 달란트 빚진 자는 왕으로부터 모두 무조건적으로 탕감 받았지만,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그대로 고발하였습니다. 만일 만 달란트의 용서를 받은 것을 진정으로 안다면 자신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기꺼이 용서해주는 것이 마땅한 모습입니다. 형제에게 분노하는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 입장에서는 고작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고발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만 달란트를 기꺼이 탕감해주셨는데, 우리는 고작 백 데나리온에 분노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요. 우리의 현 주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는 “형제와 화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향해 분노를 품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간절히 필요합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을 심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과 용서를 안다면 우리는 반드시 형제와 화목해야 합니다. 형제를 향해 분노하고 싶으시거나 분노하고 계십니까?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 어려워 못할 것처럼 생각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형제와 화목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 도움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형제를 향한 분노로부터 진정으로 해방되는 길은 오로지 용서 밖에 없습니다. 용서만이 분노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시며 형제에게 화를 내기보다는 형제와 화목하게 되는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 그리고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이 시간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형제에게 분노하지 말고 형제와 화목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입니다. 우리는 실천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가능하십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합시다. 우리를 의지하고 우리의 능력에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 나은 의인으로 만들어주실 예수님을 의지하도록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형제에게 분노하기보다 형제와 화목하기를 애쓰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이 시간 이 기도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에게 귀중한 말씀을 주시고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 시대,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저희는 형제를 향해 분노하는 것을 너무나 쉽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형제를 향해 욕설을 내뱉는 것이 저희의 모습입니다. 이런 저희의 모습을 용서해주시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인이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형제와 화목하는 것에 힘쓰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날마다 화목한 교회가 되게 하시고 이곳이 서로를 보듬어주고 서로의 연약한 부분들을 향해 분노하기보다 용서하는 천국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늘도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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