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영적 사고?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적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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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성
긍정성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사랑합니다! 꿈사땅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원영적 사고를 아는가? ‘아이브’라는 걸그룹의 댄스가수인 장원영씨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됐다. 예를 들어 긍정적 사고는 “물이 반이나 남았네?”라고 표현한다. 부정적 사고는 “물이 반 밖에 안 남았네?”라고 표현한다. 원영적 사고는 “내가 연습 끝나고 딱 물을 먹으려고 했는데 글쎄 물이 딱 반 정도 남은거양!! 다 먹기엔 너무 많고 덜 먹기엔 너무 적고 그래서 딱 반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완전 럭키비키잔앙?!”이라고 표현한다. 럭키는 말 그대로 행운이고, 비키는 장원영의 유아시절 영어 이름이었다고 한다. 장년 선생님들 이거 오늘 배웠다고 아이들에게 써먹으면 안된다. 이 밈은 작년에 유행했고 지금은 거의 안쓰는 단어다. 처음 이 말이 나타났던 배경은 장원영씨가 스페인에서 촬영했을 때 일어난 일이다. 빵집에 들어갔는데 앞 사람이 장원영이 사려던 빵을 다 사버린 탓에 조금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앞 사람이 제가 사려는 빵을 다 사가서 너무 럭키하게(운좋게) 제가 새로 갓 나온 빵을 받게 됐지 뭐예요? 역시 행운의 여신은 나의 편이야”라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처럼 원영적 사고는 부정적 현실을 단순히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객관적이고 명확히 인지한 후에 비록 현재는 부정적인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 부정적인 것이 결국 훗날에는 긍정적인 결과에 이르게 되는 과정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전혀 힘들지 않다며 애써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힘든 것은 명백히 맞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긍정적인 것들이 많이 남아있어’ 혹은 ‘이 힘든 일도 결국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시련일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요즘 여러분들 중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래저래 많은 여러가지로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밈인 것 같다.
오늘 읽은 성경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이 처한 상황은 로마의 감옥에 갇힌 상태이다. 그가 감옥에 갇힌 이유는 무슨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서가 아니고, 그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로마 감옥에 있다는 것은 미래가 완전히 어두운 상황이다. 왜냐하면 바울을 황제나 로마의 신을 숭배하지 않고, 황제를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기독교에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때문이다. 이것은 황제에 대한 반역이기에 사형에 처할 위기에 놓인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바울이 원영적 사고가 가능할까? “예수 믿어서 천국에 가게 됐는데, 주님 만날 날이 더 빨라져서 럭키비키잔앙?”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고, 여러분도 마찬가지고, 나도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때 드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이다. 한번 경험해봤다면 이 땅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죽음의 위기 가운데 있는 사도 바울이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은 더 이상 복음을 전하는 길이 막힌 것처럼 뭔가 패배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데에 “오히려 좋다”고 한다. 보통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거나, 이제 제대로 예수님을 믿어보려고 하는데, 예수 믿는다고 감옥가고 사도 바울이 결국 사형을 받는 것을 보면서 믿음이 약한 성도들은 아주 불안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이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하나님이 바벨론 신보다 약해서 전쟁에 졌다는 생각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의 처한 상황을 보고 그가 전했던 주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의 주님이자 신으로 예배했던 가이사보다 약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약한 신앙은 흔들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바벨론이 남아있는가, 이스라엘이 남아있는가? 그렇다. 바벨론은 멸망당했다. 지금 바울이 처한 현실을 보면 로마가 강대국이지만, 현재 로마는 어떻게 됐는가? 멸망 당한 지 오래다.
바울은 당시에 로마가 망할 것이라고 생각은 못했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진정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내가 이 세상의 주님이 가이사라고 말하는 네로의 병사들에 의해 감옥에 갇혔지만 패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하고 있습니다”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왜 감옥에 갇혔는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갇혀있다. 그래서 로마의 군인들이 생각해봤을 때 바울이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메시지는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 인간들에게 구원을 주는 힘이라는 사실이 로마 황제의 군대에서 생각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그 밖에 사람들까지도 이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평소에 황제와 그의 군인들을 직접 만날 수 없었던 바울은 오히려 감옥에 갇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패배가 아니라 승리라고 확신했다. 또 로마의 관리들과 병사들에게 복음이 왜 진짜인지에 대한 토론을 하고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바울의 복음을 듣고 로마 병사들이 어떻게 되는가? 바울이 말하는 복음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병사 가운데 여러 명이 감동을 받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자신들이 주님이라고 섬겼던 가이사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시위대 병사들이 이제는 진정한 주님이신 에수 그리스도에게 충성하였다는 소식이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힘으로써 복음에 이러한 진전이 왔음을 기쁨으로 강조하며 말하는 것이다.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이 패배가 아니라 승리인 두 번째 이유는 바울이 갇힌 감옥이 있는 도시인 로마의 성도들이 그가 감옥에 갇혀있다는 사실이 주님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기는커녕 도리어 더욱 확고해져서 복음을 담대히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로마의 성도들은 진정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세상에서 주님이라 불리는 가이사의 감옥에 갇힌 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만유의 주 되심에 의심하고 두려움에 빠져 지하로 숨은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더욱 확실해져서 겁 없이 복음을 선포했다. 이러한 이유로 복음의 패배가 아니라 승리라는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나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편지를 받는 빌립보 성도들도 바울을 본받아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으로 인해 패배감에 빠지거나 소망을 잃어버렸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예수님이 졌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믿음에 더욱 굳건히 서서 복음을 담대히 선포할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 이렇게나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늘 처음에 읽었던 본문 15~18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애들아 너희가 어떤 모습이든지, 어떤 마음으로든지 그리스도만 전해지기만 하면 돼. 나를 시기하고 미워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있고, 나를 돕고 싶어서 순수한 마음으로 전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 순수한 마음으로 전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복음을 지키는 일에 힘쓰도록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고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애쓰고 있단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자신들이 높아지기를 원하는 뜻에서, 또 감옥에 있는 나를 속상하게 하려고 더 열심히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지. 하지만 나의 마음을 속상하게 해도 괜찮아~!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전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이야. 나는 이것 때문에 기뻐하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거야”
사랑하는 꿈사땅 여러분, 사도 바울의 이 편지를 들어보았을 때 바울은 누구 중심적으로 생각하는가? 그리스도만 전해지기만 하면 된다는 간절함이 느껴지는가? 우리가 원영적 사고를 생각했을 때 기준은 철저하게 ‘나’를 중심으로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과 기대로 생각하고 말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상황은 어느 누가봐도 원영적 사고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진짜 사도 바울의 인생만 놓고 생각하면 앞으로 남은 미래는 더 나은 것이랄게 하나도 없는 사형이라는 ‘죽음’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이 된다면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떠한 상황이라도 복음이 전해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갖는 어마어마한 능력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열심히 달려간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목표이기에 당장에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믿으면 감사한 것이고, 아니라면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으로 생각하며 복음을 전할 때 그 자체가 삶의 목표와 목적이 되어 매순간 목표를 성취하고 이루는 행복한 삶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교회를 다니지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닌 사람들만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없다.
그러니 사랑하는 꿈사땅 여러분,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오직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만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남들과 완전히 다르게 된다. 누가봐도 망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길을 보여주신다. 누가봐도 답이 없어보이는 상황에서 힌트를 주시는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두려움이 가득한 마음이 가득할 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 마음에 평안을 주신다. 그래서 ‘나의 가는 길’이라는 찬양에서도 누가봐도 답이 없어보이는 사막의 광야에 길을 만드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메마른 사막에 강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여러분의 삶도 마찬가지다. 오직 예수를 위해 살겠다고 결단하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아주 행복한 일이다. 왜냐하면 나의 삶을 온전히 100%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이 나의 등 뒤에서 일하시고 싸워나가시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가운데서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읽으며 순종할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조건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상황이 좋지 않음을 분명하게 알지만, 하나님이 선하신 뜻대로 일하실 것을 확신하며 기도할 때 마음에 평안과 긍정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 은혜들을 날마다 누리시는 저와 꿈사땅 모두가 되길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