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려 본 마음(히브리서 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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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6주일청년 - 20240421 주일새벽
제목: 헤아려 본 마음
‌‌​본문: 히브리서 2:11-18
찬송: 42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1. 도입
 
우리나라 말에 “헤아려 주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를 보면 처지나 상황을 헤아려 줄 때, ‘헤아리다’라는 말을 사용하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려 줄 때에도 ‘헤아리다“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려 본적이 있을까요? 누군가의 아픔을, 누군가의 슬픔을, 누군가의 기쁨을 헤아려 본 적이 있을까요?
 
부모님은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서 노력하며 자녀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노력합니다.
심지어 갓난아기 때에는 아이의 울음, 아이의 몸짓만으로 배가 고픈지, 아픈지, 어디가 불편하지는 않은지,
아이의 마을을 헤아려 봅니다. 그리고 그 필요를 채워줍니다.
이때 부모는 아이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쏟아붓고, 아이는 그 사랑을 통해서 사회가 살만한 곳으로 인식하며 건강하게 자라갑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헤아려 본 마음이 자녀를 건강하게 자라게 합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자녀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때론 자녀의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사춘기를 지나고, 또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 생각과 가치관이 자라기 시작할 때
부모님께서 조언과 책망이 불편하게 느껴지고, 어느 때에는 불필요한 강요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부모님도 사람인지라 연약하여 실수하고 잘못할 때도 있습니다.
부모님의 실수 때문에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맞지만.
그러나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부모님의 사랑과 그 마음을 자녀가
다 헤아려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다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찾아 왔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의 마음을 다 헤아려 볼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욥이 등장하는 데, 욥의 삶을 욥의 입장에서 보면 의문 투성이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자녀들의 작은 죄 하나하나까지 회개시켰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에 알 수 없는 재앙이 나타나 모든 것을 앗아가버렸습니다.
욥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살아계신지, 살아계시다면 도대체 왜 이런일이 있도록
내버려두었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려울수록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뜻과 의지를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니, 헤아려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을 확신하게 하는 한가지 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예수님을 알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없습니다.
 
이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봄으로 힘을 얻고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두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2. 본론
 
1) 첫 번째 예수님은 우리를 편견 없이, 차별없이 사랑하십니다.
 
11절 말씀입니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여기서 ‘거룩하게 하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거룩함을 입은 자들”은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자, 그리스도인입니다.
 
11절 하반절.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거룩하게 하신 이인 예수님과, 거룩함게 함을 입은 자 그리스도인이 한 근원에서 났다고 표현하며,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우리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한 근원입니다.
하나님의 한 근원에서 남으로 우리를 형제라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성경이 증언합니다.
 
이 내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어떻게 보면 왕이 노예와 한 형제라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나요?
재벌가 이재용씨가 길거리의 노숙자에게 형제입니다. 어깨 동무하며, 사진을 찍고, 집에 초청해서 함께 지냅니다.이해할 수 있나요? 물론 여러분은 마음이 좋아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왕과 노예는 출발점과 신분의 근원이 다릅니다.
이재용 씨와 노숙자는 같은 사람일지라도, 사회적 지위와 삶의 터전이 다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이와 같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는 같은 근원의 사람이라고, 형제라고 우리를 불러줍니다.
예수님은 편견없이 그분에게 나아온 자를 형제라고 불러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편견 없이 사람을 보기 쉬울까요?
미국의 한 부자 동네의 영상이라며 올라온 영상을 본적이 있습니다.
일반인 유튜버가 부자 동네의 상황을 보여주겠다면 차를 타고 부자 동네에 들어가 주차를 해 놓고
서 있었습니다. 아무런 행동이나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곳 주민 한 사람이 나와서 누구냐고 물으면 당장 그곳에서 나가라고 말했습니다.
불쾌한 어조로 마치 무엇인가 나쁜 사람을 보듯이 그를 대하며 거친 언사를 했습니다.
이유는 그는 자신의 동네 사람이 아니므로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갖는 편견과 좋지 못한 시선입니다.
 
사람 안에는 각자가 가진 편견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래 신발 사진을 보겠습니다. 신발이 찢겨지고 헐거워져 테이프로 감겨 있습니다.
이런 신발을 신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되나요?
노숙자나, 형편없이 가난한 사람 정도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가까이 가면 냄새가 나서 피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인지 보십시오. 영화배우 키아누 리브스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저에게 돈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번 생에 번 것으로 몇 세기는 더 살 수 있는 걸요.”
 
우리 안에도 편견이 있으며, 이 편견을 깨뜨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편견이 만약 사실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죄송한 표현입니다. 죄송합니다.
“냄새나는 노숙인과 마주하며, 식사를 하고 3시간 대화를 하라고 하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한 형제로 불러주시며,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대단히 경건하고 거룩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입니다.
엡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표현합니다.
진노의 자녀라는 말을 쉬운성경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엡2:3 우리 모두 저들과 똑같이 죄된 본성을 좇아 행하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온갖 일을 저질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분노를 사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쉬운성경)
우리는 죄된 본성을 가지고, 온갖 죄를 저지를 존재입니다.
죄인입니다. 심판을 받을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자신과 같은 위치로 올려 형제라고 불러주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은혜입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은헤로 용서받으자,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편견없이 대해주시고, 사랑으로 대해주십니다.
 
편견없는 사랑, 차별없는 사랑을 하나님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편견없이, 차별없이 없는 사랑이 여전히 여러분에게 있음을 믿고,
주님의 사랑으로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2) 두 번째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두려움에서 이기게 하십니다.
 
한 방송에서 이경규씨가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으며 자신의 나름대로 이를 규정하였습니다.
우울증은 죽고 싶은 병, 그리고 공황장애는 죽을 것 같은 병이라고 말합니다.
연예인이 방송 활동을 잘하다가 갑자기 공황장애로 방송을 쉬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정형돈 씨도 그랬습니다. 방송을 잘 되고 어려움이 없는데요,
그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고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으니잘 하던 일도 할 수 없어 쉬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은 눈에 보이는 실체가 없지만, 얼마든지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고,
무거운 족쇄가 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저에게도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습니다.
10여년전 교통사고로 죽을 뻔 하면서, 고속도로 운전의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 두려움이 생기니까, 150, 180을 밟고도 괜찮던 사람이 고속도로 운전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속도로 운전을 하고 있으면, 마치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밀려옵니다.
두려움이 감정을 사로잡고, 육체를 사로잡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히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죽기를 무서워하며 사람들이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한다고 했습니다.
무서움은 사람들을 종으로 끌고 다니려고 합니다.
물질로, 건강으로, 인간관계로 끌고 다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두려움에서 우리를 벗어나 자유롭게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합니다. 14절.
히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아멘.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성경은 ‘죽음의 세력’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마귀는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입니다.
여기서 세력이라는 단어의 원어의 의미에는 “권능, 힘, 능력”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은 마귀가 힘이 세고 능력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보면 마귀에게 끌려다닌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귀신들려 무덤사이에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끌려다닌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다고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그리마옵소서.
예수님을 붙들고 거칠게 흔들며 항변합니다. 예수님이 사탄아 네 뒤로 물러가라 말씀합니다.
사탄에게 이끌리면 하나님의 일과 사역을 자신의 생각으로 막아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귀를 멸하셔다고 성경이 기록합니다.
죽음의 세력, 두려움의 권세잡은 자를 예수님은 멸하셨습니다.
 
감리교와 성결교에 큰 영향을 준 웨슬리가 있습니다.
한번은 미국에 선교를 위해 갔다가 도중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풍랑이 얼마나 거세었는지 바닷물이 객실 창을 부수고 돛대까지 부러뜨릴 정도였습니다. 위기의 순간 웨슬리를 포함한 영국인들은 죽음의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모라비안 교도들은시편을 찬송하며, 기도하며 침착함을 유지했습니다. 웨슬리는 이후 그들에게“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물었고, 그들은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고백했습니다. 이후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과의 교재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의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어느 때고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슬럼프일 수도 있고, 질병의 문제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남녀의 문제, 직장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은 그 세력을 잡은 자를 멸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의 자녀임을 확신하며,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의 주인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확신할 때, 오늘 두려움의 세력이 크게 보일지라도,
예수님 안에서 반드시 승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3. 결론
그렇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더 헤아려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 하나님 안에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안정감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다시 일어서 나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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