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6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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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본 시편을 읽으면 출애굽 구원의 여정이 떠 오른다. 기도자가 기도에 앞서 ‘지난 주 무슨 일이 있어지‘, ’지금까지 무슨 사건이었나’ 하는 생각을 한다. 어떤 이들은 ‘기도 줄을 잡는다’ 라고 말하거나 쉽게는 기도거리를 찾 표현도 한다. 오히려 시편 한 편을 읽고 묵상을 하면서 기자의 흐름을 따라 기도 한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아마 시편 기자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구원에 대한 묵상 그 중에서 가장 큰 ‘민족의 구원‘인 출애굽의 시간을 묵상했다면 우리 역시 이렇게 오래전 내가 어떻게 예수를 만났는지를 돌아본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우리 성경에는 ’온 땅이여’라고 시작을 하는데 원문에는 ’찬양하라‘라고 시작하고 이어서 ‘그 이름의 명성을/영광을‘ 라고 한다. 그리고 ‘온 땅에‘ 환호하라는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분이 하신 일을 열거하고 명성을 높이는 것은 마치 아이들이 히어로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말도 안되는 능력을 흉내 내는 것으로 비유해 볼 수 있다. 성인이 되면 히어로는 사라진다. 자신이 어려움을 이기고 항해를 성공시키는 선장처럼 말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극적인 회복이나 죽음에서 건져짐을 경험하면 ‘보이지 않는 손‘ 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다. 그건 천운이었다.
기도자는 3절에서 ’주의 권능으로’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최근 ‘권능’이라는 표현을 방송에서 자주 들었다. 사실 살면서 경험하기 쉽지 않다. 헌법 재판소의 권능을 무력화한다. 국회의 권능을 무력화하려 했다와 같은 말 들이다. 권능이 상실될 때 일어날 뻔 했던 아찔한 순간을 상상해 보라. 그런데 주의 권능이 나타났다. 기도자의 시선에서 자신의 민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권능이 이제는 원수가 복종케 되는 권능으로 드러난 것이다. 우리 법 체계가 권능을 행사한다는 건 법 취지에 맞게 정의를 실현하려는 판결, 기능 등 모든 것의 제 위치를 의미한다. 기도자는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났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말에 주의 성실하심이 크다는 말처럼 말이다. 그래서 ’온 땅이여‘ 환호하라는 것이다.
4절부터 권능의 내용이 소개된다. 그러니 기도자는 ’와서‘’, ‘보라’고 말한다. 마치 요한복음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한 말처럼 말이다. 권능이 드러난 자리로 우리를 초대한다. 기도자는 ‘인생에게 한 일을‘ 보라고도 말한다.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신 것이 그런 표현이다. 살아보니 모든 일이 과학을 기반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지구는 태양을 돌고 태양은 우리 은하를 돌지만 그 안에 우리의 변화무상한 인생은 그렇게 정해져 돌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고 주문처럼 외우지만 삶은 바쁘기에 버둥거리고 하루의 곤함에 지쳐 신의 있음을 생각할 틈조차도 없을지 모르지 않는가.
그러나 기도자는 자신 삶의 방향이 하나님의 행하심 가운데 일어나며 능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아는 것이다. 기도자는 이미 오래전 자신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역사/기적은 그에게 기억 속에서 사라질 이야기일 수도 있고 ‘그런 일은 그 때나 있었던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니 예수를 영접했던 때의 뜨거운 마음은 오히려 차가운 신학으로 바뀐건 아닌지, 기도하며 무릎을 꿇었던 바닥과 의자는 몇 권의 신학책에 묻힌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를 이끌어 주셨지 하는 구원의 기쁨을 다시 한 번 묵상하게 된다. 7절에 ‘그의 능력으로 그렇다! 그의 능력은 말씀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리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에 기도자는 늘 ’하나님의 성전‘과 ’여호와의 말씀’과 ’여호와의 도/길’을 끓임없이 고백하는 것이 아닌가? 9절 이하에서도 그렇게 하시는 방법으로 ’살려 두신다‘ 인생의 변화는 절망을 향하는 코스일 때도 있지 않는가. 그런데 ’실족 하지 않게‘하신다. 우리가 받는 시험(10)은 실족의 방향이 아니다. 단련의 목적을 가진다. 화려한 다이아몬드는 금고에서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신부의 손가락에서 빛을 발하지 않는가? 단련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11절에 우리는 힘들고, 어렵다. 그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끄신다.
그러니 13절 이하에 ’내가‘라는 기도자의 고백을 기억하자. ’번제물을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는다‘는 내가 할 바는 한편으로는 시험을 이기는 방법이겠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을 갖고’ 나간다. 위로는 ‘주의 집‘에서 주어진다. 기도자의 외침과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깊은 외침은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고백이다. 우리 스스로를 바꾸는 힘은 없다. 하나님에 의해 교정 받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앞서 시험과 단련을 기억하라. 국가 대표가 수많은 반복으로 자신의 몸에 배어 ‘내가 했다’고 고백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방법이다. 그래서 ’내가’‘ 13. 15, 17, 18에 표현된다.
그리고 마지막은 ’내가’가 아니라 20절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고 고백하자. 서두의 ’찬송하라’가 선포라면 여기서는 우리가 그렇게 원하는 ‘복/바라크‘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송/높이는 경험을 복 받았다고 시편 기자는 노래한다. 지금 신약의 도시 베뢰아를 통과하며 아침에 묵상한 66편을 버스 안에서 글을 읽을 여러분들을 생각하며 또 나 자신을 돌아보면 묵상한다. 나도 이것이 복이로다로 함께 나눌 수 있는 여러분이 있어서 그렇다고 묵상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