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를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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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

질병은 때로 생활습관이나 식습관에 따라서, 때로는 유전적인 이유나 외부의 사건이나 환경적인 요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대 과학은 오랜 시간 동안 이러한 요인들로부터 인류를 보호하기 위해서 의학을 발전시켰습니다. 단순히 질병을 없애는 치료뿐 아니라 이를 위해 진단하고 예방하는 의술도 발전시켰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성경의 배경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눈이 멀거나, 걱디 못하거나, 중풍병으로 고통을 받던 자들은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은 이런 이유에서 소외를 경험하였고, 사회적인 차별을 겪어야 했습니다. 오늘 날이라면, 신경계 문제, 망막의 이상증세를 겪던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었을텐데, 당시에는 저주를 받는 사람이 된 셈입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복음 5장의 이야기는 바로, 이렇게 소오된 사람들,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이 연못에 와서, 초자연적인 기적에 의지한다는 것은, 그들이 전혀 다른 의지할 만한 것이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관찰
절름발이는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베데스다 연못을 가지 못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자력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자였다. 그는 낫고싶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상황탓만을 하는 사람이며, 이제는 내가 낫고 싶습니다라는 말도 잊어버린듯 한 사람이 되었다. 나아야 하는데, 상황만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자신 앞에 있는 인물이 누군인지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질문. 왜 예수는 안식일에 논쟁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병자들을 고치셨던 것인가? 안식일은, 창조질서였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히 아름답게 완성하시고, 창조를 기뻐하시면서 안식하셨다. 그러나, 죄는 피조세계에 안식을 파괴했다. 심히 아름답던 세계는 질병과 죽음으로 가득차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죄로 가득한 피조세계를 바라보며 안식하실 수 없다. 절름발이는, 어쩌면 예수님께, 나를 물로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나를 도와서 저 물로 넣어줄 이가 지금 질문을 하는 청년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을지도모른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남성이 할 수 없는 바를 명하신다. 일어나서 걸으라는 것이다. 그는 절름발이이다. 발을 못쓰는 자이다. 그는 낫기 위해서라면 물로 내려갔어야 하는데, 그 원하는 물가로 나아가지도 못했던 자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하시는 바는 일어나서 가라는 것이었다. 너가 자리에 깔아두었던 것도 챙겨서 가라는 것이었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스스로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 경험하지 못한 어떤 감각이 느껴지고, 그는 자신의 발로 일어나서 걸을 수 있겠되었다. 이 기사의 특이한 점은, 주님께 나와서 어떤 간구도 없이, 예수님의 일방적인 역사로 인한 치유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이렇듯 수혜자의 간구가 없더라도, 병자를 고치신 적이 있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에서 단지 병자를 고치시는 말씀에서 끝나지 않는다. 안실이 논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미쉬나라는 유대인 율법서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의 일을 나열하는데, 마지막 39번째 일이 짐을 옮기는 행위를 금하고 있다. 그러니,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짐을 옮기는 일은 명백하게 안식일을 거스르는 행위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자리를 들고’가라며, 이 행위를 명령하신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병자를 고칠 뿐 아니라, 짐을 들고 가게 하는 율법의 올바르지 않는 행위를 종용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계속 여지를 주시면서, 일하시는가? 아직은 정리된 언어를 이것을 설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쉬시는가? 안식일에 사람이 죽고, 사람이 태어난다. 하나님의 생명 사역이 지속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버지께서 우주에 대한 섭리적인 보살핌으로 안식일에 일하시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죄로부터 영향을 받은 자들을 보살피고 그들을 구속하기 위해 안식일에도 일하신다.
연못의 장소 - 예루살렘 도시의 북동쪽 양의 문이라고 불리는 곳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문 근처에는 연못이 두개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두 연못의 길이는 100여미터, 너비는 140미터 정도가 되니까, 얼추 축구장 2개 규모의 못이었습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치료를 바라던 자들에게는 정말 자비를 베푸는 장소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먼저 그 못에 들어가는 1명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두에게는 절망의 집이었습니다. 세상에서도 경쟁에 밀려서, 등수에 밀려서 억울하게 살았는데, 여기에 와서도 기회를 잡지 못하는 살마들에게는 참 세상 더럽다라고 느낄 만한 장소였습니다. 눈치 싸움이 벌어집니다. 계산대에 줄이 길게 있으면, 이리갈까 저리 갈까 엄청 고민을 하듯이, 다들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이 환자의 경우에는 어떻게든 이 연못까지는 왔는데, 연못 그 주변에서 연못까지 들어가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노진문 목사는 이 부분을 해설하면서, 이 환자는 자신의 궁극적인 열망이 치유를 받는 것에서, 저 연못으로 1등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언급합니다. 결과적으로는 같은 결말을 가지고 올 수는 있지만, 이제 그는 또다른 결핍과 문제를 만났습니다. 이번에도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자신이 부릴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예전보다 더욱 문제가 늘어갑니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베데스다 입니까? 우리의 주목을 이끄는 곳은 성공입니까? 위로입니까? 오늘 본문은 저희에게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고, 우리 인생을 유일하게 해결하시는 복음이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과의 두 번째 만남> 더이상 죄를 짓지 마라, 너를 상하게 할 것이다. 주님의 요청은 ‘완벽함’삶은 아니었다. 죄가 단 하나도 없는 삶은 아니었다.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자비를 경험한 것에 대하여, 반응하는 삶을 살라고 하신 것이다. 벧전 2:18 성도는 ‘은혜 안에서 자라가는 자’이지, 이미 거룩에 있어서 완성된 자는 아니다.
38년 환자가 경험한 병과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38년 동안 해매던 거는 우연의 일치인가? _지리 주석, 또한 지리주석은 이 명절이 부림절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주후 28년, 부림절이 안식일과 일치하는 유일한 시기이다.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 있다. 요 20:30-31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함이라, 또한 그의 이름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로 볼 때, 요한이 이 사건을 포함시킨 이유는, 예수님의 치료가 이방 어떤 신의 치료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리적인 통찰> 거의 비슷한 크기의 두 연못이 있었다. 북쪽에 위치한 연못은 빗물을 저장하는 용도로, 아랫 연못은 정결예식을 위해 사역되었다. [지리 주석] 이런 주장을 한 깁슨의 주장에 따르면, 이 두 연못은 주전 25년 헤롯 시기에 건설되었다. // 인공 연못이다. 1977년에, 발굴되었다. 그러나, 지리주석은 베데스다가 자비의 집인 만큼, 어떤 건물이나 특정한 건축물이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위 두 연못에서 일어난 일은 아닌것으로 결론 내린다.
그러나, 이 장소는 이방 신전의 건물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38년, 민수기 14장 29-30절은 38년 언급을 한다. 이 38년은 믿지 못한 년수를 가리킨다.
부림절에 유대인들은 가난한자를 구제한다(에스더 9:22) . 예수님은 이 날에, 가난한 환자에게 치유와 영생을 주셨다.

This man was—like the nation of Israel—wandering in the wilderness for thirty-eight years because of unbelief. He had a choice to make. He trusted the words of the Lord Jesus, God manifest in human flesh, and received the Purim gift that the Lord offered to him—physical healing, the forgiveness of sin, and thus eternal life.

이 자는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난다. 왜 성전에 왔을까?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한다.

키너 요한복음 (3권) (2) 베데스다(5:2)

다리를 저는 사람은 성스러운 경내에서 쫓겨났을 것이지만(레 21:18; cf. 삼하 5:8), 확실히 성전산 부근에서 쫓겨나지는 않았다. 그 연못의 위치가 “양문” 옆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역사적 회상(historical remembrance)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9장과 이 내러티브의 연관성을 말해 주는 기능도 한다. 9장에서 치유된 사람은 양(sheep) 중의 하나이며, 그를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려 하는 사람들은 참된 “양문”을 무시하는 사람들이다(요 10:1–4, 7–8).

기도하다가 깨달은 것 : 이 병자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지도 않았다. 왜냐면,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하는지,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간치도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베푸신다. 이 남자는 예수님이, 낫기를 바라느냐라고 물었을 때(막 10:51)
0,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이야기 하지 못했다. 이것이 우리의 현재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물로 데리고 가시는 분은 아니셨다. 그리고 다만 그를 치료만 하시는 분도 아니셨다. 예수님과의 두 번째 만남이 성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볼 때, 그의 위치는 바뀌었다. 그는 지금 성전에 나와있다. 그는 병든 육체가 나았을 뿐 아니라,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의 무지, 오해, 알지 못함이라는 것을 아시고, 자신의 선을 베풀어 주신다.
예수님과의 두 번째 만남에서, 이 환자의 질병의 원인은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수님이 그를 낫게 하신 것은, 그의 죄를 해결하셨음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죄의 삶을 살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죄가 다시 환자를 심한 상태로 돌릴 수 있다고 경고 하신다. 이렇듯, 주님은 죄를 경시하지 않으신다. 우리 삶에 여전히 죄는 존재한다. 죄악된 마음이 앞선다. 하나님의 죄사함을 경험하고, 은혜 안에 머물러 있는 자라 할 지라도, 정오의 돋는 해와 같이 신자의 삶은 죄는 점점 죽이며, 의에 대하여 점점 살아가는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예수님의 경고는, 단 하나의 죄라도 짓는 순간, 너는 끝이다 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다. 복음 안에서, 살아가라고, 죄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복음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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