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경배하는 왕은 누구입니까?(마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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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경배하는 왕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경배하는 왕은 누구입니까?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15-16세기 영국 국왕이었던 헨리 8세의 수석장관을 맡았던 토머스 모어는, 비록, 그는 종교개혁 시기에 로마 카톨릭의 편에 서서, 개신교를 대항했던 인물이었지만, 그는 오직 자신의 주인만을 따르던 충직한 신하였습니다.
당시 영국의 국왕이었던 헨리 8세가, 자신의 결혼과 이혼 문제에 교황이 관여하는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헨리 8세는 로마 카톨릭과 영국을 결별시키기 위해서, 영국 국교회의 수장은 국왕 자신이라는 수장령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때, 토머스 모어는, 자신이 섬기는 왕이 헨리 8세였음에도, 그는 카톨릭 신앙을 자신의 유일한 주인으로 섬기며, 헨리 8세의 결혼과 독립에 반대했고, 결국 그는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당하게 됩니다.
비록, 그는 투철한 카톨릭 신앙의 소유자로 개신교 탄압에 앞장섰던 인물이었지만, 자신의 왕을 버리고, 신앙을 자신의 참된 주인으로 삼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왕정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왕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관점으로 보면, 여전히 왕정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과 예수라는 두 왕중에, 우리는 누구를 우리의 왕으로 섬길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헤롯 왕 때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헤롯 왕은, 실질적으로 주전 37년부터 주후 4년까지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대지역을 다스렸던 왕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황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전 40년 전부터,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성경에 묘사된 헤롯 대왕은,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되지만, 사실 그는 역사적으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특별히 그는 건축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는데, 팔레스타인 해안에 헬레니즘 양식의 도시를 만들어 가이사 아구스도 황제를 기념하여 ‘가이사랴’로 불리는 도시를 세웠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의 기초를 확장하고 재건했습니다.
이처럼 그가 세운 건축물 가운데 아직까지도 보존되고 있는 건축물은 예루살렘 성전 산에 있는 서쪽 성벽인 통곡의 벽과 가이사랴 성읍, 마사다 요새와 헤로디움이라는 요새 겸 자신의 궁정과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처럼 위대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매우 악랄한 인물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아구스도 황제는 농담으로 “헤롯의 아들이 되는 것보다 헤롯의 돼지가 되는 것이 더 낫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잠재적 경쟁자를 경계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유대 사회는, 전통적으로 유다지파의 다윗 왕의 후손들만이 진정한 왕으로 인정되었고, 특히 오실 메시야 또한 다윗의 혈통에서 나오실 것이란 기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헤롯 왕은 순수한 유대인이 아니라 반은 유대인, 반은 에돔인이었으며, 유대 전통에 따르는 다윗의 왕의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의 자리에 대한 집착이 컸습니다.
그의 이러한 왕의 자리에 대한 집착으로, 말년에는 자신의 아들들이 자신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의 세 명의 아들을 처형하기까지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본문 2절의 말씀을 보면, 1절에서 분명히 “헤롯 왕”이라고 언급을 한 뒤에, 2절에서 다시 “유대인의 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유대인의 왕은 누구일까요?
이 유대인의 왕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은, 누가복음 2:24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이처럼, 누가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비둘기로 제사하려고 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레위기 12:6-8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아들이나 딸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그 여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
레위기 12장 6-8절 의 말씀을 보면, 자녀가 태어나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는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데, 이 때 번제에 필요한 제물이 ‘양’입니다.
그런데, 양을 바치기 어렵다면, 산 비둘기나 집 비둘기 둘을, 하나는 번제물로 다른 하나는 속죄제로 드리도록 율법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비둘기로 제사를 드리려 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정이 매우 비천한 가정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는 마리아의 찬가인, 누가복음 1:48의 말씀에서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라는 부분과 누가복음 1:52-53절의 말씀에서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의 왕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셨고, 그는 지금까지 존재하는 어떤 외형적인 건축물을 만들지도 못했고 정치적, 경제적 혁명을 일으키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약속대로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셨을 뿐이며, 이사야의 말씀을 따라 볼 때, 아마도 흠모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자신의 자리를 위해서 남을 해치는 분이 아니라, 반대로 남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폭력과 억압이 아니라, 사랑과 긍휼로 자신의 백성들을 대하셨고, 로마의 황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폭력과 억압으로 세상을 다스리려 했던 헤롯 왕은, 역사에서 사라졌고 그의 건축물만 남아있지만, 유대인의 왕은 사랑과 긍휼로 세상을 다스렸고 그 결과 그는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셨지만, 그의 말씀과 사랑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오늘 마태복음의 말씀은, 2장 1절과 2절에서 헤롯 왕과 유대인의 왕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를 왕으로 섬기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삶 속에는, 두 왕이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왕과, 유대인의 왕이신 메시야 예수입니다.
세상은, 마치 가나안 우상들처럼 눈에 보이는 화려함으로 치장하고 있고, 막대한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2천년 전 예수님을 유혹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섬기면, 세상의 영광을 주겠다고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세상을 섬기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세상의 영광과 부와 명예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왕을 섬길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고난과 십자가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하지만, 유대인의 왕을 섬기면, 이러한 고난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고난의 끝에 주어질 말할 수 없는 영광이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여러분, 우리는 누구를 왕으로 섬기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왕으로 섬긴다면, 오늘 헤롯과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더 높은 자리를 위해서 자신의 자리에 위협이 되는 존재를 짓밟고 다치게 하는 삶.
그래서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세상의 영광을 누리는 삶.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고, 세상의 영광을 누릴 수는 있지만, 그러한 삶에는 구원이 없고, 참된 영광도 없고 영생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상처와 아픔과 눈물만이 가득합니다.
반면, 우리가 유대인의 왕을 섬긴다면, 비록 우리가 그분을 따르고 섬긴다는 이유로, 우리는 세상의 핍박과 고난을 받게 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 참된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삶,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우리의 왕으로 섬기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으로 온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헤롯왕을 찾아갑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아마도 별을 연구하는 점성술사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어떤 신적인 출생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별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렀고, 예루살렘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왕궁으로 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적인 왕이 태어났다면, 그것은 분명 왕궁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헤롯 왕을 만나지만, 그는 헤롯 왕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께 준비한 예물을 드리고 경배함으로써, 헤롯 왕이 아닌 유대인의 왕을 참된 왕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또한 마태복음은 헤롯 왕이 유대 지역의 왕이었음에도, 의도적으로 헤롯을 단순히 ‘왕’으로 표현하는 반면, 아기 예수님께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호칭을 붙임으로, 바로 이 아기 예수님께서 참된 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계보는, 왕족의 계보라고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왕으로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들인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 또한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그분의 영광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동기 또한 세상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결과 또한 세상적 가치로 평가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돈을 가졌고, 얼마나 많은 명예를 가졌고, 얼마나 많은 인기를 가졌고, 내가 얼마나 좋은 집을 가졌고, 내가 얼마나 많은 노후 준비를 했고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주님과 동행했고, 내가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따랐으며, 내가 얼마나 주님을 위해 열심히 살았고, 내가 얼마나 주님으로 인해 고난 받았으며, 내가 얼마나 주님 안에서 평안과 기쁨과 소망을 누리며 살아왔는지, 그것이 내 삶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세상에 내가 세운 업적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쥐어주신 이 십자가를 얼마나 온전히 붙들고 살았는가가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 고난의 길일지라도, 그 길이 우리의 왕이신 주님께서 가신 길이기에,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마땅히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길 끝에 부활의 영광을 누리셨듯이, 우리도 이 길 끝에서 반드시 주님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잠시 잠깐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놓치지 말고, 끝까지 주님을 왕으로 섬기는 이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일제강점기 시대 때, 일본은 조선의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이를 국민의 의무로 규정하여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탄압했습니다.
이에 193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조차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허용했음에도, 주기철 목사님은 이를 끝까지 거부하셨습니다.
결국 주기철 목사님은 1939년부터 여러 차례 투옥되셨고, 1940년에는 정식 재판에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1943년에는 다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심한 고문을 받아 신사참배를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거부하셨습니다.
끊임없는 고문과 심문 속에서, 자신이 걷고 있는 이 길이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과 같다는 믿음을 더욱 굳히셨습니다.
이런 극한의 상황 속에서 주기철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주님이 가신 길입니다. 나도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주님만을 자신의 참된 왕으로 섬기고, 십자가를 놓치 않으셨습니다.
오늘, 그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을 본 받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세상이 아니라, 우리의 주님만을 우리의 참된 왕으로 섬기고, 십자가를 놓치지 않는, 믿음의 성도님들, 세상의 요구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에만 순순종하는 믿음의 성도님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