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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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길을 준비하라

본문 : 누가복음 3:1-14
서론
오늘은 주의 길을 준비하라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다. 첫번째는 시대적 상황이다.

1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누가복음 3장의 시대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심각하게 타락한 시대였다.
로마 황제 디베료는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황제 숭배를 강요했고, 이를 거부한 사람들은 극심한 핍박을 받았다.
유대의 헤롯은 순수 유대혈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표를 얻기 위해서 성전 건축을 추진했지만, 그 부담은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두면 등장하는데 본래 한시대에 대제사장은 한명인데 두명이 기록되었다.
사실 법적으로는 가야바가 대제사장이었다. 그런데 실권은 그의 장인이었던 안나스가 쥐고 있었던 것.
이미 안나스는 비리와 스캔들 때문에 로마로부터 폐위되었다. 본래 대제사장에 대한 임면권은 로마에게 없었고 하나님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이 보여주는 것은 더이상 제사장이 제사장의 역할보다 정치적인 이권을 위한 도구로 변질되었다.
이처럼 정치와 종교가 부패한 시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곳은 권력의 중심이 아닌 광야였다.
안나스와 가야바도 대제사장 요한도 어떻게 보면 제사장 가문.
그런데 묵상을 하면서 왜 이 둘을 대조하면서 누가는 기록을 했을까를 생각을 해보았을 때,
원래 제사장 직은 계승되게 되었음. 요한은 사가랴를 이어 제사장으로서 성전에서 일하는 것을 업을 삼아도 되었음.
그러나 요한은 그 직업으로서의 제사장직을 받지 않고 그는 광야로 나갔음 .
하지만 그는 제사장 직의 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그는 광야로 나아가 실질적인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했음.
제사장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의 중재자 역할.
우리 모두는 제사장으로서 세상 가운데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 보여주시는 모범적인 제사장의 삶은
직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삶이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옷, 장신구, 사회적 지위, 이런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으로서의 부르심은 그러한 삶으로의 부르심이라는 것.
목사 안수를 1년을 앞두고서 제 마음 가운데 새긴 것은 목사는 직이 아니라 삶인 것이구나
하나님이 목사로 부른다는 것은 목사로서의 직업적 역할과 직무만 맡긴 것이 아니라
그에 걸맞는, 그에 합당한 삶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명심해야겠다고 적용을 했다.
마찬가지 성도로서의 부르심은 예배를 나오고, 직분을 갖고, 경건생활을 얼마나 했고
무엇을 지키고 안지키고가 아니라 그에 성도의 본질에 걸맞는 삶으로의 부르심이라는 것.
예전에 마크 드리스콜이라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그 목사님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저는 지옥이 목사들로 가득 차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교회에서 자라나서,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에서 성찬식에 참여하고, 그 교회에 등록을 하고,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고, 결국 그 교회에서 장례식까지 치렀지만 결국에는 지옥에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다니는 것과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성경이 말하는 대상은 모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이 편지는 교회에서 읽히고 있지만, 그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여러분은 정말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겉으로 내가 어떻게 보여지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부르신 삶에 걸맞는 모습과 양심으로 삶을 살고 있는지,
그리스도인의 빛이 나의 일상 한복판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지
아니면 빛은 다 꺼져버린 채, 화려한 옷과 장신구만 치장한 채,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말씀 앞에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 생명력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분명하게 한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말씀이 임했는가, 말씀이 사라졌는가 입니다.
성전 한복판에서 영적인 생명력을 잃은 채, 부패하고 썩어있는 종교인들에게는 없었지만
광야에서 머물고 있던 세례요한에게는 있었던 것이 무엇인가? 말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말씀의 임재이다.
말씀이 임한 것이다.
말씀이 임했다라는 것은, 내가 말씀을 읽거나 설교를 듣거나 성경공부를 했다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대제사장들에게도 율법은 선포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연구하는 일들은 있었다.
말씀이 임했다라는 것은 그 말씀이 내 삶에 실제가 되어 강력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이 임했던 장소는 어디였는가? 빈들이었고 광야였다.
여기서 우리는 광야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원한다.
유대인들의 통념 상, 통념이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누구나 갖고 있는 사고잖아요.
그들의 통념상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또 광야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라고 여겼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다가 만나주신 장소는 광야였다.
또 직관적으로 자신의 임재를 드러낸 것이 광야에 불기둥과 구름기둥 사건이었다.
하나님이 빈털털이로 쫓겨났던 다윗을 만나주신 곳이 광야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광야에는 공통점이 있다.
광야는 어떤 것인가? 버림받은 곳, 내쫓긴 곳, 고독한 곳, 황망한 곳이다.
빈들은 사람이 정상적으로 필요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등등을 자력으로 구할 수 없는 곳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세례요한과 같이 빈들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더러 광야로 나가서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산 속 깊은 곳에 기도원이나 수도원을 갈 필요도 없다.
우리의 삶의 자리, 우리의 가정, 우리의 일터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공간으로 만든다면 그것이 바로 ‘빈 들’인 것이다.
대표적으로 마가의 다락방은 예루살렘 도성 한복판에 위치해있었지만
그 안에서 오직 말씀을 의지하며 성령을 기다린 사람들에게는
그곳이 빈들이었고 광야였던 것이다.
빈들은 어떤 장소가 아니다. 삶의 방식이고 스타일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는가
아니면 정말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는가
그 삶의 방식과 스타일에 따라 우리의 삶도 ‘빈 들’이 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재하는 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최근들어 얼마나 말씀의 임재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실제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하고
그저 나의 사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라면
이시간 우리의 삶의 방식을 돌아보고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는 광야에서 주의 길을 준비한 이야기이다.
이 주의 길을 준비하라는 말은 이사야서에 이미 예언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 너는 주의 오실 길을 예비하라
골짜기가 메워지고 높은 산은 깎여지고 험한 길은 평탄해질 것이다라는 이 그림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가 하면 왕이 임하기 전의 모습을 나타내보여준다.
고대의 길은 울퉁불퉁했다. 그래서 왕이 등장하기 전에 먼저 나가는 사절이 있었다.
그래서 왕이 돌부리에 걸리거나 움푹 패인 곳에 발을 헛디디는 일이 없도록 길을 닦았던 것이다.
그래서 왕이 목적하는 곳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예비하는 사람들이 바로 사절이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 사절이 나타나서 막 청소하고 길을 닦고 있으면
“아 왕이 오시나보다” “뭔가 대단한 사람이 오나보다”하고 준비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이 사절들이 길을 잘 닦아 놓으면 그 뒤에 오시는 이는, 그게 왕이든, 혹은 대장군이든
목적한 곳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게 오늘 세례요한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요한이 어떻게 그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말하는가 하면
그가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에 보통 세례는 이방인을 위한 것이었다.
세례는 언제 본격적으로 생겨났는가 하면 구약에는 거의 등장하지를 않고
신약으로 넘어와서야 본격적으로 등장을 한다.
세례는 언제 생겼는가 하면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400년 간의 기간 동안에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베풀었던 것이 보통 세례였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우리는 선민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우리는 태어나면서 아브라함의 혈통이고 거룩한 족속이지
그러니까 우리는 선하고 깨끗한 혈통이라고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이방인 중에서는 몇몇 자신이 섬기는 바알이나 아세라나
다른 우상들을 섬기다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겠다며 개종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더러운 이방인들을 그냥 받아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물로 너희의 죄를 씻어야만 그들을 받아주는
약간 인종차별적이고 무시하는 느낌으로 세례를 준 것이다.
그러니까 이방인들 외에는 세례를 받지 않았음.
그런데 세례요한은 누구에게 세례를 주었는가 하면
이방인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세례를 주었고
다 그렇게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외쳐왔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너희가 이방이든 유대인이든
너희가 성경 교사든 창기든
너희들이 평생토록 죄를 저지른 사람이든
아니면 평생토록 착한일을 해왔다고 여기는 도덕적인 사람이 든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고 모두가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다
너희도 홀로 광야에 있는 존재들이다. 라며 말하면서
유대인들에게도 세례를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보통 이방인들이 세례를 받을 때, 유대인들은 어떻게 했는가 하면
그 옆에 서서 깔보면서 “그래 너희는 좀 씻어야 돼,, “그렇게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요, 내가 세례를 받으려고 한다면 얼마나 낮아져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누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진짜 메시야를 맞이하고 영접하려면
높아진 마음은 낮아져야만 했구요 .
움푹패여서 두려워하고 있는 자들은
돋우워져서 용기를 낼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컨대, 이방인들은요.
너희들은 스스로 죄가 많고 자격이 없다고 말하지만
이 세례를 통해서 그들은 용기를 낼 필요가 있었구요.
그에 비해 교만했던 유대인들은요,
자기들이 죄인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세례가 필요했떤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누가는 우리에게 두가지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만나기 이전에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번째는 자기연민을 씻어내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나같은 것은 결코 사랑하실 리가 없어.
하나님이 적어도 지금 나의 모습은 용납하시지 않으실거야. 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주저하고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자기기만을 씻어내는 것입니다 .
스스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보다
온갖 선한 행실들과 열심으로 자기자신을 포장하며
겉으로는 회개기도도 하고 입술로는 죄인이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자신의 비참함과 절망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낮아질 필요가 잇었지요.
이시간 나는 어느 쪽에 속해있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저는 둘 다였습니다. 복음을 만나고 회심을 하기 이전에
저는 복음을 아는척했고 누군가가 죄인이냐고 물었을 때,
저는 당연히 죄인이죠 라고 말할 수 있었고
누군가가 당신은 구원 받았냐고 말하면 체면상 당당하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런데 저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는 여전히 “나는 복음을 모르고 나는 두려워하고 있으며
나는 복음이 필요하다고” 외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저는 그 외침을 온갖 사역들과 봉사와
주변 사람들의 “참 믿음 좋다, 참 말씀이 은혜롭다”라는 말들로
잘도 포장을 해왔던 겁니다.
또한 저는 두려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위선적인 나를 정말 하나님이 받아주실까”하는 두려움과 자기 연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이런 자기기만과 자기연민을 씻어주셨을 때,
비로소 그 복음을 두팔벌려 환영하고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믿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또 다시 자기 기만과 자기 연민으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누리지 못하고 방황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시간 기도하기를
내 안에 있는 자기 기만과 자기 연민을 주님의 거룩한 보혈로 씻으셔서
주님이 나를 위해 베풀어주신 그 복음의 진리를 환영하며 누릴 수 잇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복드립니다.
마지막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촉구하는 장면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이들을 향해서 맹렬한 진노와 독설을 퍼붓는데
그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그 무리들은 “죄를 씻고 진노를 피하는 수단으로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 했던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회개 기도 한번 찐하게 해서 “자신의 책임을 지워버리겠다”
다시 말해, 어떤 죄책,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자신의 부끄러운 감정을 없애버리기 위한 목적으로
세례 요한 앞으로 달려나왔다 라는 것이지요. 요한은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 마음의 동기라면 굳이 애써서 회개기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진짜 회개할 마음이 있다면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세례요한은 다소 의외의 대답을 합니다.
“네가 옷을 두벌 입고 있다면 헐벗은 사람들에게 하나를 나눠주라”
“먹을 것 있는 자도 그리할 것이니라”
세리가 묻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고 정직하게 세금을 거둬라”
마지막으로 군인들이 나아와서 묻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고 거짓으로 죄를 씌우지 말고
받은 월급에 족한 줄로 여겨라”
세례요한이 대단한 걸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을 다 팔아서 해외 선교하는 일에 쓰라는 것도 아니었고
주님을 위해 대단한 헌신과 봉사를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일들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삶의 자리에서 양심있게 행동하고
잘못하고 있는 것들을 바로 잡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회개 기도는 엄청나게 철저하게 하지만
삶에 있어서는 좀처럼 고쳐지지 않고
자신의 말과 행동과 습관들을 방치할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일일이 하나하나 지난 날 지은 죄를 다 일러바치는 것에 힘을 쓰지 말고
열번 죄를 지었다면 아홉 번으로 줄이려고 하고
이웃들에 대하여 인색했다면 밝게 인사하고 표정을 피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회개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표시만 제사장인 것이 아니라 그에 걸맞는 삶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삶을 주님의 말씀이 임하는 광야요, 빈들로 삼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앞에 낮아진 마음들을 용기를 내어, 높아진 마음들은 솔직하게 고백함으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참된 복음을 만나고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들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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