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이야기-01. 아담과 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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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 3:21(구약 4쪽)
설교제목: 성경인물이야기-01. 아담과 하와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반갑습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늘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하며 인사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함께 예배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어떤지를 엿볼 수 있는 영상 하나를 준비했습니다. 먼저 영상을 같이 시청하시고요. 오늘 성경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 영상: 4분 34초
영상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발견하셨습니까? 영상은 외국어를 공부하지 사람이 외국인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기술을 보여주는데요. 물론 완벽하진 않고 발음상의 문제 등으로 오류가 생기기도 하지만요.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저 정도의 의사소통을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참 흥미로운 일이 아닐까요? 이 영상은 약 1년 전에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입니다. 아마 영상은 그 보다 전에 촬영이되고 제작이 되었을 겁니다. 보통 영상을 유튜브에 올릴 때, 촬영 후에 편집을 하고 올리기 때문에요. 그렇다면,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기술은 얼마나 더 발전했을까요?
사실, 제가 정말 보여드리고 싶었던 영상은 다른 것이었는데요. 그것은 요즘 AI기술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미국의 OPEN AI 회사의 Chat GPT 관련 영상입니다. 아쉽게도 제가 보여드리고 싶은 부분의 영상은 영어로 나오고 자막도 없어서요. 그것 대신에 이 영상을 택했는데요. 제가 보여드리고자 했던 영상은 보다 앞서 본 영상보다 발전된 기술을 보여주었습니다. 처음에 그 영상을 보면서요. 매우 놀랐었는데요. 내용이 이런 거예요. 앞선 영상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언어로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데요. 이것을 Chat GPT가 실시간으로 통역을 해주는 거예요. 가령, 한 사람이 영어로 말하면 Chat GPT가 그것을 스페인어를 쓰는 상대방에게 영어를 스펜인어로 통역을 해주고요. 반대로 스페인어를 하면 스페인어를 영어로 통역을 해주는 거예요.
제가 처음에 그 영상을 보면서요. 이제는 정말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어지는 세상이 오려나 하고 생각했어요. 좀 우스게소리로 말해보자면요. 사도행전 2장에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방언을 하니깐 여러 나라에 온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잖아요. 그와 유사하게요. 이제는 영상에서 본 기술이 그와 같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닌가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해보게 돼요. 이렇게 세상이 변화하고 있어요.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정말로 제가 농담처럼 했던 세상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죠.
저는 이러한 기술의 발전을 보면서요. 인간에 관해 생각해봐요.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요? 기술이 점점 발전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점점 진화하고 발전하는 존재가 아닐까요? 이대로 발전을 거듭하면, 인간은 어쩌면 신과 같은 능력을 지니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이를테면, 죽음을 극복한다던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이렇게 인간을 긍정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요. 인간의 역사는 인간을 마냥 긍정하고 있지는 않지요. 우리가 잘 알기로 역사 속에 많은 전쟁이 있었죠. 같은 인간끼리 얼마나 많이 죽고 죽이는 잔인한 일들을 벌였나요. 또 기술의 발전이 우리에게 편리함만을 준 것은 아니지요. 위험성도 함께 주고 있는데요. 예를 들면, 우리 요즘에는 다 핸드폰 또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잖아요. 멀리 있는 사람과 가깝게 연결해주고 여러 정보들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요. 그것이 또한 우리에게 중독을 가지고 와서 핸드폰이 없으면 왠지 불안감을 느끼게 하고요. 스마트폰 안에 중요한 정보가 많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서 여러 범죄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이 있죠.
이렇게 보면,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복잡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간에게는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는 것 같으니까요. 그래서 인간을 무조건 선하다고 무조건 악하다고 말하기는 참 어려운 것이지요. 다만, 우리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신앙 안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이는 성경을 통해 살펴볼 수 있지요. 저는 특별히 오늘 성경이야기의 주제인 아담과 화와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이를 이해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처음으로 창조하신 인간으로 소개되고 있고요. 사실 아담이라는 말이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해요.
다시 말해서 아담과 하와에 관한 이야기를 살피는 것은요.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돼요. 물론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만으로 인간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요. 제가 오늘 설교 제목에 ‘01’이라는 숫자를 붙여났어요. 올해는 주로 이 오후 예배 시간에 제가 설교를 하게 되는데요. 아마 1년이라는 시간을 놓고 보면, 제가 두 자리 숫자에 해당하는 성경인물에 관해서 소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각각의 성경인물이 어떤 이야기를 품고 어떤 신앙의 교훈을 줄지에 관해 저도 계속 연구할텐데요. 저는 이 과정이 아마도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보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을 시작으로 기회가 닿는데로 성경인물에 관해서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려고해요.
서론이 좀 길었는데요. 오늘은 아담과 화와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해요. 먼저 한가지 짚고 넘어 갈 것은요. 성경인물 이야기를 할 때, 역사성에 관한 부분은 크게 다루지 않을려고 해요. 무슨 말이냐면요. 쉽게 말하서 ‘아담과 하와가 실존했냐? 실존했다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냐? 에덴동산은 어딘가에 있냐?’라는 식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어요. 실제로 제가 이와 관련된 자료를 꽤 많이 읽어봤어요. 그래서 꽤 흥미로운 이야기도 많이 접했어요.
간략하게만 소개하면, 아담과 하와는 실존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것도 이른바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서 인류의 조상이 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연구결과였어요. 신기하죠. 그러나 반대의 이야기도 있어요. 마찬가지로 과학적 연구 결과인데요. 아니 이전의 연구는 데이터의 부족으로 그와 같은 결과를 냈는데, 최근의 연구에서 데이터를 늘려서 조사를 해보니깐 인류의 조상이 한 사람이 아니라 다수였던 것으로 추청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두 이야기가요. 꽤 권위있는 과학저널에 등재된 이야기에요. 그러니 저같은 과학 비전문가는 어느 쪽이 맞는지 사실은 알 수 없고 판단도 잘 안서요.
그리고 이와 같은 이야기가 참 흥미롭게는 하지만요. 결국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무관하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애초에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깐 성경은 과학책이나 역사책은 아니라는 거에요. 보다 더 근원적 이야기에 관심을 두는데요. 하나님이 만든 세상과 하나님이 만든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하는 것이요.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해하게 되고요.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제가 앞으로 성경인물을 소개하면서 이 인물이 역사적으로 언제 어디에 어떻게 살았더라 하는 것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해요. 어떤 필요에 따라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겠지만 그것에 사실관계에 집중하지는 않을 거예요. 다만 그것이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관련이 있을 때만 살피고자 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보다 철저하게 성경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성경인물들의 삶과 특징을 살피고요. 이를 통한 신앙의 교훈에 집중하려고 해요.
이와 관련해서요. 저는 오늘 아담과 화와라는 인물에게서 얻을 수 있는 성경의 교훈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구절에 있다고 보는데요. 다시 한번 창세기 3장 21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창세기 3:21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 성경구절은 이러한 배경을 지니고 있어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먹지말라고 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곧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잖아요. 그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혔다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어요. 저는 아담과 하와가 가죽옷을 입게 되었다는 것이 아담과 하와이야기의 중요한 교훈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왜냐하면, 가죽옷이요. 아담과 하와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때문이에요. 단적으로 말하자면요. 아담과 하와는 죄인이라는 거예요. 이건 제 생각이 아니고요. 우리 개신교의 중요한 토대를 놓은 종교개혁가 ‘칼빈’ 의 이야기에요.
칼빈의 설명에 따르면요.
“하나님은 의도하시기를 우리의 최초의 조상들이 그런 옷을 걸치고 그들의 타락상을 보게 하셨으며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의 죄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려고 하신 것이다”라고 얘기해요. 그러니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힌 것은 마치 죄수에게 죄수복을 군인에게 군복을 입힘으로써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거예요. 결국 아담과 하와가 입은 가죽옷은 그들이 저지른 죄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에요.
이렇게만 생각하면 우리가 너무 비참한 존재라고 여겨질 수 있어요.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옛날 옛적에 살았던 어떤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 곧 우리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모습은 비참한데요. 평생을 죄인으로 기억하고 살아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인간이 원래부터 그렇게 비참한 존재는 아니었어요. 몇몇 성경구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요. 화면을 보고 같이 읽습니다. 먼저 창세기 1장 26절을 같이 읽습니다.
창세기 1:26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을 닮은 꼴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은 인간이 유일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인간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습니다. 이는 일종의 하나님의 권한을 대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를 통해 하나님은 인간을 다른 피조물보다 특별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한 구절만 더 보겠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인데요. 화면을 보고 같이 읽습니다.
창세기 2:7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중에서 생기를 불어 넣은 것은 인간이 유일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특별하게 대우하시고 계신지를 성경이 또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인간이 비참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비참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일까요? 창세기 3장 5~6절을 화면을 보고 같이 읽습니다.
창세기 3:5-6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이야기인데요. 또 앞에서 설명하기도 했는데요. 이런 거죠. 하나님이 먹지말라고 한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가 먹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의 본질은 사실은 5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은 것 가지고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하고 가죽옷을 죄수복처럼 입힌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주제 넘게 하나님처럼 되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가죽옷을 입고 죄를 평생에 짊어져야했던 인간은 스스로의 잘못으로 그와 같은 비극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구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죽옷은 인간의 비극적인 상태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요. 하나님을 찾게 되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기도 합니다. 아쉽게도 종교개혁자 칼빈은 동의하지 않는 듯하지만요. 제 생각에는 가죽옷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성경에 나오는 가죽옷이 히브리어로 ‘케토네트’인데요. 이는 요셉이 입었던 채색옷과 같은 단어이고요. 특별히 구별되는 제사장들만이 입었던 속옷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깐 가죽옷이라는 것이 성경에서 구별되는 존재들에게 입혀지는 특별한 옷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가죽옷은 온 몸을 가릴 수 있는 긴 옷을 말하는데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에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알고 수치를 가리고자 무화가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어요. 그들의 실력으로는 온 몸을 가릴 수 있는 옷을 만들 수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온 몸을 가릴 수 있는 가죽옷을 주심으로 그들의 수치를 덮어주십니다.
또한 가죽을 얻으려면 동물을 죽여야 하잖아요. 본래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비롯하여 창조하신 동물에게 육식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에요. 아마도 그 전까지는 어떤 동물도 죽임을 당하진 않았을 거에요. 하지만 가죽옷을 짓기 위해서는 동물의 희생이 불가피하잖아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마련해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도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여기에 관해 종교개혁가 칼빈의 입장은 다른데요. 칼빈은 가죽옷은 우리의 죄를 상기시키기 위한 벌로써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설령 칼빈의 이야기가 맞다고 하더라도요. 우리가 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또한 그분께만 구원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면, 비록 죄수복으로 가죽옷이 주어졌을지라도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중요한 도구가 됨에는 틀림 없어보여요.
이관형 작가라는 분이 있어요. 이분이 ‘바울의 가시’라는 저서를 통해서 자신이 조현병 환자인 것을 밝혔어요. 혹시 조현병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어쩌면, ‘정신분열증’이라는 말이 더 익숙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요사이에 뉴스에서 이 병을 앓고 있는 분들에 관한 사건사고가 종종 크게 보도되어서요. 낯설지는 않으실 거예요. 한편 그러다보니 이러한 병을 앓고 있는 분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거나 위험한 종류의 사람으로 보곤 하는데요. 사실은 저도 이분의 이야기를 접하기까지는 약간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의 간증을 들으면서 제 생각을 조금 조정하게 됐습니다.
이분이 조현병을 앓게된 것은 사실은 폭력으로 물든 어린시절과 학창시절에 따른 것인데요. 어린 시절부터 밥을 먹다 소리를 내거나, TV소리를 크게 튼다는 사소한 이유로 아버지로부터 폭력을 당했다고 해요. 중학교 2학년 때는 같은 반 짝으로부터 괴롭힘과 구타를 당했는데요. 주변에서 이를 말려주기는 커녕 괴롭힘에 동조해서 날로날로 괴롭힘이 심해졌다고 해요. 언젠가는 그 고통이 너무커서 이런 생각까지 했다고 해요. 자신을 괴롭힌 친구들의 이름을 칠판에 적고 학교에서 뛰어 내리면 어떨까하는 생각이요. 그러다가 진정한 복수는 자신이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요. 정말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고 해요.
그래서 머리를 삭발하고요. 학교의 어떤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요. 잠을 줄이며 공부를 했다고 해요. 심지어는 잠자는 시간이 아깝다고 여겨서요. 잠을 자지 않고 공부하기 위해서요. 학교를 마치고 독서실을 갔다가요. 집으로 가지 않고 공원에서 밤을 새고 학교로 가는 일을 반복하기도 했다고 해요. 그것도 모자라서요. 아예 집을 나와서 공원에서 노숙을하며 지낸 적도 있다고 해요. 이렇게 공부를 하면 자신이 목표한대로 그 친구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이렇게 공부를 하다보니 불면증과 우울증이 오면서요. 시험을 치르지도 못하고 성적은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거예요. 게다가 중학교 2학년 때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가 고3 때 같은 반이 되었어요. 그러면서 또 다시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이 바닥인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어요. 그것이 결국 조현병으로 이어졌어요.
이관형 작가의 설명의 따르면 조현병이라는 것이 그렇다고 해요. 자기가 경험한 것으로는 아침부터 계속해서 과거의 불행한 기억들이 끊임없이 떠오른다고 해요. 마치 영화관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것처럼, 계속해서 과거의 있었던 괴로운 일들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고 해요. 가령, 아버지에게 당했던 폭력에 관한 기억 친구들에게 당했던 괴롭힘과 폭력에 관한 기억이 끝임없이 머리속을 채우고 있는 거예요. 쉽게 잠들기도 어려운데 잠이 들면, 또 그 불행한 기억들이 꿈으로 나타나서 악몽에 시달린다고 해요,
이러한 상황에서 대학입시를 제대로 치뤄내기는 힘들었죠. 결국은 대학시험에 낙방을 하고요. 재수를 해서 대학을 갔는데요. 대학을 갔다고 해서 삶이 달라는 것이 없었어요. 늘 혼자였고 함께 밥을 먹고 교제할 친구가 아무도 없었죠. 그렇다고 학업적인 탁월한 성취를 이루지도 못했어요. 그냥 저냥 대학생활을 하던 중에 우연찮게 기독교 동아리 가입을 권유 받았다고 해요. 그때는 그런 마음이 들었다고 해요. 설령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다른 종교이거나 심지어 이단일지라도 자신은 그곳에 가입을 했을지 모른다고요. 왜냐하면, 사람이 그리웠고 혼자서 견디는 고독과 외로움이 힘겨웠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우연히 시작된 기독교 동아리 활동을 통해서요. 그는 조금씩 변화하게 됐어요. 사실은 별거아닌 일일 수 있는데요. 그에게는 크고 의미있는 일들이었죠. 예를 들면, 선배들과 밥을 같이 먹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이 전에는 한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기에 그 일로 많은 위로와 힘을 얻었다고 해요. 하지만 조현병은 그의 삶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었기에 종종 그를 괴롭혔는데요. 어느 날은 새벽에 이대로 있을 수 없어서 하나님께 예배하게 되었다고 해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배운 것이 있어서 찬양하고 성경을 폈는데, 마태복음을 1장부터 읽었는데요. 처음엔 족보 얘기가 나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하면서 넘기는데, 5장쯤 이르렀는데 원수를 사랑하는 이야기를 보고서요. 이전 같았으면 무시했을 것인데 그 말씀을 놓고 기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데요. 그래서 과거에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아버지와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어요.
기도하다보니까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더래요. 아버지가 공사장에서 노동을 하며 고생하시는 모습, 그로 인해 폐도 안 좋고 등도 굽게 된 모습을 통해서 아버지가 자식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몰랐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요. 또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가 사실은 과거에 자신처럼 누군가에게 괴롬힘을 당했다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들이 생각나면서요. 나의 원수들에게도 분명 어떤 아픔과 고통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고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었어요. 물론 그렇다고 하루 아침에 원수 같던 이들을 아무렇지 않게 용서한 것은 아니지만요. 그렇게 기도함을 통해서 결국은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요.
이분은 아직 조현병을 앓고 있어요. 약을 먹고 관리를 하고 있죠.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해요. 자신이 만약 다시 태어나서 또 조현병을 앓게 된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요. 만약 조현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해서 살았을 텐데 그와 같은 약점 혹은 가시가 자신이 삶을 하나님께로 인도했다고요. 그러니 조현병에 걸렸을지라도 하나님을 만나고서 자신의 인생이 바뀐 것이 그에 못지 않게 소중하다고 해요.
저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한편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생각하게 돼요. 우리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면, 우리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이루려고 한다면 얼마나 위험한 일이겠어요. 사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의지하고 그것을 따랐을 때, 불행한 결과를 맞이한 것처럼요. 우리는 완전하지 않고 어리석어서 충분히 위험한 선택을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무능하고 어리석은 죄인임을 알 때, 우리가 진정으로 믿고 의지해야 하는 분이 누구인지를 깨달아 알게 돼요. 저는 신앙생활이 결국 이와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다시 말해서 우리의 무능 혹은 우리의 문제를 인정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주님이 보여주시는 구원의 길을 따라 가는 것이라고요.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떤가요? 우리의 약함을 인정하고 우리가 죄인됨을 기억하고 살고 있나요? 어쩌면 오늘 우리가 그것을 잊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바라건대, 오늘 아담과 하와를 통한 성경의 교훈을 꼭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