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평화로 가는 길입니다.

주일오후예배(여신도헌신예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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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 8:18-25(신약 250쪽)
설교제목: 생명과 평화로 가는 길입니다.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반갑습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늘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하며 인사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함께 예배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짧은 영상을 하나 준비했는데요. 이 영상이 오늘 설교의 전체 내용을 요약하는 것입니다. 먼저 영상을 시청하고 얘기를 이어가겠습니다.
 
# 영상: 2분 20초
 
방금 우리가 본 영상은 2018년도 11월 3일에 트위터에 올라온 것입니다.
 
캐나다 지리학자 지야 통(Jiya Tong)“우리 모두는 새끼 곰으로부터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높은 곳을 보고 포기하지 말자”라며 이 영상을 트위터에 올렸습니다. 영상은 러시아 마가단 지역의 한 설산을 어미곰과 새끼곰이 오르는 장면입니다. 영상을 보셔서 아시지만, 새끼곰이 설산을 오르면서 미끄러지지만, 포기하지 않음으로 결국 설산을 오르게 됩니다.
 
방금 본 영상이 오늘 설교를 요약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 결론적으로 ‘인내하고, 포기하지말자’는 얘기를 할 겁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말씀 드리려 합니다.
 
아시다시피 오늘은 우리 교단이 정한 ‘여신도회주일’입니다. 이는 매년 1월 셋째 주일로 지키는데요. 우리 교단은 1937년 제26회 총회에서 여신도회주일을 제정한 이래로 지금까지 이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이는 여신도회 전국연합회의 선교사업을 돕고자 함입니다. 여신도회를 포함해서요. 우리 교단에 속한 각 기관 및 지교회의 선교방향은 매년 교단의 표어를 통해서 세웁니다. 2025년 우리 교단의 표어는 ‘교회여, 다시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노래하자’입니다. 저는 올해 우리 교단의 표어를 통한 선교의 방향을 이렇게 설교하려 합니다. ‘인내하고 포기하지말자’라고요.
 
그 까닭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 성경 말씀에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로마서 8장은 로마제국의 초기 기독교 탄압을 배경으로 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처음부터 기독교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 선배들은 무수한 박해와 고난 속에서 신앙을 지켰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피는 로마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도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했다는 이유로 죽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초기 기독교인의 박해에 관한 끔찍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로마제국은 기독교인을 잡아다가 사자와 같은 맹수에게 잡아 먹히게 한다거나, 도시를 밝히는 횃불로 태워 죽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죽을 수 있는 시절에요.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말고 인내할 것을 얘기합니다. 로마서 8장 24~25절을 같이 읽습니다.
 
로마서 8:24-25(신약 250쪽)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방금 읽은 성경구절을 통해 사도 바울은 25절에서 ‘참음으로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24절에서 우리의 구원이 소망을 통해 오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여기에서 소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소망은 우리가 아직껏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에까지 이르고, 그리고 감취어 있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에 대한 형상을 우리 마음에 제시해 주기 때문에, 눈으로 환히 볼 수 있거나 손으로 만져서 알 수 있는 것들은 소망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소망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칼빈의 말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소망은 현재의 일이 아니라, 미래의 일입니다. 미래는 현재에 아직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미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고 물을 끓인다고 했을 때, 현재에 물은 끓지 않을 수 있지만, 미래에 물은 끓을 것입니다. 그러나 끓는 물의 미래가 오기까지 현재의 물은 끓지 않습니다. 이처럼 미래에 있을 소망은 현재에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망을 바라는 신앙인의 자세는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참고 기다리는 소망은 무엇일까요? 로마서 8장 18~19절을 같이 읽습니다.
 
로마서 8:18-19(신약 250쪽)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방금 읽은 성경 구절을 통해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18절‘우리에게 영광이 나타날 것’이고, 19절‘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영광은 고난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해 보면 어떨까요? 임신한 여인이 고통스러운 산통을 견디고 아이를 낳습니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고통을 견뎌내야 하지만요. 태어난 아이를 통해 그것을 전부 잊어버릴 기쁨의 영광을 누립니다. 저는 남자라서요. 아이를 안 낳아봐서 모릅니다. 앞으로도 제가 아이를 낳진 않겠죠. 그런데 여기 계신 우리 여신도회 분들 대부분은 확실히 아실 겁니다. 이처럼 영광은 고통을 덮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고통을 넘어설 장차 올 미래의 영광을 소망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인은 장차 올 영광을 소망하며 기다립니다.
 
또한, 19절‘하나님의 아들들’을 소망합니다. 이는 로마서 8장 14절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데요. 같이 화면을 보고 읽습니다.
 
로마서 8:14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사람을 뜻합니다. 이 말을 하나님의 자녀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를 포함해서요. 우리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을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 또는 하나님의 자녀를 소망하는 것일까요? 로마서 8장 21~23절을 같이 읽습니다.
 
로마서 8:21-23(신약 250쪽)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방금 읽은 성경 구절을 통해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22절‘피조물이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라고요.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창세기 3장 17절을 화면을 보고 같이 읽습니다.
 
창세기 3:17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습니다. 인간의 죄가 세상을 고통으로 물들게 하였습니다. 인간의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자신의 욕심을 쫓아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욕심이 세상에 고통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오늘날의 환경이 파괴되고 지구생태계의 위험을 주는 것도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새는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종인 두루미입니다. 연세대 인류학과 최명애 교수님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예전엔 강원도 철원엔 두루미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두루미 1500마리, 재두루미 5500마리가 옵니다.’ 그러면서 묻습니다. ‘무엇 때문에 철원으로 두루미가 오게 되었을까요?’ 이에 그가 답합니다. ‘두루미 입장에서는 철원은 굉장히 안전한 잠자리죠.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니까요.’ 아시다시피 남과 북 사이에는 휴전선이 있습니다. 또 그곳에는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DMZ(비무장지대)’가 있습니다. 또는 사람의 발길이 뜸해진 ‘CCZ(민간인통제구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그로부터 멀어진 곳에 생명의 번영과 평화가 있습니다.
 
이렇게보면 인간의 존재가 생태계에 얼마나 위협이 되고 더 나아가서는 불필요한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본래부터 인간은 생태계에 파괴적이며 암적인 존재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을 화면을 보고 같이 읽습니다.
 
창세기 1:28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인간에게 피조물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것은 지배하고 굴복시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돌본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인간이 생태계에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생태계를 돌보는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문제가 생기고 심지어 생태계의 위협이며 피조물의 고통을 주는 존재가 되었을까요? 앞서 창세기 3장 17절을 통해 보앗듯이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기의 욕심을 따라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면요.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았다면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 곧 하나님의 자녀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로 말미암아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요. 회복과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의 어떤 능력으로도 세상을 구원할 수 없을 말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없이는 우리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구원을 기다리며 인내하고 소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화면을 보시죠. 누구일까요? 기독교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림 속 남자의 이름은 아우구스티누스이고요. 여자는 그의 어머니인데요. 그의 이름은 모니카입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기독교의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을 절대 모를 수 없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이야기할 때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위대한 인물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 모니카의 공이 무척 컸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녀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모니카는 332년 북아프리카의 도시 타가스테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순종과 절제의 미덕을 가르친 하녀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하지만 성질이 급하고 기독교를 경멸하는 로마 공무원 파트리시우스와 결혼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모니카를 힘들게 했던 것은 신앙생활에 대한 남편의 반대였습니다. 모니카는 아구스티누스를 포함한 세 자녀가 세례를 받기 원했지만, 남편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장남인 아우구스티누스가 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세례받기를 동의했다가요. 다시 철회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모니카의 오랜 인내와 기도는 남편을 신앙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371년 남편이 죽기 1년 전에 그는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장남 아우구스티누스가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는 372년에 혼외 자식을 낳았고 오늘날로 말하면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 마니교에 빠져들었습니다. 겨우 남편을 신앙의 길로 인도했는데, 아들이 허랑방탄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처음엔 아들을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꿈에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에 힘을 얻어 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9년이나 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는 아들의 모습에 고민이 되었습니다. 이에 신앙적 조언을 구하고자 우리로치면 담임목사님에 찾아가듯이요. 주교에게 찾아갑니다. 마니교에 빠진 아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황에 대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얘기합니다. 그러자 그 주교가 모니카에게 그 유명한 말을 합니다. ‘눈물로 기도한 자녀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라고요. 그 말에 힘을 얻은 모니카는 더욱더 아들을 위한 기도에 매진합니다.
 
384년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의 가르침으로부터 떠납니다. 그로부터 혼란스러운 3년의 시간이 지나고 387년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해 모니카는 세상을 떠납니다. 여기서는 좀 분명하진 않는데요. 저는 두 가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는 모니카가 아들 아우구스티누스가 세례를 받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이고요. 다른 하나는 모니카가 아들이 세례는 받은 후에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입니다. 무엇이든 이 이야기의 교훈은 명확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라는 기독교의 인물은 어머니 모니카의 인내의 기도로 이룩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생명과 평화로 가는 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올해 우리 교단의 표어에서 비롯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는 단지 우리 교단만이 나아가야할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저는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결국 생명과 평화로 가는 길이 ‘참고 기다리는 것’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의 노력과 능력으로는 생명과 평화의 길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그것은 불가능 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곧 참고 기다리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가 단지 우리 교단에 국한된 이야기만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합니다.
 
자주 반복하는 얘기이지만요. 신앙생활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입니다. 저는 이말이 굉장히 지혜로운 이야기라는 생각을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말이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가 나름대로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데요. 과연 그와 같은 열심과 노력으로 우리가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까? 어떤 인간도 스스로를 구원한 인간을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태생적으로 인간은 완벽하지 않으니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그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우리가 평생을 통해 지닐 수 있습니까? 지구의 나이가 약 45억년이 넘었다고 하고 우주의 나이가 약 140억년이라고 합니다. 기껏해야 100년을 조금 넘게 사는 인생이 알면 얼마나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인간이 스스로를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래서 태초부터 계셨고 우리의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저는 오늘 성경말씀을 통해 이 일이 ‘참고 기다리는 것’임을 또한 깨닫습니다. 물론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소망을 잃어버리 않고 성령의 다스림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내가 살아온 방식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고요. 성령이 주시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끝으로 제 얘기 하나를 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저는 고집이 세고 제 나름의 기준이 확고한 편입니다. 쉽게 말하면, 남의 말 잘 안 듣습니다. 제 생각이 분명하면 거의 양보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러다보니 때때로 다른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나의 옳음을 주장하느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하고요. 그 결과로 관계가 깨어지기도 합니다. 특별히 저와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러했습니다. 제 생각에 저의 아버지는 아버지답지 못했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제 기억에 우리집에 빨간 딱지가 두 번이 붙은 적이 있습니다. 모두 아버지의 사업에 따른 여파였습니다. 참 슬펐던 기억은 이랬습니다. 집에 처음으로 컴퓨터가 생겼던 날입니다. 그로부터 약 일주일이 됐을까요? 빨간 딱지가 붙은 컴퓨터는 이내 사라져 버렸습니다. 갖고 싶던 것을 한 순간 잃은 경험이 있다면 아버지에 대한 저의 마음이 어떠한 지를 아실겁니다.
 
이러한 기억과 더불어서 아버지는 가정 경제를 책임지지 못했습니다. 그 자리를 어머니가 대신해야 했습니다. 단지 돈을 못보는 것에서 끝났다면 그래도 덜 했을텐데요. 아버지는 술을 달고 사셨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에서 저는 반면교사를 삼았습니다. 나는 이러한 아버지가 되지 말아야겠다고요. 그리고 집을 나와서 생활한 이래로 아버지에게 연락을 드리는 일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사업차 중국에 가시면서 거의 연락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중국생활도 순탄치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비자 문제로 작년 말쯤에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 소식을 함께 지내는 할머니를 통해 듣긴 했지만, 먼저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제가 과거에 살아온 방식을 의지하며 살았다면요. 어쩌면, 아버지와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 연락을 드리지 않았을 거예요. 혹은 대면을 피하거나 꺼렸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얼마 전에 새해 인사차 전화를 드렸어요. 전화를 드리게 된 배경은 이러해요. 훌륭한 아내를 둔 덕분인데요. 아버지 연락처를 아내가 먼저 어머니를 통해 받아서요. 그리고 아내가 아버지께 먼저 연락을 드렸어요. 아내의 모습에 미안함과 감사함을 느꼈죠. 그러면서 그 영향으로 저도 먼저 아버지께 전화를 드리는 변화를 이룰 수 있게 되었는데요. 아직 갈 길은 멀지만요. 저는 이러한 저의 변화를 주목하게 돼요. 제가 느리지만 변화하고 있는 것을 보게 돼요. 그러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요. 저의 변화는 제 힘으로는 이룩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제가 부족한 것을 깨닫고 이전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지 않을 때, 변화되어진다는 거예요. 저는 그것이 결국 나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으로 인도한다고 생각해요.
 
바라건대, 오늘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참고 기다림을 통해 얻어지는 변화입니다. 더 이상 내 생각을 의존하여 살아가지 않는 것이고요.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그분의 마음을 닮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로 말미암아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이루는 우리 여신도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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