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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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은 회복의 시작이다.

2주전 미가서의 말씀 제목은 회복의 기쁨을 누리라는 제하에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에 참고하는 책에 내용을 소개하면 시작하려고 합니다. “미가서의 현재 형태를 읽는 오늘의 교회는 미가서에 있는 회복을 즐겁게 읽기에 앞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혹독하고 강렬하게 고발하며 심판을 선포하는 점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다가오는 회복 역시 막연한 소망이 아니라 무엇을 바로잡고 무엇이 변화된 모습인지를 보여 준다… 심판을 고려하지 않거나 심판을 도외시한 회복은 회복일 수 없고 죄악 가득한 현실을 어떻게든 유지하려는 어리석고 헛된 노력일 따름이다” 라고 저자의 말입니다. 회복은 참 좋은 말인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회복을 알기전에 ‘심판을 도외시한 회복은 회복일 수 없다’고 말하는 저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왜 이스라엘의 역사에 일어난 일과 그리고 불편할 정도로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들어야 할까요? 저자도 ‘이렇기 때문에 심판의 메시지를 들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회복은 회복이라 말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회복은 변화의 시작으로 말미암아 얻는 결과이자 방향이죠. 오늘 예를로 자주 사용할 의사의 수술이라는 행위만 생각해 본다면 일반인들은 눈 뜨고 보기 어렵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야 만 ‘회복’ 때문이죠.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무엇을 바로잡고 무엇이 변화된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표현이 특히 시국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시의적절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9절까지 4장 6절부터 계속되는 회복에 대한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교는 사용된 단어에서도 알 수 있는데 4장과 5장에 가장 많이 사용 된 동사는 ‘하야’인데 어떤 일이 ‘발생한다. 일어난다. 벌어진다’로 해석됩니다. 예를 들어 4장 1절에 ‘끝날에 이르다’, ‘굳게 섰다’, 5장 2,5절에서는 ‘내게로 나올 것이다’, ‘평강이 될 것이다’ 그리고 7.8절에는 ‘백성 가운데 있다’에도 ‘있다’ 하는 동사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가다, 걷다, 동행하다’와 같은 의미의 동사 ‘하라크’입니다. 사람들이 갔다, 또는 4장 2절에서 ‘오라 우리가 ‘ 그리고 ‘행하리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자르다, 베어내다, 죽이다, 살해하다’로 사용되는 ‘크라트’가 하라크와 동일하게 사용 되었는데 4장에서 ‘하라크’가 5장에서는 ‘크라트’가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5장 9절 이하의 심판의 메시지가 시작되면서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회복과 심판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의사는 진단을 하고 수술에 앞서 환자와 대화를 합니다. 차트를 보여주거나, 엑스레이 등과 같은 자료를 보여 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 회복이 될 것이니 의사와 치료를 믿고 결단하기를 말하며 신뢰를 쌓을 것입니다. 그러고 수술실에 들어가면 의사들의 용어는 수술에 적합한 말들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의 용어들 두려워 합니다. 하지만 두려워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4장에서 하나님께서 높은 산에 좌정하시면 작은 산들은 높은 산을 경외할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이렇게 말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 왜 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정의로우며 공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그래도 공정과 절차를 생각하는 이들은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지만 반대로 두려워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에베소서 2:12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깊은 두려움에 사로 잡히면 결과적으로 자신의 힘과 권력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가 가리키는 방향인 것입니다.
말씀을 떠 올려 보십시오. 3장을 시작하면서 성전의 산은 기능을 상실한 채 수풀로 덮어 버리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4장에서 여호와의 전의 산이 굳게 서게 되고 작은 산들은 복종하게 됩니다. 이런 표현들은 6장에서도 계속되면서 미가서의 주제인 ‘하나님과 같은 이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회복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때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흔한 감기는 적당한 휴식과 처방으로 받은 약 정도면 누구나 대체적으로 회복됩니다. 그러나 위중한 병은 때론 목숨을 걸고 수술실에서 환부 즉 병의 근원을 제거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회복의 시작이라는 믿음이 어디에서 시작할까요? 의사에 대한 기대, 의사가 가진 실력에 대한 믿음과 바로 잡고자 하는 병에 대한 적확한 지식을 통해 그리고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수술이라는 고통의 순간을 받아들임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병원 수술실에 ‘수술중’이라는 불이 켜지면 ‘사람을 살리는 중’이라고 받아 들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호와의 산’이라는 말씀은 우리의 의사이신 하나님께서 ‘바로 잡으실 때 ‘ 그 잘못을 먼저 정확하게 지적하시는 것이자 그래서 회복의 결과를 듣는 과정에서 시작이라는 믿음의 출발인 것입니다.
정의롭다, 공의롭다는 것을 오히려 이방인들도 알았습니다. 그러기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라고 이방 사람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시기는 이방인들이 각자 가지의 신을 부릅니다. 그럼에도 신자는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한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수술실에서의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감내하는 시간 즉 바로 잡아 고쳐야 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시간을 동의하지 못합니다.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4장 6절부터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그렇습니다. 모으는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모아서 7절에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왕이신 여호와께서 영원까지 다스리시는 회복의 계획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의 시간’은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믿음은 이때를 위함입니다. 본’문에 ‘낳을지어다’, ‘나가서 거주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25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로마서 12:12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여호와를 향하던 이방인들은 오히려 11절에 ‘모여서 너를 친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서 우리가 견뎌야 하는 시간을 이방인 역시 견디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오히려 극우 성향을 드러내는 기독인들을 보십시오. 정권이 바뀌면 못살다가 바로 잘 살기를 바랍니다. 잘못 선택한 값을 치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내 마음대로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다고 거짓된 신념에 사로 잡히는 오늘의 현실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12절 ‘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며 그의 계획을 깨닫지 못한 것’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하나님의 방법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 불순종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것은 적당한 타협과 시간을 보내 다시 어제와 같은 일상을 사는 소박한 바람이 무슨 잘못이냐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중한 병을 겪은 사람이 바라는 어제의 일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사로 부터 수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후의 삶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때론 좋아하는 음식을 먹지 못할 수도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런 삶을 받아 들일 것인가 하는 의사와의 담판입니다. 수술을 하고 회복이 시작되는 시간이 오면 ‘의사 선생님 고쳐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계속해서 감사는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사의 말을 따라 살겠다는 다짐이 실제로 그렇게 살아내는 삶에 있지 않습니까? 미가도 이렇게 말합니다. 미가 7:14 “14 원하건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주하는 주의 기업의 양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 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시옵소서” //
어는 복음성가 가수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이 고요한 시간 / 주님의 보좌앞에 내 마음을 쏟네 / 모든 것 아시는 주님께 감출 것 없네 / 내 맘과 정성 다해 주 바라나이다 / 나 염려하지않아도 내 쓸것 아시니 / 나 오직 주의 얼굴 구하게 하소서 / 다 이해할 수 없을때라도 감사하며 / 날마다 순종하며 주 따르오리다 온 맘 다해 사랑합니다
여러분! 심판에 관한 설교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매주 지인들의 아픔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고쳐 주시고 일상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 가도록 간구하고 있습니다. 즉 바라는 바를 기도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회복은 우리의 바라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가를 통해서 바로 ‘바라는 바’ 즉 회복에 대한 메시지를 오늘 엄중한 시기에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요한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만난 예수는 보이는 위로자이셨습니다. 이방인들은 여호와의 산을 향하였지만 그 뜻을 아는데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는 자들입니다. 그럴 때 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나올 것이라’는 메시지는 오직 여호와만을 바라는 자들을 향한 회복의 영원성과 완전성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나오시는 분이 ‘그의 근본은 상고에’ 처음부터 계신 분이며 ‘영원에 있다’ 계속해서 존재하신 하나님의 신적 존재이시기 있기 때문입니다.
미가는 여호와의 메시지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시는 분은 다른 존재이십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영원으로 계신 분이신데 3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오시는 분으로 4절 ‘여호와의 능력,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 목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땅 끝까지 다스리신다는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전쟁을 그친 상태가 평화의 상태를 반영한다면 오시는 분은 그분 자체가 5절에 ‘이 사람은 평강이 될’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이런 표현은 전쟁의 종식 또는 어떤 형태의 평화 협정과 같은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라는 표현은 정당한 심판을 배경에 두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9절에 ‘모든 원수를 진멸한다’는 기대와 함께 회복의 절정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 심판, 진멸을 사회적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병들고 아파하는 환자를 향한 의사의 시선에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다시말해서 예수께서 오시면 우리 병의 근원을 바로 잡아 고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잘 알고 계신 것처럼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시는 사랑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말씀하셨고 그 사랑에 담긴 구원과 믿지 않음에 대한 심판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시행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가는 앞서 불의한 그들의 모습,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들의 심판과 폭력을 행하는 대표로써 앗수르와 같은 나라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예수를 믿는다, 안 믿는다는 믿음의 문제가 우리 심판의 결정타처럼 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믿음의 근거는 미가서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정당성과 심판은 곧 회복을 위하는 하나님의 방편이라는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가 말할 때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어떻게 뒷받침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마치 표 한장만 있으면 지하철 게이트를 통과하는 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두꺼운 성경책이 아니라 단 한 줄로 기록된 명제만 필요했을 것입니다. 억압과 착취가 당연하다고 말하던 시대에 북쪽으로 갈라진 북 이스라엘의 멸망이 남의 일이자 나와 상관없이 그럴 줄 알았다고 비꼬면서 나만 아니면 된다고 말하지만 예루살렘 성만 남아 멸망의 두려움이 가득한 시대에 미가는 그들과 너희는 다를 것이 없다. 너희가 하는 행동이 바로 착취이자 억압이자 전쟁이라는 폭력으로 나라를 삼키고는 승자 독식의 세상 방식이야 말로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착취 당하고 억압 받아 저는 자들을 불러 모아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는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심판과 회복의 연관성
심판 없는 회복은 진정한 회복이 아니다.
회복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때 가능하다.
하나님의 심판은 회복을 위한 과정이다.
회복을 위한 고통과 기다림
회복은 반드시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요구한다.
믿음은 수술과 같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저는 자와 쫓겨난 자를 모아 강한 나라를 세우신다.
하나님의 공의와 평강의 실현
예수님은 심판과 회복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공의는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회복을 포함한다.
믿음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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