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14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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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과 상식

오늘도 함께 말씀을 사모함으로 모이신 여러분들 모두 반갑습니다. 말씀을 나누며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가득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서 디모데전서 말씀을 볼텐데요, 읽으신 것처럼 지난주에 바로 이어지는 본문의 말씀입니다.
지난주에는 어떤 분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죠? 바로 과부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 과부가 누구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바울이 디모데에게 했었죠. 그러면서 우리가 구제를 할 때 지혜롭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지혜를 갖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이 아닌 사랑이 필요하다. 이렇게 나누었었습니다.
오늘은 바울이 이어서 또 다른 그룹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죠. 바로 장로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7절을 보면, 장로들에 대해서는 배로 존경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떤 장로들을 말하죠? 잘 다스리는 장로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장로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 아시나요? 사실 장로교에서는 장로가 두 가지로 나뉩니다. 가르치는 장로와 치리하는 장로로 나뉘는데요, 가르치는 장로들은 바로 목회자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구요, 치리하는 장로들이 바로 여러분들이 아시는 그러한 장로님들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치리하는 장로님들이 주로 하시는 역할은, 교회 안에 성도들을 양육하고, 또 어떤 잘못을 저지른다면 가르치는 일들을 합니다. 또한 교회의 여러 중요한 정책들을 결정하는 역할도 하고 있죠.
앞에 나온 잘 다스리는 장로들이 바로 이런 일들을 잘 행하는 장로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등장하는 말씀과 가르치는 장로들이 바로 목회자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이러한 장로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는 크게 교회 안에서 여러모로 수고하는 장로들에게 이러한 존경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죠.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존경은 어떤 것이냐, 지난번 과부들에 대해서 나눴을 때와 마찬가지로, 관계적으로 존중하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재정적인 지원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 안에서 교회를 다스리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들을 행하는 장로들에게 재정이 주어지는 것은 마땅한 일임을 바울이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어지는 18절을 통해 그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크게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첫째로는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다는 말씀을 붙입니다. 이 본문은 구약 신명기 25장 4절에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신명기에서 이 말씀을 한 것은 실제적으로 소가 곡식을 밟아서 떠는 농사작업을 할 때, 소의 입에 망을 씌워서 소가 아무것도 먹지 못하도록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소도 일을 하면서 먹을 것들을 챙길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죠.
두번째는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인데요, 이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0:7 NKRV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예수님의 사역 당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직접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이 말씀을 알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다른 사도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이야기들을 전해 들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죠.
바울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구약의 말씀과 동일선상에 놓았다는 것은 바울이 이미 예수님의 모든 말씀들을 성경과 같이 여겼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겠죠.
바울은 이렇게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뒷받침하면서 장로들에게 일정한 재정적 지원이 필요함을 디모데에게 전합니다.
이 두절의 본문은 장로들을 지정하여 전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에게 사역자들에게 충분한 격려가 필요함을 전해줍니다.
우리는 사역의 자리에서 보통 우리가 행하는 것들을 봉사의 개념으로써 생각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어떻게 보답을 바랄 수 있어!’ 라는 생각인 것이죠.
물론 그 생각은 귀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그러한 생각이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향할 때가 있다는 것이죠.
아니 교회 일을 하는데, 뭘 이렇게 바라는게 많아? 시켜주는 것도 감사하게 여기고 해야지! 라는 식의 생각들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바울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요. 교회의 사역이라고 하여 그것이 반드시 봉사로서 해야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의 입에 망을 씌우면 안되는 것처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교회의 사역 역시도 그 행하는 것에 따른 마땅한 삯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무조건 어떤 재정이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을 한다고 해서 다 돈주고 한다면 오히려 헌신의 마음으로 한 이들에 대한 상처로서 다가가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무슨 이야기냐, 사역에 대한 충분한 감사와 격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서도 각 본교회에서 여러가지 사역으로 헌신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사실 헌신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연스레 헌신하고 하다보니, 그것을 하지 않는 이들의 시선에서는 한편으로는 ‘저 사람은 당연히 저 자리에 있으니 계속 그 자리에 있겠지’라는 생각이 들기 쉽습니다.
하지만 당연해보이는 그 순간순간은 사실 정말 많은 노력과 말 그대로 헌신으로 그 자리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늘 그 자리에서 묵묵히 헌신해주는 이들을 위해 격려하고 감사함을 느끼고, 그들을 위한 기도를 해주어야 하겠죠.
물론 사역이라는 것이 그러한 것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도 몰라주더라도 주님께서 충분한 격려를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한 공동체로서 헌신하는 모든 자리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고 격려할 때, 섬기는 이들도 더욱 사랑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더 헌신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변의 헌신하는 이들에 대해 격려하며 더욱 사랑으로 사역할 수 있는 귀한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두 구절을 통해 선한 장로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면, 이어서는 반대의 경우를 이야기합니다. 말씀대로 행하는 선한 장로들이 있다면, 당연히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경우들도 존재하겠죠.
심지어는 장로들에 대해 고발이 들어오는 경우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디모데전서에서도 여러번 보았듯이, 교회 안에 장로나 말씀 선포자의 직책을 가진 채로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경우들이 많이 존재했습니다. 심하게는 잘못된 가르침을 가지고서 바울의 가르침을 공격하는 경우들도 있었죠.
그런 경우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도 앞서 잘 다스리는 자들에 대해 더욱 잘 대할 것을 말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게 장로들에 대한 고발이 들어왔을 때,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나요? 19절을 보시면 나오죠.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구약의 말씀을 따른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공동체 안에서 소송을 제기할 때, 반드시 두세 증인을 대동할 것을 정해놓고 있습니다. 혹여나 나쁜 마음으로 거짓 사건을 꾸며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분명한 사실을 가지고서 재판을 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 하에서 행해졌던 것이지만, 바울은 이것을 그대로 받아 교회 안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구약시대의 체제, 즉 율법의 체제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오해할 수 있는 것이, 바울이 워낙 율법의 행실이 아니라 믿음을 가질 것을 강조하다보니, 마치 바울이 율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율법 폐기론자인줄 알고 있는 경우들이 있는데요, 바울은 절대로 그런 율법폐기론자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것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행위로 따르려 하는 행태를 비판한 것이지, 절대로 말씀이 잘못되었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행위로 따르려고 하면 그것을 지킬 수 없다 뿐이지, 율법은 선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여기서도 율법을 따라 고발에 대한 두세 증인을 받을 것을 디모데에게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0절에서 혹여나 재판을 치르고 죄악이 밝혀졌을 때, 그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을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범죄한 자들은 죄악으로 고발되어 그 죄가 밝혀진 장로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재판을 통해 그 사람의 죄가 밝히 드러났다면, 그 처벌을 숨기고 하지 말고,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훈계하도록 하라는 것이죠.
왜 바울은 죄악에 대해 공개적으로 훈계하도록 했을까요? 첫째로는 범죄를 저지른 본인이 깨우치도록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모든 성도들 앞에 드러내면서, 그것이 얼마나 주님 앞에, 또한 모두 앞에 부끄러운 것인지를 깨닫고, 다시는 그러한 죄악 안에 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죠.
둘째로는 해당 구절 하반절에 나오는 것처럼 나머지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죄악과 그 처벌을 바라보면서 죄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또한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고 죄악의 길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는 교육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죠.
또한 한편으로는 공동체로서 범죄를 저지른 자를 위해 함께 기도하며 그 사람이 변화하도록 도울 수도 있겠죠.
바울은 이렇게 교회 안에서 드러난 죄악에 대해 대처할 것을 명합니다. 이 방법은 오랜 시간을 거쳐 지금의 교회에서도 행해지고 있습니다.
교회적 용어로 권징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어떤 성도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잘못을 행했을 때, 장로님들과 담임목사님의 모임인 당회의 결정을 통해 여러 처벌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공적 회개입니다. 공예배 이후의 시간에 모든 성도 앞에 나아와 모든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이죠.
여러가지 이유들로 인해 현대 교회에서 실제로 시행되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교회는 이렇게 잘못을 모든 공동체가 함께 감당할 수 있도록 말씀을 따라 지금도 그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21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지금까지 말한 것들을 올바르게 행할 것을 말합니다. 특히 다른 구절과 다르게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천사들까지 언급하면서 엄히 명령하는데요, 그만큼 직분자들에 대한 격려와 처벌이 정말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나 상황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사건을 굽게 해석하여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죠.
이어서 바울은 22절에서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고 말하는데요, 바로 앞서 범죄한 장로가 생겨 새로운 이들을 장로로 임명해야 할 때, 그 안수를 신중하게 행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신중하게 안수하라고 하는 것은, 앞서 감독과 집사의 행실들을 확인한 것처럼, 장로들도 진정한 믿음의 모습을 확인한 후에 그 믿음을 가진 자들을 안수하도록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경솔하게 안수를 하게 된다면, 그래서 자격이 없는 자가 그 직분을 차지하게 된다면, 바울은 그 자체가 죄가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직분에 합당하지 않은 자도 죄를 짓게 되지만, 그 자에게 안수한 자 또한 그 죄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겠죠. 그렇기에 바울은 경솔히 안수하여 죄에 간섭하지 말고,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할 것을 주문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직분이라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되죠. 옛말에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지만, 말씀은 직분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장로의 직분에 합당한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장로의 직분을 준다고 하여 갑자기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이전에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실 수 있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요, 그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께 택함받은, 다시 말하면 온전한 믿음이 있을 때의 경우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한 것조차 없는 자에게 그냥 직분을 주게 되면, 그 직분은 그 사람을 통해 교회에 죄악을 끼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어떤 일을 맡길 때, 또한 어떤 일을 맡을 때, 항상 신중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그 일을 맡아야 합니다. 그냥 늘 해왔으니 관성적으로 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누가 하니까 덩달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직분이 갖는 무게감을 확실히 알고, 맡을 것이라면 책임감을 갖고 행해야 하고, 그러한 마음이 없다면 애초부터 그 자리를 욕심내면 안될 것입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중에도 여러 자리에서 맡게 되신 자리들이 있으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러분들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부르셨고, 여러분들도 그 부르심에 순종했기 때문이겠죠.
그렇다면 그 자리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정말 충실히 자리에 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앞서 헌신에 대한 격려가 필요함을 말하긴 했지만요, 맡겨진 자리에 대해 책임감도 없으면서 격려만을 바라는 것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맡겨진 자리를 사모함으로 정말 책임감 있게 진심으로 임할 때, 합당한 위로와 격려가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 세 구절을 통해 디모데를 향한 격려를 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23절에서는 물만 마시지 말고 포도주도 마실 것을 권하는데요, 왜 갑자기 정결하라고 하더니 포도주를 마시라고 하냐 싶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당시의 배경을 살펴보아야 하는데요, 앞서 바울은 감독과 집사 직분을 이야기하면서 술을 즐겨하지 말 것을 이미 말했습니다. 그만큼 당시 교회 안에서 술의 문제들이 꽤나 존재했었음을 확인할 수 있죠.
그러다보니 교회 안에서 반대작용으로 술을 아예 입에도 대지 않는 금욕주의적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디모데도 이러한 모습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당시 디모데가 있던 지역이 어디냐는 것입니다. 어디 교회를 디모데가 시무하고 있었죠? 에베소교회입니다. 에베소는 현재 튀르키예 지역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쪽 지역의 특징 중 하나가 뭐냐면, 물이 맑지가 않다는 거에요.
흔히 말하는 석회수가 나오는 지역인거죠. 그러다보니 물만 마시게 되면 어떻게 되냐, 속병이 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너무 금욕주의를 하지 않아도 되니, 속병이 나지 않도록 포도주도 같이 마시고 하라고 권한 것이죠.
그리고 이어지는 24절과 25절을 통해서는 앞서 바울이 엄히 명령한 것, 공평한 판결을 행하라는 것에 대한 디모데의 마음의 무게감을 줄일 수 있도록 말을 전해줍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죠? 어떤 사람들의 죄는 드러나 심판에 나아간다. 즉 어떤 사람들의 죄는 디모데 너가 잘 밝혀내서 심판에 이르겠지만, 반대로 드러나지 않는 이들도 존재하겠죠? 그런 이들은 어떻게 된다는거에요? 뒤를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뒤를 따른다는 것의 의미는 뭐냐, 바로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그 죄를 심판하실 것을 말합니다. 결국, 디모데가 부족함으로 죄인을 온전히 처벌하지 못하더라도, 너무 심려하지 마라, 반드시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것은 반대도 마찬가지겠죠. 선한 행실을 보지 못해 격려하지 못할지라도, 결국 밝히 드러나 주님께서 격려하실 것입니다.
죄악 역시도 아무리 숨기려 해도, 인간 디모데의 눈을 벗어날 지라도 하나님의 눈은 벗어날 수 없다. 결국 합당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디모데가 엄하게 공정함을 가지고 모든 선함과 악함을 판단하여 격려과 처벌을 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주님께서 결국 다 행하실 것이고, 그렇기에 그 일로 인해 마음에 심려하지 않도록 권면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확인한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은 두 단어로 정리할 수 있겠죠. 바로 공정과 상식입니다.
아마 많이 들어본 단어이긴 할거에요. 지금 높으신 분이 캐치프레이즈로 쓰셨던 단어들이기 때문이죠.
사실 이 단어들, 공정과 상식은 정말 당연한 것들입니다. 선과 악은 공정하게 판단이 되어야 하고, 상식적으로 모든 일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것들을 받아야 하죠.
그렇게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에 바울도 디모데에게 강하게 강조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요? 당장 그 캐치프레이즈를 내놓으신 분도 곤경에 처했을 정도로 이루어지기가 어렵습니다.
공정보다 불공정이, 상식보다는 비상식이 더 쉽게 발견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질까요?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 스스로 모든 것들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우리 인간 스스로 100퍼센트의 공정을 행할 수 있고, 모든 인간은 상식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는 것이죠.
하지만 말씀은 답을 말해주고 있죠. 인간의 안에는 뭐가 가득하다고요? 죄악이 가득하죠. 그러니 누군가는 죄된 마음으로 공정을 무시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 죄악으로 비상식을 기꺼이 행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차피 인간은 행할 수 없으니 그냥 내버려두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랬으면 우리가 이렇게 말씀을 나누지 않았겠죠.
바울은 분명히 오늘 본문을 통해 디모데에게 그 공정과 상식을 행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직분에 헌신하는 이들에게는 격려가 행해져야 하고, 공정하게 죄를 저지른 이들에게는 처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바울은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을 디모데에게 명한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마지막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바울이 어떤 이야기를 했죠? 인간 디모데가 밝히지 못하는 죄가 있겠지만, 그것을 누가 행한다고요? 하나님께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없지만, 그 남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명한 교회 공동체가 이뤄나가야 할 공정과 상식인 것입니다.
그 명령은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 격려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격려를 하여야 할 것이고, 확실한 잘못에 대해서는 바로잡는 모습들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부족함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치 못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럴 수록 우리는 기도함으로 사랑을 가지고 계속 그 모습을 견지해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남은 공정과 상식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먼저 이러한 모습들을 행해나간다면, 우리의 모습을 통해 교회 공동체 너머 세상에서도 이러한 공정과 상식을 이뤄나가고자 하는 모습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만 다스리고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분명히 모든 세상을 다스리시고 운행하십니다. 교회 공동체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동일한 사랑을 가지고 공정을 행하고 상식을 행하고자 한다면, 주님께서 그 자리에도 함께하셔서 이전까지 불가능했던 것들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든 하임 공동체가 누구보다도 먼저 그것을 행하기를 소망합니다. 디모데전서에서 늘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 서로를 향한 진정한 사랑을 품고, 서로에게 격려하고 권면할 수 있는, 그래서 정말 진정한 공정과 상식을 주님과 함께 이루어내는 귀한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 하나님의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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