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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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홍성사 (기도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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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야구 선수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처음 훈련에 임하게 있었던 일입니다. 팀 코치는 박찬호선수를 타석에 불러놓고, 타자들이 공을 친 후에 인류 쪽으로 뛰는 거라고 알려줬다고 합니다. 야구 선수로써 그런 기본적인 규칙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텐데, 다시 확인 시키는 코치에 가르침에 박 선수는 신선한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코치는 기본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가르친 것이라 생각합니다.
믿음생활에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기도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 일은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내야 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기본적인 규칙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느헤미야서도 시작부터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느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고 슬피 울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의 직업과 지위를 알게 되면우, 이런 모습은 이해가 잘 안될 수 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의 왕의 신뢰를 받고 있는 관료입니다. 부족한 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들은 일은 제국으로부터 무려 1,800 킬로미터나 떨어진 변방에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별 관계 없어 보이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느헤미야의 모습에서 무얼 배웁니까? 믿음의 크기란, 자신을 제외한 이웃의 일에 얼마나 마음 쓰고 있느냐의 비례 합니다.
그는 페르시아에 살고 있는 유대인 삼 세였습니다. 할아버지 때 포로로 잡혀 와 아버지 세대를 거쳐, 자기 세대의 이르는 동안, 점점 모국은 흐릿해졌을 텐데,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그에겐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이 마음속에서 진짜 고향처럼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다짐과 기도의 시간이 있었을까요.
그것들은 고국의 소식은 참담 했습니다. 동포들은 환란과 능욕을 받았습니다. 성곽도 없는 황폐한 예루살렘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온몸에 힘이 빠졌고, 울며 금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들은 것으로 인해 가슴이 아려오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성공했다 싶으면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게 됩니다. 가진 게 너무 많거나 마음이 높아져서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면 더 이상 남의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무엇보다 들을 수 있는 귀와 마음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의 현직은 페르시아 왕의 술 관원입니다. 왕이 마실 술을 먼저 먹어 보는 사람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왕과 그의 목숨이 결탁 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면에서 왕의 형제나 자식 보다도 더 신뢰 받는 사람인 것입니다.
외국인으로써는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영화와 부귀를 누렸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고, 왕 외에는 그 누구의 말도 귀담아 들을 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귀가 열려 있기에 형제에게 소식을 듣는 동안 아픔이 몰려와, 어쩌면 남의 일처럼 보이는 사건을 자기 일로 여기고 기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기도는 습관입니다. 그 습관은 운명을 바꿔놓습니다. 결국 평소에 쌓는 기도가 운명을 가르게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교포로서 선지자요 총독이 된 것은 순전히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오늘도 바로 기도가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변화 되고 나라가 새로와 지길 원한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생각과 환경을 바꾸기 보다, 기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기도부터 모든 것이 시작 되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 뿐 아니라 환경과 운명까지 모두 바꾸는 힘은 기도밖에 없음을 믿습니다.
기도는 전능의 통로를 활짝 여는 대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잡는 행위 입니다. 그분의 마음을 움직이는 수단인 것입니다. 모두가 기도하는 습관에서 비롯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오늘 느헤미야가 어떻게 기도했는지 배우는 시간이 됩시다. 그래서 내가 변하고 나라가 변하는 기도를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첫째, 느혜미야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기도하였습니다.
자 느헤미야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4-5절
느헤미야 1:4–5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사람은 어떤 자아상을 갖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자아상에 따라서 자기의 삶과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속에 그려진 하나님 상(image of God) 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믿음에 따라 전능한 신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신이 되기도 해요.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가 곧 자기 신앙에 수준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똑같은 분이시지만 우리 안에 형성된 하나님상에 따라 우주가 될수도 있고 콩알 만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다른 우선순위가 있어도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처음 불러 외친 하나님은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을 더 정확하게 풀자면 ‘하늘을 만드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의 기도의 첫 마디는 창조주 하나님을 부른 것입니다. 찬양과 경배가 그의 기도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어떻게 부르냐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게 되어있는데, 하나님을 그렇게 부른 느헤미야의 첫마디는 강렬했습니다. 그의 이 부르짖음을 들은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향해 고개를 돌리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찬양으로 시작한 느헤미야의 기도는 이제 어떻게 이렇게 이어집니까?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이것이 느헤미야의 신앙고백입니다. 크다는 것은 그분이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간증하는 것이예요, 두려우신 하나님이라는 것은 그분이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당신을 거억하고 불신하는 자는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신줄 믿습니다.
이어서 느헤미야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사람은 쉽게 약속을 하고 쉽게 약속을 잊고 어기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한 일은 결코 어기지 않는 분이십니다. 누구든 그의 이름을 부르고 모시기만 하면, 이생의 복된 삶은 물론이거니와 영원한 나라까지 선물하십니다.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즉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봐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고향에 갔을 때 포근한 둥지가 아니라 산산이 부서진 페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성의 아픔을 아시는 주님께서 결코 나몰라라 하실까요? 느헤미야는 존귀한 이름 ‘긍휼을 베푸시는하나님’을 부르면서, 구원해 주실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자, 기도를 막 시작하는 입구에 벌써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창조주요 사랑과 공의의 주시라고 인정했습니다.이후 계속되는 기도에 하나님의 관심과 시선이 집중될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을 내 솏에서 축소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도록 인정하십시다. 내 수준의 하나님으로 한정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대로, 느헤미야가 믿고 불렀던 그 하나님을 우리도 모셔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느헤미야처럼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의 하나님,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그분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오늘도 그분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우리가 믿고 구하는 크기대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자 두번째 느헤미야의 기도의 특징은 , 자복하는 기도였습니다.
느헤미야 1:6–7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경배가 끝나자 간구하는 기도로 들어가면서 자책하는 고백을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기도하면서 “나와 내 아버지의집이 범죄”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망하고 그 성전이 불타고 민족 전체가 수치를 당해 폐허가 된 것이 어찌 느헤미야 탓이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배반과 계속된 조상들의 죄가 직접적인 원인이 됐지, 느헤미야와 그의 아버지의 집이 뭘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백 년 동안 누적되어 온 죄를 지금 느헤미야는 자기 혼자다 뒤집어쓰려는 것입니다. 바로 “너의 죄는 곧 나의 죄다”라는 태도인 것입니다. 네 탓은 바로 내 탓이요 우리 탓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를 통해 이스라엘의 새 역사를 쓰게 한 특별한 안목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사랑과도 닮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는 용서받기 힘든 것들이었습니다. 7절에서 말하듯이,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 하늘이 두 쪽 나도 반드시 지켜야 될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파기된 약속을 다시 복원하기 위해 느헤미야가 홀로 일어선 것입니다. 마치 무거운 십자가를 지듯이, 자신의 어깨에 지워 올렸습니다.
이제 앞으로 페르시아의 수산궁에 있던 느헤미야가 먼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 시작은 바로 동포의 허물을 내 허물로 끌어안는 대속적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세상에서의 모든 신음과 고통은 인간이 자초한 바가 크지 않습니까? 사실 전부 다일것입니다. 예수님이 책임지실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 모두를 대신 짊어져 주셨습. 니다. 우리도 그것을 닮아 가야 합니다.
당신의 죄를 나의 죄로 여기는 것이 시작입니다. 모든 문제는 사실 나에게 있습니다. 그래야 일은 풀리기 시작합니다.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엄청난 문제거리가 있습니까? 나를 돌아보는 것부터 변화가 시작되는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느헤미야의 기도는 약속을 붙잡고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느헤미야 1:8–10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신명기 말씀에 따르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으면 그들을 흩으시겠다고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부터 경고가 있어 왔었습니다. 그것을 무시한 이스라엘은 당연히 그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느헤미야가 찾아낸 하나님의 언약 또 하나가 그를 들뜨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경고의 메세지뿐 아니라 희망의 메시지도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0장2-4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쫓겨 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바로 이 약속을 느헤미야는 붙잡았습니다. 바로 지금 시점이 하나님께 오래전에 하셨던 그 말씀을 이루어 주실 때라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느헤미야는 이 문제 앞에 먼저 아닥사스다 왕을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평소 자기에게 보내 주는 신뢰와 관심을 고려하면, 이런 정도의 사안은 충분히 해결해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을 움직이는 것보다 하나님을 움직이시게 하는게 먼저라는 것을 안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가장 먼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이 터질때 우리는 기도해야겠다는 생각보다, 먼저 해결해 줄 사람이 누구인가를 떠올릴때가 많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느헤미야가 보여주는 신앙의 태도는 오래 기억해야 될 모범인 줄 믿습니다.
그의 현재 위치는 요즘의 대통령 비서실장정도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언약의 하나님을 붙든 것입니다. 그러고는 피를 통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당신께서 하셨던 언약을 잘 압니다. 여태껏 우리가 받은 벌은 당연했습니다. 그렇게 벌받는 동안 많이 깨달았고 이젠 정말 돌이킵니다. 우리를 부디 용서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다시 받아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종아리를 맞으려는 아이에게 마음이 약해질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이쯤에서 마음을 돌이시키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느헤미야의 다음말은 흔들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쐐기를 박았습니다.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그렇게 사랑했던 당신의 자식이 아니었습니까? 핏덩이 때부터 온 정성으로 사랑으로 보살폈던 아들 아니었습니까? 해산 때 치렀던 그 산조를 잊지 않으셨겠지요? 하는 애절한 호소였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어요. 어쩔 수 없이 당신의 백성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약속을 붙잡고 늘어지는 한 하나님은 꼼짝없이 수용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약속을 붙드는 기도는 힘이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수많은 약속을 꽉 붙잡으십시오. 그렇게 약속을 붙들고 구하는 기도보다 더 강력한 기도는 없는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느헤미야는 이렇게 기도를 마무리 합니다. 함께.
느헤미야 1:11 “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어린 시절 리빙스턴의 헌금통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헌금하는 시간에 뭔가를 드리고 싶지만 가진 게 없어서 드릴 수 없게 되자, 어린 리빙스턴은 자기 앞에 돌아온 헌금통에 자기 몸을 실어 넣었습니다.
비록 헌금통이 작아 겉으로는 철없는 아이가 헌금통을 깔고 앉게 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 어른들께 돌아가며 야단을 맞았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을 받으셨고 훗날 그를 아프리카를 구원하는 선교사로 사용하셨습니다. 리빙스턴 자신은 그날 모든 사람의 기도 응답이 자기일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갖고 기도하지만 실제 본인이 응답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기도를 마쳤고 이 기도를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것과 한 묶으로 드렸습니다. 자기 뿐 아니라 같은 제목으로 간구하던 이들의 기도를 함께 모은 것입니다.
기도하는 그 사람이 응답에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은 사람에겐 해답도 없을 것입니다. 성벽 재건은 느헤미야 자신의 신상과 아무런 관계 없는 일이었는데, 그는 왠지 그 일에 부담감을 느껴 기도했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모든 정황을 볼때 느헤미야만큼 이 일에 적합한 사람도 없어보입니다. 어쩌면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그를 미리 왕궁에 심어놓으셨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종류의 일이 다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관심과 달라트가 사용될 만한 일에 그런 일을 두십니다. 즉 일을 감당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관심과 부담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시작하면 응답은 바로 기도하는 그 사람을 통해 이루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관심이 가고 부담이 되는 기도제목이 있다면 그것은 본인의 사명이라고 믿으면 맞습니다. 언제까지 제처놓고 미룰 일이 아니라, 내가 그 일을 하면 많은 사람의 복과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뤄 드릴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사명자로 나서는 계기가 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느헤미야는 비전과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성전 재건이라는 비전을 기도를 통해 시작했습니다.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믿고, 민족의 죄를 끌어안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자신이 그 기도의 응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꿈과 비전이 이렇게 열려지길 소원합니다.
여러분, 자꾸 눈이 가고 관심이 가는 일이 있다면 기도를 시작해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에 여러분을 필요로 하십니다.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그 일을 기도로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자꾸 도망가기보다는 그 일을 감당할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