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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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지 않으면

요한복음 4장 27-34절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질문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대학 강의나 수업을 마치면서 자주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 가운데 실제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요. 특별히 한국 사회는 질문 자체를 잘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본인의 주관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것에 대해서도 소극적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 폐막식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기자들에게 아무 질문이나 할 수 있는 기회를 수 차례 주었지만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았던 이야기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 문화 속에서 이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예절과 격식을 강조하는 유교 문화 권에서 어른들이나 선생님 말씀은 잘 따라야 하는 것이며, 이의를 제기하고 질문하면 말 대답하는 “예의 없는 아이”로 비춰졌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은 군대 가서 명령에 복종하는 법을 배우지 왜 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은 금지 단어입니다. 까라면 까야 하는 것이 군대입니다. 사회는 어떤가요? 상명하복이 당연했던 시대의 정신이 자연스럽게 기업이나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어서 질문을 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굉장한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질문을 받는 사람도 그것을 불편하게 생각을 또 하게 됩니다.
 
저 역시도 딸들을 키우면서 질문이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아이들 특징은 질문이 많잖아요. 다들 많지만 막둥이는 매일 질문합니다. 아빠 머하고 왔어?
교회에서 있다 왔지, 교회에서 머했어? 교회에서 예배하고 왔지? 왜 예배했어?
책을 보면서도 묻습니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하고 있어? 이거는 머야? 아빠 이건 왜 이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가 많아요. 대답을 해주다가 해주다가 관심을 다른데로 돌릴 때도 많았습니다.
 
저도 그랬다고 하더라구요. 저 역시도 어렸을 때 질문을 그렇게 많이 했대요. 그래서 어머니에게 등짝을 많이 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중에 후회하셨어요. 그 때 그 질문에 잘 대답해 줬으면 서울대에 갔을텐데 그러지 못했다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부모님들께서는 자녀들이 질문을 많이 할 때 잘 대답을 잘해주세요. 사춘기가 오면요 묻고 싶어도 묻지 못하는 그 날이 속히 올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전 시대는 문화, 교육적인 환경 때문에 질문을 하지 않았다면 요즘은 질문을 할 필요가 없는 세대라고 하죠. 논리적 사고를 하기 전에 이미 답이 주어져요. 유투브나 네이버에서 검색만 하면 답을 얻을 수 있고 ai가 대답을 해줍니다. 지니가 TV를 틀어주고 물어보면 답을 해주는 시대가 되어서 아이들이 사고하는 능력과 질문을 잃어간다라는 슬픈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 안에서의 질문이 사라져간다고 합니다.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하나님 앞에 갈급함을 가지고 나아오는 사람들도 점점 사라지는 이 시대에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어떤 질문이 있어야 하는지 함께 깨닫고 고백하는 시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음식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나아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기에 아주 이상한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말씀을 나누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그 모습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제자들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둘은 서로 예수님의 행동에 깜짝 놀라지만 여인은 묻고 제자들은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 남자인 예수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과 물을 달라하는 것을 아주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던집니다.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그런데 제자들은 분명히 이상하게 여겼음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왜 제자들이 묻지 않았을까요?
제자들의 이러한 태도는 암묵적인 항의를 뜻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마음이 아주 불편합니다. 사실 이 불편함은 주님께서 갈릴리로 가기 위하여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자고 하실 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보통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우회해서 갈릴리고 가는 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보편적인 통행 방법이었는데 주님은 모든 유대인들이 꺼려하는 그 길을 굳이 가자고 하십니다. 일단 여기에서 걸립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문화적 사고에 부딪힙니다.
 
행로 중 사마리아 수가성에 도착했을 때 주님은 피곤하시다고 했고 또 저녁 식사도 해야 했기에 제자들은 마을에 가서 먹을 것을 구해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그들은 주님을 보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자와 이야기를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랍비라고 생각했는데,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는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적인 정서를 무시하시는 것을 보고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 불편한 마음이 지금 침묵으로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는 셈입니다.
 
그들 마음에 지금 무슨 생각이 있는 걸까요? 예수님 또 저러신다. 그 동안 여러 가지 불편한 모습이 있었지만 그래도 진짜 사마리아 여자는 아니지 않나? 아마 이런 생각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 불편한 침묵 안에는 예수님을 간접적으로 비난하고 있음과 동시에 사마리아 여인과는 상종하지 않아야 한다는 자기 신념을 버리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이해되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상하게 여기지만 묻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 안에도 얼마든지 이와 같은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전에 대전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결코 일어나서는 안되는 하늘이의 죽음에 대해 누가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 장으로 치러지는 장례를 뉴스로 보면서 그 순간 성경의 어떤 말씀으로 그 부모님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금요일에는 부산 리조트에서 화재가 나서 6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일하러 간 아버지, 아들을 한 순간에 잃은 가족들에게 어떤 말로 설명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삶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설명을 방법이 별로 없습니다.
 
제자들의 민족주의적 사고에 있어서 예수님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행동에 동의하지 않았고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왜 저런 행동을 하시는가에 대한 이유보다는 그 행위 자체가 불편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만나면 왜라는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오지 못합니다.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 사람들은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가지고 올지라도 그 답을 찾을 때까지 그 질문을 붙들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해되지 않는 그 일 앞에서 어떤 사람은 낙심으로, 또 어떤 이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어떤 사람은 아예 신앙을 포기해 버리는 실족으로 나가아 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앙 안에서 이 질문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해되지 않고 동의되지 않는 영역까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하나같이 하나님 앞에 질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욥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잘 나가던 욥이 한순간에 물질을 잃고, 자녀를 잃고, 건강을 잃어버립니다.
욥의 아내가 그를 보며 말합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의 아내의 반응이야말로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 아닐까요? 더 이상 지킬 것도 잃어버릴 것도 없는 삶에 무슨 하나님이 필요하겠습니까? 원망하고 죽는 방법 외에 어떤 선택지가 있습니까?
 
그런데요 욥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욥을 향해서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욥기를 읽어보시면요 욥이 원망을 했습니까? 안했습니까?
누가 봐도 원망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자기가 어머니의 젖을 빨았던 것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해석은 욥이 욥기 1장에서는 원망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입술이 원망을 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있는 것, 하나님 앞에 따져 묻고 있는 모든 그 장면을요 하나님 보시기에 범죄하지 않았고 원망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불평으로 보시지 않습니다. 그의 인생의 질문으로 받으십니다. 그의 신앙의 성숙의 과정으로 보십니다. 그리고 욥이 그렇게 찾던 하나님께서 욥의 질문에 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질문을 던진 것에 대해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잘못 알고 있는 점에 대해 새롭게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욥이 고백하죠. 내가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봅니다.
그는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세계를 발견합니다. 그가 다시 받은 물질의 복과 자녀의 복보다 더 귀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80세 노인이 된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 저입니까? 왜 지금입니까? 나는 입이 둔 한 자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을 놓치지 않았던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순종함으로 나아갑니다.
왜라는 질문을 통해 그는 하나님에 대해 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신을 밝히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오늘 사마리아 여인도 이해할 수 없어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그녀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혈통적인 장벽을 넘어선 낯선 유대인을 거절하며 달아나지 않습니다.
생수를 주겠다는 터무니 없는 제안을 물리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던 자신의 아픈 과거와 여전히 청산하지 못한 현재의 치부를 건드리는 유대인을 나 몰라라 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그의 해석에 앞에서도, 그리고 이제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장소가 예루살렘인지 그리심산인지가 아니라, 오직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내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계속 물었습니다. 질문이 계속될수록 자신이 믿고 있었던 것이 하나둘씩 무너져 내렸지만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 세계가 무너지는 고통을 수용한다는 뜻이고, 새로운 세계가 침입해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 있는 일입니다.
 
여인은 무너져 내렸고, 자신의 어둠이 하나둘씩 폭로되었지만, 그럴수록 점점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유대인이 전혀 새로운 존재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질문을 던지는 동안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상한 유대인 남자’에서 ’선생님‘으로 그리고 ’선생님‘ 에서 ’선지자‘로 결국 사마리아의 ’메시아‘로 ’세상을 구원할 분‘으로 변해 가셨습니다.
떠오르는 아침 해에 짙은 안개가 걷히듯 여인은 그 마음이, 아니 삶이 통째로 환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자신의 목마름에 대한 철저한 인정, 자신의 무지를 받아들이는 겸허한 태도가 전혀 새로운 관계와 앎의 세계로 그녀를 데리고 간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이해할 수 없을 때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질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까?”
“도대체 언제까지 힘들어야 합니까?”
“왜 하필 제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왜 하나님은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그들은 질문을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신앙의 질문이 있으십니까?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나는 왜 신앙의 뜨거움은 없는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발견하는지? 신앙의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신앙의 질문을 놓치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왜라는 질문이 없어지면 또 다른 왜가 우리 삶에 들어올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 질문하지 않는 제자들 마음에 어떤 생각이 가득했을까요?
도대체 예수님은 왜 저러시냐?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와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그들은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하나님께 그 왜라는 질문을 가져가지 못하면 내 인생은 왜 이럴까? 인생을 비난하는 자리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저 사람은 왜 저랄까? 우리 교회는 왜 이럴까?
우리 안에 이해되지 않는 왜? 라는 질문을 하나님께 가져 가지 않으면 그것은 나를 무너뜨리게 하는 왜라는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요한복음 6장 말씀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생명의 떡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요 6장 3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그것을 풀어서 설명해 주십니다. 요 6장 39-40절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반응합니다. 요 6장 41-42절
4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42.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를 질문하는 것 대신 자기가 알고 있는 예수에 대해 말하며 수군거립니다.
 
그들은 스스로 예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 부모까지 내가 아는데 자기가 어찌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며 예수님을 비난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심지어 제자들까지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6장 60-61절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와 가치관과는 맞지 않습니다. 알지 못하면 물어야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것을 택합니다. 결국 질문하지 않는 그들은, 자신의 세계를 깨고자 하지 않던 그들은 예수님을 떠납니다. 요 6: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 말씀 앞에 우리의 신앙의 질문을 놓치면 실제로 예수님을 떠나거나 마음으로 예수님을 떠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옆에 있지만 예수님과 상관없는 삶의 자리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질문을 통하여서 예수님에 대해 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지 무엇하기를 원하시는지 그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진리를 단순히 아는 자가 아닌 사는 자리로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동문서답의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들 안에 질문을 주시려고 제자들이 듣기에 엉뚱한 답을 내어놓으십니다.
 
요4: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상하게 여기지만 질문을 하지 않고 식사를 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 4:32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그대로 덮고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질문하지 않는 제자들에게 질문이 생기도록 유도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어리둥절하며 서로 말합니다.
요 4: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님은 육의 양식이 아니라 영의 양식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또 서로 수근 거리며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말할 뿐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는 알 수 없는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추수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양식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추수 이야기는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을 풀기 위해서 사마리아 여인과 제자들의 모습을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이상히 여기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질문하는 사람, 제자들은 침묵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지금 육신의 먹을 양식을 가지고 돌아와서 예수님과 먹을 양식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그 제자들이 오는 그 순간에 여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생명의 양식을 전하러 마을로 들어갑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져주시며 영혼의 추수를 당부하시며 자신이 왜 오셨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여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혼의 추수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말을 듣고 믿는 자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진리를 듣고 아는 자리에 서 있고 사마리아 여인은 진리를 삶으로 사는 자리에 서있습니다. 분명 제자들이 예수님을 더 잘 알고 오래 함께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육신의 양식을 여인은 생명의 양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결국 27절에서 보인 제자들의 침묵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추수를 거부하는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사마리아 사람들은 절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침묵했던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서는 결코 추수할 것이 없다고 속단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여인은 추수의 일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 여인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물었고 제자들은 묻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뜻을 알았고, 제자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진리를 아는 것도 어려워하고 여인은 진리를 사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저는 20대 큰 병을 앓았습니다. 관절이 굳어져 가는 병을 앓으며 극심한 통증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두 분다 암으로 고통받으시다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어쩌면 제 나이 때 경험하지 않아도 될 일을 저는 많이 경험을 했던 편입니다. 건강의 어려움과 물질의 어려움, 부모님의 아픔과 이별
이 많은 고통들은 제 삶에서 이해되지 않는 영역이었습니다. 누구보다 기도하는 어머니를 왜 그렇게 빨리 데려가셨는지, 왜 나에게 그런 질병의 고통을 주셨는지, 저는 하나님 앞에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 질문을 포기했더라면 지금의 저는 없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 하던 그 순간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답을 구하는 저에게, 왜 이런 일이 났습니까라고 묻는 저에게 골로새서 2장 3절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잠을 자다가 꿈에서 이 말씀을 주셨어요. 자고 일어나자마자 그 강렬한 음성 앞에서 말씀을 찾았습니다.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세상의 답은 예수 안에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은 그 수많은 가르침 앞에 깨닫지 못했던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사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사도행전 3장 6절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그들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그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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