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구스도의 세상 속에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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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구스도의 세상 속에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
아구스도의 세상 속에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세상에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업적들 가운데, 특별히 오늘 본문 1절에 나오는 ‘가이사 아구스도’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로마 황제를 가리킵니다.
그는 주전 27년부터 주후 14년까지, 40년이 넘게 로마를 통치한 황제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직전 황제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 황제가 암살당한 뒤에, 카이사르의 양자로 지정되었고, 로마 황제의 자리를 두고 경쟁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로마의 황제가 됩니다.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황제가 된 이후에, 그는 실질적으로 독재정치를 시작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먼저 정치적으로는 관료제를 정비하고 속주 통치를 강화합니다.
군사적으로는, 로마군단을 28개 군단으로 재편성하고, 제국의 국경을 안정화시켰고, 퇴역 군인들에게는 토지를 분배하여 군인들의 불만을 줄이고 충성도를 높였습니다.
경제와 사회적으로는 ‘가도’를 만들어 도로망을 확충하고, 해상 교역 활성화로 경제를 발전시켰습니다.
문화와 예술적으로는 로마의 건출물을 대대적으로 확장했고, 로마 시민의 도덕성과 가족 가치를 강조하는 법률을 제정하였습니다.
그 결과, 주전 27년부터 주후 180년까지 약 200년이 넘도록 이어진, 로마의 평화시대인, ‘팍스 로마나’의 시대를 연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투스’ 황제입니다.
이러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세상에서는 로마 황제가 ‘신의 아들’과 ‘구주’로서 사람들의 경배를 받았고, 로마 황제의 탄생이나 승리가 로마 사회에서 ‘복음’, 곧 좋은 소식으로 불렸습니다.
바로 그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천하에 칙령을 내려, 모든 사람들이 호적을 하도록 했습니다.
황제가 모든 사람들의 인구조사를 하도록 명령한 것은, 사람들의 수만큼 부여할 수 있는 ‘인두세’, 즉 세금을 걷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호적을 하기 위해서는, 각자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가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은, 다윗의 족속으로, 고향이 베들레헴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고향으로 마리아와 함께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베들레헴에는 호적을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을 것이고, 그로 인해 마땅한 숙소를 찾지 못한 요셉과 마리아는 말 구유에서 아들을 낳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하필 호적령을 내려져, 베들레헴으로 갔다가, 하필 거기서 출산을 하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결국 예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심으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게 되었습니다.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지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그리고 메시야 예수의 탄생은, 그 지역에 목자들에게 천사를 통해 알려졌습니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10-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메시야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 천사는 “기쁨의 좋은 소식”, 곧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동네에서 나신 그 예수께서, 바로 우리를 위한 ‘구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3-14절에서는, 홀연히 하늘에서 수많은 천군천사가 나타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놀랍도록,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예수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구주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군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부분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고, 그로 인해 로마의 평화의 시대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로마를 구원한 ‘구주’로 불렸습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신의 아들인 로마의 황제이며, 그의 탄생과 승리의 소식은, 곧 로마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는 화려한 로마의 대궁전에서 살았고, 세상은 그의 명령에 의해서 움직여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아우구스투스의 세상 한 가운데, 예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멋진 궁전이 아니라,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부유한 가정이 아니라,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의 탄생 소식은, 로마의 황제나, 귀족 가문에게 전파되지 않았고, 오히려 가난하고, 천한 계층에 속했고, 법정의 증인으로 설 수 없었던, 목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그 예수께서 11절에서 ‘구주’이시며, ‘그리스도’이시며, ‘주’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로마 황제의 사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신인 천사에 의해 전달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탄생은 로마의 군대가 아닌 하늘의 군대의 찬송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성경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우리의 ‘구주’로 따르겠습니까?
세상의 관점과 성경의 관점은 반대입니다.
우리는 오늘 날, 세상의 관점으로 아우구스투스를 우리의 구주로 섬기고 따르고 있습니까?
그래서, 세상에서의 더 많은 업적을 남기기 위해서, 더 많은 부를 누리기 위해서, 더 많은 명예와 권력을 누리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 것을 추구하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의 삶이 더 많이 가질수록 행복해집니까?
만약,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14절에서 예수님의 탄생이 땅에서 평화라고 찬양하는 천사들의 찬양은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평화는 예수가 아니라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가져다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십시오.
오늘 우리의 삶에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먹을 것이 부족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복지 수준은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좋아졌고, 교육의 질이나, 생활의 수준 또한 매우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평화로워졌습니까?
세상은 좋아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점점 더 결핍되어가고 있습니다.
항상 분노에 차 있고, 복수에 열광하고, 조그만한 흠에도 남을 헐뜯고, 색깔에 따라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죽이고, 자식을 버리고, 돈에 가족을 죽이는 미쳐버린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세상 한 가운데, 우리를 위해 오시 구주 예수님을 바라보시기를 축복합니다.
구주께서 궁전이 아니라 말 구유에서 탄생하셨듯이, 우리도 세상에서의 화려하고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들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더 낮고 천한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높이는 자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내가 높은 자리로 나아갈 때, 행복과 평안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평안은, 내가 높아질 때가 아니라, 내가 낮아질 때 주어집니다.
12-13세기에 생존했던, 프란치스코라고 하는 사람은, 이탈리아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을 사치와 향락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고 친구들과 파티를 즐기며 명예와 부를 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기도 중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향해 “프란치스코야, 너는 나를 위해 일하지 않겠느냐”라고 하는 음성을 듣게 되었답니다.
그 음성을 듣고,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포기하고,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낮은 자들의 삶을 선택하며 거지처럼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헐벗고 굶주리는 이들과 함께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프란치스코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스승님, 참된 기쁨이란 무엇입니까?”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추운 겨울 밤 문전박대를 당한다 해도, 그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느낀다면, 그것이야 말로 참된 기쁨이다”
프란치스코는 높은 자리에 있거나 많은 것을 소유할 때가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꼈습니다.
결국, 그는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가난한 삶을 살았지만, 영적인 관점에서는 그 누구보다 풍요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가난한 자들의 성자’로 불리며, 로마 카톨릭에서는 그를 성인의 이름을 올려, 성 프란치스코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내 마음이 궁핍한 것은, 외적인 것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으로 채워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낮고 천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20절에 목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하며 돌아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표현이 누가복음에서 8번 등장하는데, 대부분 사회적 주변부에 있는 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뒤에 했던 행동들을 묘사할 때입니다.
한번은, 무리들을 통해서 눅 5: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또 한번은 로마의 이방인을 통해서 눅 23: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또 한번은 중풍병자에 의해서 눅 5: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또 한번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것을 본 사람들에 의해서 눅 7: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또 한번은 나병환자에 의해서 눅 17: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마지막은 맹인에 의해서입니다. 눅 18: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렸던 사람들은, 이처럼 왕과 귀족들이 아니라, 복음의 변두리에 있던 낮고 천한자들에 의해서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많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누릴 때가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으로 인해 내 삶이 회복될 때 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이, 어둡고 비천하고,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에도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비천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