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람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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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views능력의 이름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Notes
Transcript
오늘 본문의 표제는 시편 54편을 읽고 후대의 사람들이 이 시편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는 제목으로 지어 놓았습니다. 시편 54편 상단에
뭐라고 써 있습니까?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놀래,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 라고
적혀 있습니다. 십 사람이 사울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사무엘상23장과 26장의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과 어떠한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표제인 거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 표제어가 오늘 본문과 100% 연관이 있다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후대 사람들이 그저 오늘 본문의 3절과 4절 말씀에서 힌트를 얻어
다윗이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했고, 또 누군가로부터 쫓겼다고 결론을 내리고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삼상 23:19말씀이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된다고 추측하고 있는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어떠한 내용인지 좀 살펴보겠습니다.
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십 사람들이 사울이 통치하고 있었던 기브아로 찾아가 다윗이 숨어 있는 장소에 대해
밀고합니다. 이 밀고의 내용을 들은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군사을 이끌고 다윗을 추격합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배경의 내용을 오늘 본문 3절과 4절이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배경을 사무엘상 23장과 26장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의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여기서 말하는 “낯선 자들”이란
다윗의 거처를 몰래 사울에게 일러바친 이방 사람인 ‘십 사람들’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라는 표현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다윗을 찾기 위해 수색하는 모습을
연상케한다고 학자들은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포악한 자들’은 사울 왕과
그의 군대를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포악하다는 뜻은 자비와 긍휼 없이 누군가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하는 자들을 가리켜 말하는 표현입니다. 사울왕은 정신이 나가면 다윗을 죽이기 위해 창을 들고
다윗에게 던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천명의 군대를 동원해서 다윗을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던 무자비 무긍휼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런 사울을 피해 도망갔던 것입니다.
학자들은 오늘 본문 4절 말씀도 사무엘상 23장에 배경을 두고 있다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학자들은 이 말씀의 배경이
삼상 23:16 절 말씀일 거라 생각합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받았을 때 그의 절친 요나단이 다윗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부추겨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자신 안에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4절의 말씀이 사무엘상 이십삼장 십육절에 배경을 두고
있는 말씀이라 주장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 말씀이 사무엘상 23장과 26장에 그 배경을 두고 있다는
학자들의 주장은 추측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오늘 본문의 저자는
분명 ‘낯선 사람’과 ‘포악한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이 사무엘상에서 다윗이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
오늘 본문의 상황이라 추측하는 것이 100% 틀린 추측이라고도 말할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을 사무엘상 23장을 배경으로해서 살펴보게 된다면
오늘 본문 말씀 4절에 말하는 ‘낯선 자들’이 일어나 다윗을 쳤다는 표현은 사무엘상의 배경으로 볼 때 다윗이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상 이십삼장의 내용에서 다윗은 낯선 이방인들에게 배신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이십 삼장에서 다윗을 배신한 ‘낯선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방인은 ‘십 사람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삼상 이십삼절에 다윗을 배신한 이방인들이 ‘십 사람들’ 밖에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 보시면 다윗이 그일라 지역에 머물 때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어떤 사람도’ 다윗을 배신한 ‘낯선 자들’로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이르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사무엘상 이십삼장의 배경을 통해
오늘 본문 4절에서 말씀하는 ‘낯선 자들’을 다윗을 배신한 ‘십 사람들’,또는 ’어떤 사람’들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으로 보고 있는 사무엘상 이십삼장에는 앞에서 언급한 2명의 배신자외 다른 배신자는 등장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사무엘상에는 다윗이 구해준 그일라 사람들도 결국은 다윗을 배신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 주민들을 공격하려고 할 때 다윗은 그일라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뜻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일라 사람들을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구원하는 것임을 확인한 다윗은 자신이 사울에게 쫒기고 있는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그일라 사람들을 블레셋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기 위해 블레셋과 전투를 치룹니다. 그 전투에서 다윗은 대승을 거두고 그일라 사람들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냈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그일라 사람들은 이러한 이유로 다윗의 편을 한동안 들었지만 사울이 다윗의 편을 드는 사람들을 죽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순간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다윗을 배신합니다.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
여러분들도 타인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타인에게 물리적, 정서적 피해를 받아본 경험이 있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냥 무조건 여러분들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계적
어려움이 생기게 되면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갔던 것 처럼 누군가와 관계를 멀리하고 피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누군가는 의도적으로 그러한 불편한 관계 안으로 계속 밀고 들어와 저와 여러분들을 계속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또한 환경적으로 그러한 불편한 관계를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 저와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는 그 누군가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낯선 사람’ 또는 ‘포악한 사람’들이라면 어떻게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공통 특징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특징이 바로 3절 말씀 하반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이 표현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 또는 신의 존재는 믿고는 있으나 그 신이
자신의 삶에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다고 믿는 ‘이신론자’와 같은 분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에 주인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앞에 두고 신앙생활하는 저와 여러분들을 괴롭히고 있다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윗을 그러한 사람들에게서 보호하신 하나님께서
동일한 역사로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들 또한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무엇으로 구원하신다고 말씀합니까? 그렇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그의 이름’이란 ‘그의 명성’ 또는 그의 ‘전 존재’를
가리켜 말씀하고 있는 표현인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시편 이십삼편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는 본인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그를 따르는 백성들의 삶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명성과 연관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 분의 전 존재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 이름의 성을 이어 받은 제 아들을 제 이름 때문이라도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제 아들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저는 제 혼신의 힘을 다해 아들을 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
아들을 양육하고, 돕고, 보호하는 것은 제 이름 즉 저의 평가나 책임과도 연관돼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마찮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을 그분의 명성이나 책임 때문이라도 보호하시고 도우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저와 하나님의 궁극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1절 하반절에 나와 있는 “힘”입니다.
저는 하나님과 같은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원이로되
제 능력이 부족해서 제 아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부분이 많이 아쉽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그 자녀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가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는 사랑하는 자녀를 구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위험 현장에 뛰어 드실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들이 수영을 잘 못하신다거나 소방 훈련을 잘 받지 못하셨다고 가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 여러분들의 마음은 원이로되 여러분들에게 능력이 없어 위험에 처한 그 자녀를 구할 수는
없게 되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이고, 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 밖에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과 같이 연약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처럼 깨어져있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강인한 체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실 뿐 아니라 그 체력과 능력이
무한하십니다. 그 분은 그 무한한 능력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표현이
바로 오늘 본문 1절의 말씀의 내용인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그 뒤에 또 뭐라 표현돼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여기서 말하는 “힘은” “능력”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윗을 구원한 하나님의 “힘”은 사울이라는 막강한 왕의 힘과는 비교도 될 수 강인한 힘이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추격했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울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도리어 사울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다윗이 사울의 칼과 물병을 가져오게 하심으로
사울의 생명이 다윗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힘’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없는 자들이 저와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면
절대 그 앞에서 ‘기’ 죽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예수그리스도란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서 자신과 우리 사이에 있는 바로 그 예수그리스도란 공통 분모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열심인 것입니다.
그의 구원 모습에 대해 1절 하반절은 “변호하소서”라는 표현을 써 놓았습니다.
이 표현은 “법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법정에서 변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림이 그려지셔야 합니다.
마치 다윗이 스스로를 생각하기에 사울에게서 쫓기는 신세인 도망자요, 죄가 있는 유죄 판결받은
자라 생각할 때 그를 변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아 네가 도망자가 아니라 사울이 네 앞에서 도망자요, 유죄 판결받은 자이고 너는 네 앞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깨끗한 자다.
여러분에게도 예수그리스도라는 고결한 이름이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그 이름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 전 존재를 인정합니다. 그 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재판관 되신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로 신앙고백하는 저와 여러분들을
죄없다 여겨주시는 판결을 내려주시는 능력자이십니다. 비록 우리 안에
연약함이 있고, 작심 삼일의 의지를 가지고 있을지 몰라도 나를 의롭다
여겨주시는 그 이름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다면 우리를
“낯선자들과” “포악한 자들”로부터 그 이름이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우리를 악으로붙터 변론해 주실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이다”. “더 이상 이에게
왈가불가 하지말라! 이는 무죄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변호하소서!”의
의미인 것입니다. 법정적 변호와 보호를 받고 나서도 본인의 연약함을 바라보고
“무서워, 죽겠네, 안 될 거 같은데, 난 유죄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다윗이 경험한 “주의 이름”과 “주의 힘”을 우리고 경험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뒤로 물러 나지 마시고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는
코람데오의 삶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