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은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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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보는 관점 1(은혜)
교회를 보는 관점 1(은혜)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고린도전서의 배경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중 고린도 지역에서 1년 6개월 간 복음을 전하며 세운 교회
바울이 떠나고 시간이 지난 후 고린도교회에는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살펴보면 교회의 본질과 역할을 배우며, 하나님께서 부족한 교회를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알수 있습니다.
■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바울 사도는 인사말에 수신자인 고린도교회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심각한 분열(고전1:10), 도덕적 타락(고전5:1), 소송(고전6:1) 등 여러문제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울은 먼저 그들이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임을 인정합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의 모임은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교회’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교회는 사람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교회를 아들이나 아내, 사위나 딸에게 되물림을 한다는 이야기 혹은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또한 교회를 기업이라고 여기고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가 사람의 소유가 될 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욕심과 계획이 중심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없어지고 말씀은 그안에서 역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지고 역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교회에 여러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한 성도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세워졌으며,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기에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는 교회의 정체성과 가치는 사람들의 상태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합니다.
고린도전서 1:1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처럼, 교회도 은혜로 봐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은 존재이기에 교회의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우리는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도 그렇기에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먼저 바라본 것이 아니라 은혜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 교회에 대한 평가
은혜로 바라 보지 못하고 문제만을 바라 볼 때 우리는 교회를 평가하게 됩니다. ‘교회가 왜 그래!’ 라고 하는 말은 합당하지 않은 말입니다. 교회 전체를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문제를 볼 때, 우리는 교회가 은혜로 세워진 공동체임을 기억해야 교회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결코 인간적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인간의 공로나 행위가 아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부르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문제가 있어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요즘 나라가 뒤숭숭합니다. 나라에 문제가 많지만 나라를 사랑합니다. 가정에 불화가 있고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들 때문에 나라를 포기로 가정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분명 교회에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문제가 발생해도 여전히 주님의 교회,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함부로 판단 할 수 없습니다.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20:28 “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 문제있는 고린도교회에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도한 바울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먼저는 하나님의 교회로 바라 보았습니다. 문제가 있지만 하나님의 교회, 주님의 은혜로 세워진 교회, 은혜의 관점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바라볼 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즉 기도해야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여기에서 ‘은혜’는 헬라어 카리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헬라 세계의 일반적인 인사말이였고 ‘평강’은 히브리어 샬롬에서 유래한 것으로 히브리인들의 전통적인 인사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사용한 ‘은혜와 평강’은 단순한 인사말을 넘어 모든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풍성한 복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난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없이 은혜가 있을 수 있을까요?
은혜와 평강의 근원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불교나 유교는 석사모니나 공자가 없어도 경전만 있어도 성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기독교 교리와 조직이 좋아도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이 없다면 기독교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모든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 은혜 (χαρις, 카리스)
헬라어 ‘카리스’는 호의, 선물, 감사 등을 의미한다. 바울이 사용한 ‘카리스’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호의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죄와 결점에 대해 공의로 대하시면 우리는 심판을 받아 죽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공의는 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해야 하므로 인간을 정죄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에게 복을 주기를 원하신다.
특히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강조한다.
은혜없이 구원을 받은 사람은 없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셨다. 이는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이다.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생각해보라! 구원의 은혜만으로 충분하다.
1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5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모든 것이 은혜, 받아들일 때에 내것이 되는 것, 분명 약속을 한것은 한 데나리온이였습니다. 일이 없는 사람들이 놀고 있는 사람들이 그대로 있으면 허송세월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포도원에서 일 할 수 있도록 품군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이른 아침, 제 삼시, 제 육시, 제 구시, 제 십일시에도 사람들을 부르셨고 품군으로 일하게 하셨습니다.
이들은 모두 주인과 한 데나리온을 약속한 사람들, 하지만 먼저 온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자신의 생각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니 원망이 되는 것입니다.
분명 부름받았을 때에는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지만 사람을 보고 자신의 생각이 들어가니 은혜가 반대가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만 생각하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보고 비교하고 자신의 생각이 들어가면 은혜는 사라지고 자기 힘으로 컸다고 생각하고 부모를 무시하는 결과를 보일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얻은 것도 많은 형제, 자매님들의 노력과 기도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나 하나를 위해 많은 희생과 기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은혜입니다.
○ 평강 ( שלום, 샬롬)
히브리어 ‘샬롬’은 단순히 ‘평화’를 넘어, 완전함, 온전함, 건강, 행복, 번영 등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바울이 사용한 ‘샬롬’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오는 영혼의 평안과 안식을 의미한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단절과 심판을 가져온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이는 우리에게 깊은 평안과 안정감을 가져다줍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전한 ‘은혜와 평강’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구원의 은혜와 참된 평안을 의미한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고린도교회의 문제만 바라본다면
바울은 글로에 편으로 고린도 교회의 많은 문제를 들었다.
고린도교회에 심각한 10가지 문제가 있었다.
① 분쟁의 문제(1장- 4장) ② 음행의 문제(5장)
③ 법정 송사의 문제 6장, ④ 성적인 범죄들 (6장)
⑤ 결혼문제(7장) ⑥ 제사음식의 문제(8장)
⑦ 예배와 질서의 문제(11장). ⑧ 영적 은사의 문제(12장에서 14장)
⑨ 부활의 문제(15장) ⑩ 선교와 연보의 문제(마지막 16장)
이런 문제만 바라본다면 개인의 신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믿음의 시각이 아니라 문제 중심적인 시각은 이러한 본질을 흐리고, 신앙의 성장을 저해할 뿐 아니라 교회를 힘들게 할 수 있다.
예시) 자매님, 아름다운 단풍을 보시고 뭐가 아름답냐고… 어차피 지고 떨어지면 지저분해지고 쓰레기인데...
문제만을 바라볼 때 가장 큰 신앙의 손해는 은혜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은혜를 잊어버리게 되고 말조차 안나온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이 은혜의 반대, 은혜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신명기 4:9 “9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두렵건대 네가 그 목도한 일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렵건대 네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날까 하노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신명기 8:11–20 “11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찌어다 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13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7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20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신명기 24:19 “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사사기 3:7 “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은혜를 잊은 사람들은 가나안에서 가나안 사람들처럼 살게 된다.
옛말에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맏는 말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거꾸로 할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타인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고통은 잊지 못하면서도 타인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쉽게 잊어버린다는 때가 많지 않습니까?
은혜를 입을 당시에는 평생토록 잊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다가도 세월이 지나면 쉽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도 있다. 배은망덕
사람으로부터 받은 은혜도 마땅히 기억해야겠지만 우리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기억하며 감사하며 살아야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지난날에 수많은 위기와 역경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을 불신하면서 사는 것은 불행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은혜를 깨닫든지 깨닫지 못하든지,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다.
사람은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지는 때가 있다.
은혜 찬양…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한이 없다.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으시고 햇빛과 비를 때를 따라 주십니다.
건강도 주시고 생명도 주시고 자연도 주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보존해주시지 않으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자가 하나도 없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거져 주셨다는 말씀은 싸구려이기 때문이 아니라 도저히 값으로 계산 할 수 없어서 거져 주셨다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크게 우려되는 일이 있다.
감사하는 마음이 적어지고 은혜에 대한 고마움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는 것이다.
부모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녀, 선생님의 은혜를 모르는 제자,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교인들이 많아 졌다.
은혜를 모를 뿐만 아니라 당연한 것처럼 생각한다.
옛말에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더 잘 잊어버린다”는 말이 있다. 아마 은혜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만성이 되어 그렇게 된 모양이다.
오늘날 내가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감사해야 합니까? 받은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려면 지난날의 내가 누구였던가를 기억해야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명심하라! 나같은 죄인 살리신
사도바울은 고전 15장 9절에서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말씀하였다.
바울은 지난날의 자신의 삶을 돌아 보면서 “내가 누구였던가”를 생각하였다.
문제에만 집중하면 교회의 구성원, 리더십, 활동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문제 중심적인 시각은 불평과 원망하는 마음을 키웁니다.
이는 감사하는 마음을 잃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눈을 감게 만듭니다.
이는 공동체 내 불화와 분열을 야기하고, 건강한 관계 형성을 방해한다.
(예: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하지?”, “교회가 왜 이렇게 운영되는 거야?”)
이런 태도는 출애굽때에 쉽게 퍼졌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교회의 부정적인 면만 보고 말하기 시작하면 본인도 교회에 대해 애정이 없고 참여 의지가 줄어듭니다.
결국은 슬슬 봉사도 빠지려고 한다.
“어차피 문제투성이인데 내가 뭘 해도 달라지겠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결국 교회로부터 멀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유익을 얻지 못하게 된다.
교회의 문제에만 집중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러 경우, 영적 성장이나 신앙의 기쁨이 없다.
(예: “교회 다니는 게 의미가 있나?”,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 걸까?”)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전도에 큰 걸림돌이 된다.
교회의 문제점만을 부각하면 불신자들에게 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주어 복음을 전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교회 내부 문제에만 매몰되어 선교도 어렵게 한다.
(예: “교회는 위선적인 곳이야”, “교회에 가면 돈만 뜯어가”)
교회는 완벽한 곳이 아닙니다.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에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해 나가느냐이다.
은혜의 관점으로 교회를 바라볼 때, 우리는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발견하고, 소망을 잃지 않으며,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며 함께 성장해 나갈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주님!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주님! 나는 만삭이 되지 못한 모자란 사람입니다. 내가 제일인 줄 알고 교만하고 거만하여 자신만을 드러내고 산 사람이었다.”
하면서 자신을 낮추었다.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로 보는 순간부터 “나의 나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고전 15장 8-10
오늘 우리는 누구입니까? 과거의 나는 누구였습니까? 죄 많은 사람아니었습니까?
우리는 다시 한번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오늘의 내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음을 깨닫고 감사해야합니다.
은혜를 모르는 것은 사탄이 좋아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보답하는 삶이야 말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하게 사는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