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짜 예배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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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3-17
레위기 1:3-17
서론
성도 여러분, 기본기, 기초라는 단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다양한 생각들이 떠오르실텐데요. 아마도 아파트 공화국이라고 말하는 ‘대한민국’에서 ‘기초’, 또는 ‘기본기’, ‘토대’하면 자연스레 아파트가 떠오를 수 있을 것이구요. 젊은 학부모 층이나 학생들은 ‘기본기’하면 공부, 학업 쪽에서 생각이 날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기초’, ‘기본기’는 등장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기본기’, ‘기초’에 대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너무 기본적인 것이기에, 당연한 것이고 굉장히 중요하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본기, 이 기초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떤 위대한 건축물을 쌓아올리기 위해서는 탄탄한 기초가 필요하고, 어떤 위인이 탄생하기 위해서도 이 ‘기본기’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몇몇의 예를 들어볼까요? 과거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들, 삼풍 백화점 붕괴 사건, 성수대교 붕괴 사건, 최근에 검단신도시에 일어났던 아파트 붕괴사고 등 기초공사를 제대로 하지 않거나 기본적인 것들을 지키지 않아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고들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기본기를 충실히 쌓음으로 어떤 한 분야에서 족적을 남긴 분들도 나눠볼까요? ‘손흥민 선수’에 대해서 아십니까? 아마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아실 것입니다. 오늘날 손흥민 선수가 위대한 축구선수, 월드클래스 축구선수가 된 것에는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씨’의 연습 방식이 바탕에 있습니다. 손웅정씨는 아들이 축구를 시작한 후, 중2 때까지 시합을 단 한 번도 시키지 않고 매일 오른발 슈팅 500개, 왼발 슈팅 500개를 시켰고 그 결과 오늘날 손흥민은 왼발 오른발 자유자재로 쓰는 선수가 되었고 영국 리그에서 득점왕도 하게 되었습니다. 또 기본기, 기초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로 한 가지만 더 소개해드리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트럼펫 연주자 ‘아르투로 산도발’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즈 트럼펫의 거장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분은 현재 75세 정도 됐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는 연주를 준비할 때, 루틴 중 하나로 Clarke나 Arban 책으로 연습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Clarke나 Arban은 트럼펫 연습 교재인데 트럼펫 시작할 때 보는 책인 겁니다. 다시 말해, 기본기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지금도 반복하고 있다는 거죠.
자! 이처럼, 우리는 ‘기본기’, ‘기초’와 관련된 말을 정말 많이 들어왔고 우리 삶의 전 영역에 있어서 기본기와 기초를 쌓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생각이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으며 그것에 대해 동의하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네! 어떤 일을 하는 것에 있어서, 전문적인 일이든, 공부든, 요리를 할 때 하는 작은 칼질이라도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하물며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본기’, ‘기초’가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 기본기, 기초를 다지는 것의 시작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래서, 성경 66권 가운데, 신앙의 기본기, 신앙의 기초, 특별히 예배에 대해 정말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말씀이 어디인가를 살펴보았는데, 살펴본 결과, 우리가 가장 기피하다시피 하는, 우리에게 있어 수면제와도 같은 말씀인 ‘레위기’ 말씀에 시선이 고정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레위기’는 어떤 인상과 느낌을 줍니까? 제가 처음 레위기 말씀을 읽을 때는 내용 이해 하나도 없이 그냥 읽었습니다. 읽었던 이유도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께 용돈 받기 위해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떻게든 읽어야 하는데, 자세히 읽으려 하면 지루했고 이해도 안 됐고 잠이 왔기 때문에 그냥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저만의 얘기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레위기! 절대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은연 중에 지루하겠는데? 쉽지 않겠는데?와 같은 거부감이 깔려 있기 마련입니다. 몇 몇 사람들에게 ‘레위기’에 대해 설교하고자 한다고 하니, 거의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그 고난의 길을 정말 가려고?” 이런 말이었습니다. 맞습니다. 쉽지 않죠! 그럼에도! 신앙의 기본기를 세우는 것을 논할 때, 레위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반드시 말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레위기가 신앙의 가장 핵심인,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와 ‘예배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낱낱이, 자세하게 가르쳐 주는 교과서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 이 레위기를 통해 나의 신앙의 기본기를 제대로 한번 다져보리라! 라는 마음으로 한번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1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레위기 1장을 보면 어떤 제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무슨 제사입니까? 네! ‘번제’라는 제사에 대해 다루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레위기 1장에 나온 ‘번제’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번제의 히브리어는 ‘올라’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 하나 말씀드릴까요? 이 올라의 의미는 ‘올라간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 알라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리고 영어 성경에서는 번제를 이렇게 표현하는데요. ‘the burnt offering’ 다시 말해 불태우는 제사라고 표현합니다. 이 둘을 조합하면 뭡니까? 번제는 제물을 온전히 태워서 그 연기가 하나님께 향기로 올라가는 제사라는 겁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이 번제는 모든 제사의 기본이자 가장 흔히 드려진 제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국가적으로 매일 아침 저녁으로 두 번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국가적으로 절기마다 드렸으며 마지막으로 개인적 차원에서 번제를 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이 번제는 레위기의 5대 제사 중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가장 자주, 가장 기본적으로 드리는 대표적인 제사가 바로 이 번제였는데, 번제에 어떤 목적과 의미가 있길래 자주 드려지는 제사였을까요?
번제의 목적에는 크게 세 가지 목적이 있었는데, 첫째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자발적 헌신, 봉헌의 의미가 있고 둘째로는 죄 용서를 구하는 목적과 의미가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 드렸습니다. 이런 걸 종합해봤을 때,우리가 매주 드리는 예배와 굉장히 비슷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매주 예배 드리십니까? 예배를 드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기본적으로 우리는 ‘예배하도록 부르심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예배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를 사랑하사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 자발적 헌신의 마음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이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하며 도우심을 구합니다.
그렇다면, 번제는 어떤 방식으로 드려졌을까요? 우리는 이 번제의 절차와 순서에서 예배의 교훈, 신앙의 기본기를 생각해볼 수 있게 됩니다. 번제의 절차, 순서를 한번 보도록 하죠. 먼저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니까? 네! 바로 제물이 필요합니다. 번제물이 필요하죠. 레위기 1장에 보면, 번제물로 어떤 것들을 사용할 수 있습니까? 레위기 1장 3절에서 9절을 보면, 번제물로 ‘소’가 나옵니다. 10절에서 13절을 보면 ‘양’과 ‘염소’를 사용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4절에서 17절을 보면, ‘비둘기’도 가능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제물의 차이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을 때, 비둘기보다는 양과 염소로, 양과 염소보다는 소를 제물로 한 제사를 더 기뻐 받으시지 않을까? 라는 질문입니다. 속물이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식이 부모님께 결혼기념일 선물 또는 생신 선물로 치킨 기프티콘을 보낸다고 해봅시다. 물론 좋지만 그보다 더 큰 선물, 또는 용돈을 받으면 좋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도 그러실까요? 맞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의 가치를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9절과 13절, 17절을 볼까요?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그 내장과 그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또 그 날개 자리에서 그 몸을 찢되 아주 찢지 말고 제사장이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아멘.
이 세 곳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이 문구가 반복되는 것이 보이십니까? 여기서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라는 것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 제사, 예배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 예배는 가지고 오는 제물의 가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비싼 제물을 드릴 수 있는 부자들의 제사는 하나님이 더 기뻐 받으시고, 비둘기도 겨우 바치는 가난한 사람들의 제사는 가치 없게 여기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 예배는 어디에 달려 있었을까요? 3절과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만일 그 예물이 가축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아멘.
여기서, 3절 앞부분,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10절 앞 부분에는 “만일 그 예물이 가축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이 둘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네! 흠이 없어야 했고, ‘수컷’이어야 했습니다. 흠이 없다는 것은 아프거나 상처가 있는 동물이 아닌, 건강하고 깨끗한 동물이어야 한다는 뜻이며 수컷이어야 한다는 것은 당시 문화에서 수컷이 더 귀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더 귀한 것을 상징합니다. 흠이 없고 수컷인 제물을 가져오라는 것은 다시 말해 자신의 정성을 하나님께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평소 집에 굴러다니는 것, 없어도 그만인 것! 그런 허접한 마음이 아닌 내가 정말 아끼고 귀하게 여기고 잘 관리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그 정성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잠시 이 정성이라는 단어를 우리의 예배의 모습에서 돌아보길 원합니다. 어떻습니까? 이 예배에 나오는데, 하나님께 자신의 귀한 것, 정성을 가지고 나오십니까? 헌금을 가져옴에 있어서 자신의 정성이 들어있는 헌금을 가지고 오시나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집에 굴러다니는 돈, 또는 내 지갑에 있는 돈 꺼내서 헌금을 가지고 오지는 않습니까? 돈을 뽑기는 시간도 없고 귀찮으니 계좌로 틱 입금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옷차림, 예배드릴 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주님께 나아가는데 가장 귀한 옷, 깔끔한 옷, 단정하게 입고 가겠다. 이런 자세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예전에 한창 코로나가 심할 당시, 온라인 예배를 드릴 때 가장 먼저 쉽게 무너졌던 부분이 이 부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집이라는 편한 공간에서 드리는 예배, 주변 사람들이 보지 않는 예배다 보니, 잠을 자다 일어나서 잠옷차림으로 드리는 예배, 가벼운 옷차림으로 예배드리는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까? 물론, 아닌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예배에 나올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평소와 같이 흔하디 흔한 24시간 중 1시간만 어떻게든 버티자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아오십니까? 아니면 이 예배의 시간을 귀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나오십니까? 습관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나오십니까? 아니면, 이 예배를 기대하고 열망하며 나오십니까? 예배에 지각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말씀만 들으면 예배 드린 것이니 찬양 끝나고 한참 후에 예배에 나왔다가 목사님 말씀 끝나면 쌩 사라져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모습 하나님이 보시기에 과연 어떻게 바라보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예배에 나오는데 있어 네기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정성’이 얼마나 있습니까? 스스로에게 한번 진지하게 물어보길 원합니다. 저도 MZ 세대 중 한 사람으로서 모바일 폰 뱅킹으로 계좌 송금하여 헌금하는 것 편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려 굉장히 애씁니다. 왜요? 정성이 담긴 문제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와 결혼하고서도 꼭 헌금 제대로 준비해서 하나님께 바치자! 예배에 절대 늦지 말자! 얘기하고 계속 다짐하고 있습니다. 훗날 제 아이가 태어나면 이 내용을 어려서부터 가르칠 것입니다. “헌금 잘 준비해서 예배에 가라! 예배에 갈 때는 꼭 새 옷 입고, 단정하게 입으렴! 절대 지각하지 말고 최소 예배 10분 전에는 가 있으렴!” 왜요? 하나님께서 예배자의 ‘정성’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저의 말을 들으면서 격하게 공감하시는 분이 있는 반면 거부감, 반감이 심하게 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저를 향해 옛날 사람, 꼰대, 율법주의자! 라는 생각이 드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님과 만나는 장소에 나아갈 때, 그 누가 편한 옷차림으로 슬리퍼 질질 끌면서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약속 시간보다 한참 느리게 가면서, 아이고 이 시간 지루하고 괴로우니, 빨리 끝내주세요!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성의 문제 아닙니까? 예의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사람을 만나러 가는데도, 그렇게 정성을 보이고 예의를 차리는데, 온 땅을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왜 그렇게 정성을 발휘하지 않냐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태도가 무너졌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동암교회 성도님들은 주님 앞에 최고의 정성으로 나아가는 예배자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론2
번제의 다음 순서로 넘어가보겠습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려고 제물을 가지고 나온 사람은 마당의 제단 근처에서 가축과 함께 섭니다. 그리고 제물을 바치려는 사람은 자신의 손을 동물의 머리, 제물의 머리에 얹습니다. 여기서 손을 머리에 얹는 안수의 행위는 이 제물이 자신을 대신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자신의 죄도 이 제물이 대신 짊어지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헌신’도 이 제물을 통해 하나님께 드려집니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안수 후 양동이를 가져와 동물의 급소를 찌름과 동시에 동물의 피를 양동이에 받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피가 담긴 양동이를 받아 그 피를 제단 벽에 뿌립니다. 이어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머리를 잘라 내고 내장을 모두 긁어낸 후 짐승의 몸통을 조각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때 제사장은 장작들을 미리 쌓아놓고 고깃덩어리를 제단 위에 차곡차곡 올려 동물을 태웁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내장은 깨끗이 세척하고 동물의 다리를 손질합니다. 이어서 깨끗이 세척하고 손질한 내장과 다리들을 고깃덩이 위에 올렸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소의 살코기와 우족과 소곱창 등도 함께 올린 것입니다. 이 제물은 장작 위에서 활활 타며 하나님께 향기가 되어 올라갔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 머리에 번제의 장면이 그려지십니까? 자!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보기에, 번제의 순서 가운데 제물을 드리는 사람과 제사장 중, 누가 더 적극적인 역할, 더 고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바로 제물을 드리는 사람, 헌제자가 더 고된 역할을 감당하고 더 적극적이게 행동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예배자,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적극적인 헌신과 참여의 자세가 요구되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예배에 가져와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오늘날 예배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예배입니까? 아니면 수동적으로 바라만 보는 예배입니까? 바꿔 말해볼까요? 나는 예배를 드릴 때, 구경꾼입니까? 아니면 적극적인 참여자, 진짜 예배자입니까?
만약 내 마음 속에 ‘예배는 말씀 전하시는 목사님과 찬양팀, 그 외 예배 위원들이 이 잘 준비하면 되지. 나는 그냥 가서 드리고 오면 돼.’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또는 ‘ 어? 오늘은 목사님 설교가 너무 기네. 대지가 별로 머리 속에 안 박히네. 저기선 왜 저렇게 말씀하시지? 삑. 별로네. 오늘 예배는 은혜가 별로 없네.’ 이런 생각과 판단을 하고 계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예배자가 아닌 구경꾼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릴 때, 제사장의 역할보다 정성스럽게 제물을 준비하고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바치는 예배자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경꾼을 찾으시는 것이 아닌 적극적인 예배자, 헌신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여러분들이 예배에 나왔을 때, 적극적으로 찬양하십시오. 적극적으로 말씀을 읽고 말씀에 귀 기울이고 주님을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기도해보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들은 구경꾼이 아닌 참여자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본론3
사랑하는 동암교회 영가족 여러분, 우리는 앞서 예배에서 예배자의 정성과 적극적인 헌신, 참여의 중요성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여기까지만 갖춰도 충분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됐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마지막으로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온전한 마음’입니다. 앞서 말한 정성껏 준비된 제물, 제물을 바치는 헌신은 어찌 보면 형식적인 부분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러한 형식이 잘 갖춰지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향하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기뻐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러한 예들을 많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창세기 4장의 유명한 사건,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던 일 잘 아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믿음’으로 표현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멘.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형식과 정성, 절차는 있지만 온전한 마음이 없는 것에 대해 뭐라고 비판하십니까? 다 함께 누가복음 11장 4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아멘.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형식은 기가막히게 지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안에 내용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한 마음과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겉이 번지르르하고 그럴듯하게 갖춰진 것 같아도,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빈수레가 요란한 꼴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보며 예배에 있어 형식과 마음 둘 다 온전히 갖춰져야 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예배, 참된 예배자의 모습은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로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열심’과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온전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갖춰지지 않은 채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버려지는 예배, 버려지는 시간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배에 우리의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 예배에 우리의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예배에 우리의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담아야 합니다! 그런 예배를 드릴 때 분명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며, 우리 하나님께서 더욱 놀랍도록, 더욱 충만히 그분의 사랑과 평안, 기쁨과 은혜를 가득 부어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이 살아나 더욱 활력있게 주님을 열망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저와 우리 동암의 영가족 모두가 오늘 말씀 기억하며 나의 예배의 모습, 예배자의 자세로서 바꿔야 할 것이 있다면 결단하고 바꿔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배의 구경꾼이 아닌 적극적인 예배의 참여자,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예배자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우리의 예배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우리에게 주사 예배자로서의 우리의 모습을, 태도를 돌아보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말씀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정성을 갖춘 예배자, 헌신과 열정, 적극적인 참여로 나아가는 예배자, 온전한 마음을 담은 예배자로 설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뿐만 아니라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도 이 예배의 자세를 적극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여 예배에 자꾸만 타협하는 모습들이 있는데, 그러한 연약함 붙들어 주사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 보시기에 기쁨이 되는 예배자로 설 수 있도록 붙잡아주옵소서. 이 모든 간구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올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