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

오버플로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5 views
Notes
Transcript
Handout
고린도전서 13:1–13 NKRV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오늘 수련회 마지막 집회입니다. 같은 본문으로 넘치는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제목으로 말씀 나누겠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효율을 중시하고, 성과를 중시하죠. 그러다보니깐, 사람에 대해서도 그 사람의 됨됨이 보다는 스펙과 능력을 봅니다.
교회도 이러한 영향을 받기 쉽죠. 여러분에게 있어서 좋은 교역자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똑같이 능력이 아닐까요? 성과를 내는 교역자, 능력있는 교역자를 우리는 원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예언하는 능력과 탁월한 지식과 산을 옮길 만한 믿음.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여러분 능력과 스펙, 출신을 보고 사역자를 뽑았다가, 어려움을 겪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역자 뿐 아니라 모두에게 적용이 되죠. 탁월한 스펙과 능력,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있을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보다 능력을 중요시하다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첫째날 저녁 집회 말씀을 잠시 복습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사랑이란 체크 리스트를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죠.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되려면, 인내해야 하고, 친절해야 하고, T보다는 F여야 한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번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보자, 화이팅” 오늘부터 우리 사랑하는 거다?” 그렇게 하지 않아요
바울은 사랑을 감상적으로 뜬 구름 잡듯이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어떻게 하죠? 사랑을 만나라고 합니다. 이게 목요일 저녁에 나눈 사랑의 핵심원리인데요. 오늘도 이 원리를 가지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면 사랑을 만나야 하는데요. 첫번째, 사랑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두번째, 사랑에 안겨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래야 여러분은 사랑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1. 사랑의 판단

첫째, 사랑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 앞에 내 안에 사랑없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먼저 사랑의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완전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요일날 우리가 살펴 본 7절이죠.
고린도전서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실패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까지 했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에게서 내가 원하는걸 얻어내려고 한겁니다. 하지만, 바울은 진정한 사랑은 그런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 상대방에게서 무엇을 얻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한 사랑의 정의를 이렇게 말할 수 있을거 같아요. “나의 기쁨과 행복이 아니라 상대방의 기쁨과 행복을 바라는 것” “내가 기대하는 모습이 아닐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소중히 여기고 기뻐하는 것”
그런데, 여러분 문제는 우리 안에 이러한 사랑이 없다라는 것이죠.
고린도전서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의 전 재산을 주고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순교를 할 각오가 되어 있더라도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가능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예화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팀 켈러 목사님의 탕부 하나님에 나오는 예화인데요. 예전에 제가 들려드린 적이 있습니다.
옛날 옛적에.
한 농부가 있었는데, 이 농부는 왕을 존경했습니다. 어느날 이 농부는 거대한 당근을 키워서 왕에게 가져가서 말합니다. “페하, 지금까지 제가 키운 것 중에 가장 큰 당근입니다.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 왕께 드립니다”
그러자 감동을 받은 왕은 그 농부에게 지금보다 2배나 큰 밭을 선물로 줍니다. 너무나 기쁜 농부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어떤 한 귀족이 이 상황을 지켜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귀족은 생각합니다. “당근 하나로 저 정도의 땅을 얻었다면, 그보다 더한 것을 바치면 어떻게 될까?” 금도끼, 은도끼인지, 흥부와 놀부인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이 귀족은 왕에게 가서 말을 바치며 말합니다. “폐하, 제가 키운 말 중에 최고의 말입니다. 저의 사랑과 존경과 표시로 왕께 드립니다”
그런데, 왕은 이미 이 귀족의 마음을 간파하고, 그냥 고맙다고 하고, 귀족을 집으로 돌려 보냅니다. 기대했던 시나리오가 나오지 않자 귀족은 당황해 합니다. 그러자 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를 집으로 돌려 보내는 이유는 농부는 나에게 당근을 주었으나, 너는 자신에게 말을 주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이야기 들었을 때 충격적이었습니다. 제가 귀족 같았거든요.
여러분, 이 귀족은 왕을 사랑하고 존경해서 말을 준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왕에게 말을 준것이죠. 결국 왕에게 말을 준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말을 준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이해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조건적이고 거래적인지를 뼈아프게 보게 됩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 기도하나요? 왜 예배 드립니까? 왜 봉사하고, 열심으로 교회를 섬깁니까? 만약 그 마음에 동기가 복받기 위한 것이 전부라면, 여러분은 말을 준 귀족과 다를 바 없습니다.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이죠.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수단일 뿐이죠.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열심을 받으실까요?
이사야 말씀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선으로 얼룩진 예배를 보시고 “내가 너희의 예배를의기뻐하지 아니한다. 견디기 힘들다, 지쳤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수많은 제물과 살진 짐승을 드렸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예배가 이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화려한 시스템과 화려한 연주, 화려한 찬양이 울려퍼지더라도, 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 편에서는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들릴 뿐입니다.
차라리 부족하고, 완벽하지 않더라도, 당근을 드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게 낫죠.
여러분, 이렇게 우리는요. 겉으로 보기에 사랑의 행동을 할 수 있지만, 그 마음 가운데는 자신을 향해 굽어 있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희생과 헌신을 하지만, 상대방이 그에 대한 마땅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 실망합니다. 결국 내가 받을 것을 기대하고 하는 행동이었으니깐요.
봉사를 하더라도 상대방이 아니라 나의 보람이 중요하죠. 인증샷 찍어서 올리는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내가 이만큼 희생하면, 상대방도 그래야 한다고 우리는 은근히 요구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구제를 할지라도 그 사람을 전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고도 하나님를 전혀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 자신은 상대방에게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기 원하죠. 정작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그래서, 온전한 사랑은 우리를 판단합니다. 우리 안에 진짜 사랑이 없다는 것을요.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을 만나는 겁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사랑을 우리에게 하라는게 아니라 그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욥기를 보면 하나님과 사탄이 욥을 두고 논쟁을 벌이죠.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에 대해서 말합니다. “내 종 욥을 보았느냐. 욥처럼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다”
그러자 사탄이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욥이 과연 이유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그의 소유물을 주시니깐, 그거 바라보고 하나님 섬기는거 아닙니까? 욥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지는 복을 섬기는 겁니다. 한번 그 모든 것을 거두어가보십시요, 욥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래서, 욥의 시험이 시작되죠. 재산 잃고, 자식 잃고 ,건강까지 잃습니다. 그러자 그 온전하고 정직하다던 욥도 하나님을 부정할 뻔하죠. 그만큼 인간의 마음은 굽어있고, 자신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보다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고,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보단 그 사람이 나에게 유용하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상대방을 통해 내 이미지를 구축하려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의 판단은 정당합니다. 우리는 실패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죄입니다.

2. 사랑에 안겨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사랑 앞에 깨어지고 실패한 존재임이 드러나지만, 두번째 그 사랑에 안겨야 합니다.
바울은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준다고 했죠. 항상 참으시고, 항상 소망하시고, 항상 견디시는 분. 완전한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를 보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는데요. 지난주 얘기했던 성육신 교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완벽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이 하나님이자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때, 말 그대로 인류의 죄악이라는 무게가 그분에게 지워진거죠.
그 죄악의 무게를 짊어지고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씀하셨고,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셨습니다.
이 일을 과연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중 누구도 이 일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갑자기 누군가 내가 예수님처럼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겠습니다”라고 한들 백번을 죽어도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오직 예수님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어때있을까요? 우리들의 도움이 필요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직 홀로 십자가를 감당하셨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인간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요?
우리가 겪는 고통과 연약함,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은 연약한 우리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경험해보지 않고 너무나 쉽게 말하는 사람들 있죠. 전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요즘 제가 금요찬양인도를 잠시 쉬고, 2부 찬양인도를 하고 있는데요.
저 대신 김영선 목사님이 금요 찬양인도를 하시는데요. 영선 목사님이 그런 얘길 하더라고요. “직접 해보니깐, 신경써야할게 너무 많다.”
해보지 않으면 찬양인도 그냥하면 되는거 아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직접 해보면 알거든요. 얼마나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든다는 것을요.
방송팀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오타가 나고, 가사가 제 때 뜨지 않냐. 우리는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직접 올라가서 해보면요. 얼마나 촌각을 다투면서 예배를 섬기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목자들도 마찬가지죠. ‘왜 저렇게까지 밖에 못할까?’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근데 목자를 직접 해보면 그 말 쏙 들어갑니다.
여러분 섬기는 분들에 대한 감사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만약 예수님이 인간이 아니셨다면 그러시겠죠. “야 그거 그냥하면 되잖아. 믿으면 되고, 기도하면 되잖아” 그게 뭐가 어렵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써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고통과 내적인 괴로움을 다 경험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맘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도다”라고 말씀하시잖아요.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이십니다. 그 누구도 이 사랑을 보여준 사람은 없어요. 예수님만이 우리가 원하는 사랑을 하신 분입니다.
이 시점에서 이러한 질문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철학적인 질문일 수 있는데, 왜 인간은 사랑받기를 갈구하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기를 바라고, 인정해 주기를 바라고, 사랑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누구도 그렇게 해줄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해본적도 없고, 받아본적도 없죠.
C.S.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보면 악마가 인간을 보고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속셈이 있지 않고는 무조건으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원합니다. 우리의 본성과는 제일 반대되는 것이죠. 본성적으로 우리는 움켜쥐는데, 사랑은 손해보고, 희생하고 포기하는거잖아요. 정작 내 자신을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상대방에게는 그러한 사랑을 원합니다.
왜 그럴까?
여러분, 아담의 죄성이 우리 마음 가운데 고스란히 남아있듯이, 우리 안에 남아있는 겁니다. 뭐가?
태초에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받았던 기억.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그 충만한 사랑에 대한 기억이 우리 영혼에 희미하지만, 새겨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충만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의 그 마음은 공허한 겁니다. 항상 사랑에 배고프죠. 그렇다면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요?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어서스틴이 말했죠. “인간의 텅빈 마음은 오직 하나님만 채울 수 있다”
어떤 모조품도 우리의 마음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완벽한 사랑만이 우리를 배부르게 할 수 있고, 우리를 채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분만이 하나님이자 인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영혼은 진정한 사랑이신 그분 품 안에 안겨야 진정한 안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그토록 찾았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품 안에 안기시기를 바랍니다.

3. 온전한 사랑은 다른 이들을 사랑하게 한다.

세번째 그렇게 예수님의 사랑 안에 안기게 되면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고린도전서 13:6 NKRV
6 ….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여러분,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사랑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기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기뻐하는 것에는 깊은 차이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기뻐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관계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그 사람을 기뻐하지 않는다면 여러분, 그것은 거짓된 사랑일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복음을 단순히 지식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복음만이 모든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지식으로만 복음을 알았던면 복음을 부끄러했을 겁니다. 하지만, 복음을 경험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기뻐하는 것이죠.
그렇게 복음을 아는 것을 넘어 기뻐하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골로새서 1:6 NKRV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복음을 듣고, 은혜를 깨닫게 되면 열매는 맺게 된다는 것이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너무나 많이 들었던 표현이기 때문에 무감해질수 있는데, 바울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 즉 예수님을 기뻐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강제로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이신 예수님,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되면 우리는 그분을 기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야말로 정말로 우리가 그토록 찾았던 사랑, 채워지지 않는 우리의 심령에 진정한 만족을 가져다주는 사랑, 나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어준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기뻐하게 되고, 더 나아가 노래하게 되죠. 이게 핵심인데,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게 됩니다.
평생 교회를 다니면서 복음을 알고 들었지만, 결코 복음을 노래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 때 앞에서 부르니깐, 따라 부르는 그런거 말하는거 아닙니다. 예배 때 찬양하는 시간을 준비 찬양정도로 생각하는 그런거 아니에요.
갑자기 찬양이 마음을 파고 들기 시작할 떄, 예전에는 그냥 멜로디에 지나지 않았는데, 찬양이 나의 기쁨이 될 때, 영혼의 멜로디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렇게 복음을 노래할 때 변화는 시작되고, 거기에서 열매가 맺고 영적인 성장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복음반을 10번을 들었어도, 그 복음을 기뻐하고 노래하지 못한다면, 그건 죽은 지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기뻐하고 있나요? 복음을 노래하고 있나요?
내 안에 사랑이 없다면, 사랑하려고 노력하기 이전에 복음을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번 겨울수련회를 통해 더디사이플 공동체가 복음을 이전보다 더 기뻐하고, 노래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해야 진리와 함께 기뻐할 수 있는걸까요.
여러분, 아시겠지만 노래를 부르려면 악보를 보고 연습을 해야 하겠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말씀이라는 악보를 보고 노래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여러 악보가 있지만, 이사야에 있는 악보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49:15–16 NKRV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부모님의 사랑이 고귀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죠. 나이가 들수록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완벽해 보였던 부모님도 한 사람의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잖아요.
이사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어머니의 사랑도 실패할 수 있다. 결국 부모도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 것이고, 그 사랑은 고귀하지만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사랑은 그렇지 않다. 부모가 너희를 잊을지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않는다. 나는 너를 있는 그대로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손바닥에 새겼다”
여러분 몸에 새겨진 타투는 지어지지 않죠. “내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다” 뿐만이 아닙니다.
이사야 49:18 NKRV
…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
결혼식 때 신부는 여러 장식으로 자신의 몸을 꾸미죠. 하나님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희들을 우리를 장식처럼 몸에 찰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냐면, “너가 나의 자랑이고, 나의 아름다움이고, 나의 기쁨이다”
어제 우리가 나의 하나님이라는 찬양을 했죠.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참 귀하다 어느 보석보다 귀하다 네가 사랑스럽지 않을 때 너를 온전히 사랑하고 너와 함께 하려 내가 왔노라”
하나님이 이것을 내 삶을 맹세한다라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생각한다면, “네 그렇군요.”에서 끝날 수 없죠. 이 놀라운 진리를 기뻐하며 노래하게 됩니다.
복음이 악보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노래하게 됩니다. 세상의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노래하게 만들지 않죠. 복음은 우리를 노래하게 합니다.
이 복음을 깨닫고 노래하기 시작할 때 어떠한 일이 일어냐냐면 두 가지입니다.
방금 전에 말했듯이 첫번째 열매입니다. 변화가 일어나고, 성장하게 됩니다. 단순히 멜로디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때 우리는 변화되게 됩니다.
그리고, 두번째.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위대한 설교자이자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기독교인과 종교인을 구별하는 방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기독교인은 성장하면서 예배의 기쁨을 계속해서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더 많이 노래할수록 더 큰 변화가 일어난다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기뻐하는 예배자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말을 주려는 귀족이 아니라 작은 당근이라고 기쁘게 드리려는 농부의 모습이 됩니다.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그 자체를 기뻐하게 됩니다.
따라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향한 찬미가 날마다 커지는 사람들입니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또 하나의 구별법은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거룩함을 사모하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렇게 질문할 수 있죠 .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들은 왜 거룩함을 좋아하지 않는 걸까?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거룩함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예배합니까? 우리 삶에 도움이 되서? 아니죠. 하나님을 기뻐하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큰 기쁨이고 유익이죠.
하지만,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수련회 때 왜 4번씩이나 집회를 잡았냐고요? 이게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3시간 예배해도 지치지 않는 이유? 하나님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기뻐하고, 노래하게 될 수록 하나님께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줄어들게 되고. 하나님 자체를 더 바라게 됩니다. 하나님의 손이 아니라 그분의 얼굴을 더 구하게 되는거죠.
얼마전 제가 아침에 준비하다가 갑자기 아내의 얼굴을 뻔하게 쳐다봤습니다.
그러자 아내에게 저에게 말하더라고요. “왜? 뭐 해줘?”
그래서, 전 말했죠. “아니, 그냥 본거야”
여러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지게 되고, 이유없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게 보상이죠.
여러분은 하나님을 그렇게 예배하고 있나요? 그분의 얼굴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분의 아름다움에 사로 잡혀서 찬양이 끊이지 않는 것을 경험해보셨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기뻐할 때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넘치게 될 것이고, 그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죠. 우리 안에 예배가 넘쳐날 때, 서로를 향한 사랑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흘러넘침이 다른 곳이 아니라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의 자리에서 경험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예배는 우리의 모든 부족한 것들 채웁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더라도, 예배가 약하면, 삐끗거리고 문제가 생깁니다.
근데 예배가 충만하면요. 우리 안에 기쁨과 사랑이 충만해지기 때문에 부족하더라도 모든 것이 채워지게 됩니다.
바울이 말한 사랑의 체크리스트가 자연스럽게 되어집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과 닮아가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진실은 사랑이 아니고, 진실이 없는 사랑도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더디사이플 공동체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더욱 복음을 경험해야 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야 함을 믿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분을 기뻐하십시오. 그분의 사랑으로 채우십시오.
복음의 능력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우리를 사랑으로 적실 것입니다.
주님 무어라 말할까요
주님 무어라 말할까요 그냥 주님이 좋은 아주 작은 저예요
주님 어떤 말로 다 할까요 주님 사랑하는 맘 주님 사랑하는 나
주님 내 주님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뛰어요
주님 내 주님 주님 곁에 머물고 싶어요
보이지 않아도 주 따라갑니다 나는 모를 때도 주님 다 아시니
보이지 않아도 주 사랑합니다 오직 선하신 나의 주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