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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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39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40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서론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현실밖에 보지 않는다.”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말로 널리 알려진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세상의 다양한 견해를 무시하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듣고 보는 태도를 잘 표현하는 말로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확증 편향’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러한 사람들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생각과 가치관을 절대로 바꾸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증거는 이를 악물고 무시합니다. 그러다 자기 생각에 맞는 생각이 하나 나타나면 맞아맞아 하면서 그것만 받아들입니다.
대표적으론 몇년 전 한창 시끄러웠던 한강 의대생 실종 사건이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검찰과 경찰의 많은 조사를 통해 무혐의로 처리된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아무리 살인 사건이 아니라는 증거를 제시해도 살인 사건이라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곤 자신들의 생각에 맞는 증거가 나타나면 99개의 증거를 무시하고 1개의 증거를 물고 늘어졌습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과 심리가 바로 ‘확증편향’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또한 이러한 자들이 나타납니다. 수많은 증거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생각만을 주장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들이 이러한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 유대인들은 8장 59절 때와 같이 또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반응에 예수님께서는 32절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간단했습니다. “내가 선한 일 밖에 한 적이 없는데 왜 나를 돌로 치려고 하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는 저번주에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던 수전절의 의미와 묵상하면 더 분명해집니다. 저번 주에 들으셔서 기억하시겠지만 수전절이란 마카비 가문의 사람들이 셀류쿠스 왕조로부터 성전을 다시 되찾은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은 수전절을 기념하면서 마카비 가문의 선한 일을 기리고 공경하는데, 마찬가지로 선한 일을 한 나는 왜 돌로 쳐 죽이려 하느냐?”라며 유대인들의 모순을 꼬집으신 겁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신성모독 때문이다”라고 답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한 것은 인정하였습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걸고 넘어지는 것은 예수님이 30절에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감히 하나님과 하나라며 하나님과 맞먹으려 한 것이 신성모독이라 주장합니다.
아마 평소의 예수님이셨으면 이 정도 상황에서는 자리를 피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피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신성모독이라는 주장에 적극적으로 반박하십니다. 이제 유대인들의 24절의 요청처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명확하게 드러내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저번주에 살펴보았지만 유대인들은 요청은 그러한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비꼬려 단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명확한 뜻을 드러낸 아이러니처럼 유대인들의 요청 또한 그 의도와 다르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34절과 36절을 살펴보겠습니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이 말씀을 보면 아마 많은 분들이 당황하실 것입니다. 저도 처음 이 말씀을 보았을 때 당황했습니다. ‘사람이 신이라고???? 하나님만 유일한 신이 아닌가???’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저도 그렇기에 당황을 했고 이 말씀에 대해 많이 찾아보고 연구해보았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시편 82:6절을 인용하신 말씀이십니다. 시편 82편은 자기 자신을 신과 같이 높이 여기는 교만한 왕이나 높은 지위의 인물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살펴보면 더욱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맞지 않는 인용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유대인들의 모순과 이중적인 모습을 지적하기 위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열심히 지킨다는 율법과 성경에 사람을 신이라고 부르는 구절이 있고 너희는 문제 삼지 않지 않냐? 그런데 내가 나를 신으로 부른다고 율법을 어겨서 죽인다는게 말이 되냐?”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분노한 이유가 율법과 성경을 어겨서가 아닌 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적은 타당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출 7:1과 같이 유대인들은 때때로 모세나 사사들을 신이라는 호칭으로 불렀습니다. 또한 요 8:41을 보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했습니다. 요 5:18에서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던 모습과 모순됩니다. 즉, 유대인들은 진실로 예수님께서 율법과 성경을 어겨서 죽이고자 했던 것이 아닙니다.
결국 진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던 것은 율법과 성경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진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이유는 예수님의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라면서 자기들이 원하는데로 로마를 물리쳐주진 않고 자기들의 죄만 지적하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은 이처럼 죄악된 이기적인 마음을 거룩한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포장한 유대인들의 이중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죄송합니다. ‘입 닥치고 내가 원하는 거나 내놔.’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의 죄와 잘못을 지적은 듣기도 싫고 내가 원하는 것만 내놓길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이러한 마음은 다 숨긴채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데, 교회를 위하는데 왜 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냐고 원망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우리는 오늘 유대인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욕심으로 눈이 가려져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우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37-38절에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못 믿겠다면 자신의 일이라도 믿으라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답답하시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못 믿겠다면 자신의 행한 일이라도 믿으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눈 앞에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의 죄악된 모습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 3:2, 5:19, 5:36, 10:25 에 걸쳐 계속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행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영적 맹인들,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유대인들의 확증편향을 지적하신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일들을 보면 예수님을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선 이룰 수 없는 일인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행하신 일이 단순히 기적이기 때문에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행하신 일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이 아니면 안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행함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면 가르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행하신 일에는 하나님의 흔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행하신 일이 기록된 말씀을 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일에 드러난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제가 청년부 공과 시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 핵심은 기적이 아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도 그러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와 ‘그분의 뜻은 무엇인가?’입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주며, 유일한 신이시며, 능력이 있음을 드러내고 증명하기 위하신 것이지 그것이 우리가 믿어야 할 핵심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 사랑의 증명으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벗어나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으로 향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증언한 것을 기억하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 바라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바라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기에 욕심으로 영적 눈이 가려지지 않았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여러분 나를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믿지 못하는 것은 성경의 지식이 부족해서, 교회 생활을 적게 해서, 은혜를 못 받아서, 우리 집이 믿음의 집안이 아니어서, 똑똑하지 못해서 등등이 아닙니다. 내가 믿지 못하는 것은 내 욕심이 내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내가 원하는 것만 추구하고 그것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욕심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을 알고 가까워지기 원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완전히 친밀할 때 내 영혼의 갈증이 완전히 해소될 수 있음을 믿고 나가야 합니다. 더 이상 세상의 헛된 욕심과 욕망으로 내 영혼의 갈증을 채우려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보다 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 더 크고 진정한 만족을 내게 주는 것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기적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보다 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는 것이 더 크고 진정한 만족을 준다는 사실!!!!!” 이것을 믿어야 할 것 입니다.
결론
유대인들의 기대는 로마로부터 해방과 강대국이 되어 부유해지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자신들을 괴롭히던 원수들을 무찌르고 그들을 짖밟게 해줄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눈 앞에 두고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욕심으로 인해 영적 눈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증언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랬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만 바랬고 그렇기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알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의 증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철저히 성경에 기초하여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내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삶이 참 행복과 만족인 것을 믿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영적 눈이 활짝 열려 예수님을 만나고, 그 음성을 듣고, 참 만족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음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