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8)
Notes
Transcript
룻기(8)
룻기 4장 1-22절
지난주에 우리는 3장 18절의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라는 말씀까지 살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뒤를 이은 사건, 곧 보아스가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는 일과 룻과의 결혼을 마치기까지 쉬지 않고 일을 성취시킨 것과 그 뒤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살피려고 합니다.
우리 성경에는 생략되었지만, 원어에서는 1절이 “그리고”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즉, 보아스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시작했고 나오미의 말처럼 마치기까지 쉬지 않을 겁니다.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갔다는 말씀으로 보아스가 일을 시작했음을 알려줍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했던 말을 보아스가 들었던 것처럼 정말로 보아스는 모든 일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하루를 분주하게 보냅니다.
성경에서는 성문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자주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문 앞 공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휴식을 취하거나 회합의 장소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도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성문에서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최대한 증인들을 많이 확보하고, 공식적으로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는 일과 룻을 아내로 맞이하는 일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서 앉아 있었는데, 우리 성경에서는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 당사자가 보아스의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 사람에 대해서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아무개라고만 부르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그 사람을 불렀고, 또한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해서 같이 자리했습니다. 장로 열 명을 청했다고 할 때, “청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보아스가 정로들을 불러 모았음을 의미합니다. 보아스는 아주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3절에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에게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나오미가 팔려 하니까 그것을 당신이 그 기업을 물러주던지 아니면 그 다음이 자신이니까 자신이 물러주겠다고 말을 합니다.
땅의 소유권을 나오미가 팔려고 하고, 그 소유권이 다른 집안이나 지파로 팔리게 되는 것을 같은 집안 사람이 해결해 줘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을 해결해 주는 것이 고엘, 즉 기업 무를 자입니다.
아무개라는 사람이 바로 그 첫 번째 대상인데, 그 사람이 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 다음은 보아스가 해야 합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아무개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아무개가 하지 않으면 보아스 자신이 할 것임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절 끝부분에 보면 아무개가 자신이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아무개는 기본적으로 율법이 명령하고 있는 것을 수행하려는 생각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5절에서 보아스는 땅 문제만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룻과 결혼해서 기업 무를 자녀를 낳아줘야 한다는 것도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보아스는 룻에 대해서,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이라는 설명을 붙입니다. 이 표현은 사실인데, 아무개라는 사람에게 부담스러운 표현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개가 4절에서는 “내가 무르리라”라고 말했지만, 모압 여인 룻을 통해서 죽은 자의 기업을 세워야 한다는 말에 6절에서는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무르지 못하노니”라는 표현은 무르는 것을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4절에서는 하겠다고 말한 사람이 6절에서 갑자기 태도가 바뀐 것은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아무개가 처음에 땅을 무르겠다고 말한 것은 땅을 물러주고 나오미가 죽을 때까지 보살펴주다가 나오미가 죽으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룻을 통해서 자식을 낳아줘야 한다면, 결국 자신은 땅을 물러주느라 돈도 써야 하고, 나오미와 룻도 보살펴야 하고, 나중에 룻이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을 키워줘야 하고 결국에는 땅도 룻을 통해서 낳은 아들에게 줘서 룻의 본래 남편 이름으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개는 가까운 친족이고 능력도 있지만, 기업을 무를 의지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보아스에게 그 책임을 넘깁니다. 자신은 손해가 있을 것 같아서 무르지 못하겠다던 아무개는 8절에서 보아스에게 “너를 위하여 사라”는 말을 하면서 그 책임을 넘깁니다.
자기에게 손해인 것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아무개는 그렇게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뒤로 물러납니다.
그와는 반대로, 나오미의 말처럼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않는 모습을 보인 보아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장로들과 백성들에게 자신이 엘리멜렉과 그의 아들들의 기업을 오늘 무르고,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아내로 맞이해서 말론의 기업을 이을 자식을 낳도록 하겠다고 말합니다. 정말로 보아스는 자신이 나오미와 룻과 관련된 일을 성취하기까지 쉬지 않는 열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11절에서 성문의 백성들과 장로들은 이 일에 자신들이 증인이 된다고 말을 하면서, 세 가지를 언급하며 축복합니다.
첫째는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라헬과 레아는 야곱의 아내들이고, 이 두 사람은 야곱의 12아들의 어미들이 됩니다. 즉, 야곱의 자식들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룬 것처럼 룻이 그러한 복 받기를 빌고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보아스의 이름이 유명하게 되도록 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자신에게 손해가 있을까 두려워했던 그 사람은 이름이 기억되지 않고 아무개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에 반해서 보아스는 정말로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는 사건으로 인해서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성경에 이름이 기록되고, 수천 년 동안 그의 이름이 불리고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축복을 합니다. 다말도 룻과 마찬가지로 이방 여인이었고, 자기 남편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아기를 낳은 여인입니다. 그의 후손이 바로 보아스가 됩니다. 즉, 룻의 처지가 다말과 비슷한데,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번성한 가문을 이룬 것처럼 보아스도 룻과의 결혼을 통해서 가문이 번성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축복을 해준 것입니다.
이렇게 보아스는 정말로 이 일을 성취하기까지 쉬지 않았고, 나오미의 말처럼 진정 그 일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에서 끝을 내지 않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하고 동침하여서 아들을 낳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3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룻은 이전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서 아이를 갖지 못한 여인입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남자입니다.
두 사람의 처지로 보아서는 자식을 낳을 가망성이 적어 보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들이 자식을 갖도록 하셨고, 그 자식으로 인해서 나오미가 기쁨을 누리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장 16절에서는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원어를 통해서 중요한 사실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한글성경에서는 1장 5절에서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두 아들(뻰)이라고 번역된 원어의 본래 의미는 아기(옐레드)입니다.
그러니까 1장 5절에서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기를 잃고 그 뒤에 남았던 것인데, 4장 16절에서는 나오미가 아기를 품에 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룻기의 시작에서 나오미의 죽은 두 아들을 아기로 표현하면서 나오미에게 남겨진 것이 없는 상실, 곧 고통만 가득한 상태로 출발하지만, 룻기의 마지막에서는 나오미에게 새로운 아기, 곧 룻이 나은 아기를 얻게 되면서 생명으로 마치게 됩니다.
룻기를 전체적으로 살핀다면, 상실과 고통으로 시작된 나오미와 룻의 인생 여정이 소망과 기쁨으로 마치게 됩니다. 그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른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오미와 룻으로만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룻이 낳은 아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즉, 나오미가 품에 품은 아기는 훗날 다윗의 조상이 되고, 더 뒤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육신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룻기에서는 알 수 없지만, 마태복음에서 나온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아스의 어머니가 여호수아에 등장하는 기생 라합이라는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이방인이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그에 따른 믿음을 가지고 생명을 구한 사람입니다. 놀랍게도 그런 여인을 통해서 하나님은 보아스라는 자식을 낳게 하셨고, 훗날 자신의 어머니처럼 이방 여인으로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보호를 받으러 온 룻을 돌보도록 보아스를 준비시키셨습니다.
결국 우리는 보아스와 나오미 그리고 룻이라는 인물들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셨고, 그들을 통하여 다윗을 이 땅에 보내셨고, 또한 그 혈통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길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보아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 순종을 했을 뿐인데, 율법을 지켰다는 성취감과 더불어 현숙한 여인인 룻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복과 늦은 나이에 자식을 얻었다는 기쁨을 얻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보아스가 한 일들은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예언하셨던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길을 예비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를 따라서 충성스러운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놀랍게 이루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도 충성스러운 백성이 되자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집중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방 여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보아스가 늙은 나이가 되도록 결혼하지 못한 것은 룻이라는 현숙한 아내를 얻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입니다.
또한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버리고, 모압이라는 이방지역으로 옮겼을 때, 엘리멜렉과 두 아들은 죽게 되었고, 나오미는 절망 가운데 모압 며느리인 룻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순종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다는 것만 인식하는 나오미에게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도록 보아스와 룻이라는 두 사람을 준비시키셨고, 그들을 통해서 나오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보아스나 나오미 그리고 룻이라는 개인적인 인물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도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감사히 여겨야 할 것은, 이렇게 그들의 개인적인 일로 끝날 수도 있는 사건들이 결국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예수님을 준비시킴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룻과 보아스를 복되게 하신 하나님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길을 예비하신 하나님을 봐야 합니다.
물론 룻기는 다윗이라는 위대한 왕이 어떻게 태어났는지에 대한 그 집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을 알고 있기에 룻기는 결국 그리스도가 오시는 길을 예비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려주는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룻기 3장 18절의 나오미가 했던 말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오미가 했던 말은 보아스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성취하기까지 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룻기 전체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구원 역사를 성취하기까지 결단코 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나오미처럼 죽음을 맞이하고, 괴로움과 고통의 인생을 살다가 죽을 인생입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생명과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천국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앞에서 아무개가 자신은 손해가 있을 것 같아서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권리를 넘기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기업 무를 권리를 행사하게 되면 아무개가 걱정한 것처럼 손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에게 있어서 금전적 손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일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과 서로 가장 사랑하는 관계에 있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을 당하는 일이 십자가 위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러한 고통이 있더라도 십자가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 바로 십자가에 있었고,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는 고통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신 예수님의 은혜가 바로 복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결단코 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주님이시고, 우리의 동반자가 되시며, 우리의 왕으로 우리를 항상 다스려주십니다.
